51. 그 남자가 셔츠 단추를 푼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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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 남자가 셔츠 단추를 푼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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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 남자가 셔츠 단추를 푼다는 건
2023.03.26.
쿡 찌르면 흥분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쏟아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영악한 구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정을 너무 만만히 봤음을 깨달은 명옥은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
“…….”
“이런 곳, 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표정에 다정의 눈동자가 다소 누그러졌다.
“이건 소중한 물건인 것 같은데 다시 잘 넣어둬요.”
명옥이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사실 그저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이유가 꽤 그럴싸해 진심처럼 들렸다.
“……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명옥이 눈빛을 달리했다.
“그럼 이제 진짜 중요한 얘기를 좀 해 볼까요?”
“말씀하세요.”
다정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를 잡아 팔자를 고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니, 애초에 그녀가 희망원 운동장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우리 태상이와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요.”
“……네.”
다정은 차분하게 숨을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그럴 계획입니다.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렸네요.”
“인사는 무슨. 괜찮아요. 어차피 하지도 못할 결혼인데.”
명옥이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다정은 조금 당황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왜긴요. 수준, 아니…… 배경 차이가 나도 너무 나잖아요.”
그녀가 한숨을 한번 푹 쉬더니 말을 이었다.
“한다정 씨, 우리 좀 솔직해집시다.”
“……?”
“태상이한테 얼마 받기로 했어요?”
다정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강하게 나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나한테는 솔직해져도 돼요. 태상이와 짜고 판을 벌였다는 거, 다 아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기 중에 스산하게 퍼졌다.
“한다정 씨 고생하는 거, 내가 더 비싸게 쳐 줄게요. 그러니까 나한테 와요. 어차피 얼마 못 가 버려질 텐데, 괜히 태상이 옆자리 욕심내지 말고.”
“……그런 거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저 태상을 돕고 싶었다. 나중에는 태상의 마음이 욕심났고.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그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런 제 마음이, 안타까운 우리의 관계가 서늘한 한 마디로 쉽게 정리되었다.
고생, 돈을 받고 하는 고생이라고.
다정은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차피 한다정 씨한테 효성 안주인 자리는 무리예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가문 자식들도 감당하기 힘든 자리라고.”
“그래서 포기하라 이건가요?”
“네. 포기하세요. 그리고 회장님 앞에서 사실대로 얘기만 해 줘요.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결혼은 꾸며낸 일이라고. 그 한 마디만 해 주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을 벌게 해 줄게요.”
“…….”
참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다정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명옥을 노려봤다. 태상과의 관계를 돈으로만 환산하는 그녀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파는 게 아니라면요?”
“네?”
“본부장님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파시나요? 마음도, 영혼도, 가족도?”
다정이 마지막 한 단어에 유독 힘을 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태상 씨에 대한 제 마음은 파는 게 아니라고요.”
“…….”
“그만 돌아가 주시죠. 어차피 더 계셔 봤자 내어드릴 수 있는 건 여기 이 차 한 잔이 전부니까요.”
말을 마친 다정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법 거센 바람이 일자 명옥이 기가 찬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독 안에 든 쥐 주제에 잘난 척을 한다는 게 우스웠다. 그녀는 한껏 비아냥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태상이가 사준 옷은 마음에 들어요? 어지간한 명품이던데?”
“……?”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받은 거요. 설마 벌써 팔아치우지는 않았죠?”
“그, 그걸 어떻게…….”
다정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명옥이 가볍게 웃으며 옆자리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어떻게 아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요. 다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더 정확히는 다 들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다…… 들었다고요?”
“네. 전부 다. 그날 대화가 모두 녹음된 이 파일로.”
순간, 다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날, 옷을 선물 받았던 그때라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드레스, 지퍼를 올려주던 커다란 손. 그리고.
‘……태상 씨는 필요에 의해서 저를 택한 거잖아요.’
‘진짜로 하는 결혼도 아닌데…… 우습죠?’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다.
다정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뻣뻣하게 굳었다. 머릿속이 정전이라도 된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인정했으면 대화가 빨랐잖아요. 왜 굳이 이런 걸 꺼내게 만들어요.”
그녀가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내 편에 서겠어요?”
“…….”
“아…… 아직도 아니에요? 그럼, 이거 지금 바로 인터넷에 올려버려야겠네요.”
그녀가 위협하듯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일종의 위협사격이라는 느낌이 다분했지만 다정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걸음에 달려간 다정은 그녀의 손을 와락 붙들었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
“역시 안 되겠죠?”
명옥이 제법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지, 지금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좋아요. 기다려 주죠.”
명옥이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자연스러운 허락에 당황한 건 오히려 다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송곳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거 하난 명심해요. 만약 태상이 편에 서게 되면 한다정 씨 인생은 철저히 망가질 거라는 거. 내가 받은 건 두 배로 돌려줘야 하는 성격이라.”
다정이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하는데 그녀가 가방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연락 기다릴게요.”
테이블 위로 반짝이는 명함 한 장이 올라왔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
“차 잘 마셨어요.”
명옥이 입도 대지 않은 차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비죽 올라간 붉은 입술이 마치 사냥을 끝낸 포식자 같았다.
그녀는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정의 앞을 지나쳤다.
또각거리는 힐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탁하고 문이 닫혔다.
혼자가 된 다정은 소파 위로 무너져 내렸다.
***
활주로에 들어선 비행기가 느릿하게 바퀴를 굴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창밖을 바라보던 태상의 미간이 바싹 좁혀졌다.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리 길지도 않은 비행이었는데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친 지 오래였다. 손목을 꺾어 또 시계를 확인하는데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엔진이 꺼졌다.
태상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을 꽉 주었다. 터질 듯 팽팽해진 근육이 슈트를 거칠게 팽창시켰다.
그는 비행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아, 네. 감사…….”
그가 어찌나 빨리 내리는지 당황한 승무원은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너른 보폭으로 탑승교를 빠져나간 태상은 곧바로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성큼성큼 움직이던 그의 발이 순간, 우뚝 멈췄다.
-미안해요.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요.
멍하니 선 태상은 느릿하게 속눈썹을 떨궜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마치 굳어진 석상 같았다.
“…….”
하지만 그도 잠시, 단정하던 표정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일이 생겼다. 보통 좋은 상황을 가리켜서 하는 말은 아닌데.
태상은 굳어 있던 다리를 움직이며 바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뒤,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모르게 착 가라앉은 느낌. 태상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핸드폰을 귓가에 바싹 붙이며 다정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메시지 봤어.”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제가 먼저 가겠다고 해 놓고…….」
태상은 다정의 말을 한 음절, 한 음절 꼼꼼히 씹어 삼켰다.
그냥 미안해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뒤에 숨겨진 감정이 더 있음을 직감한 그는 성마르게 입을 뗐다.
“무슨 일 있어?”
「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
「그냥 보육원 일이 좀 바빠서요. 공항 가기 전에 희망원에 잠깐 들렀거든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할 일이 너무 많은 거예요. 선생님이 한 분밖에…….」
“한다정.”
「네?」
“무슨 일, 있어?”
단정적으로 떨어지는 말끝에서 느껴지는 건 의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다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을 품은 가슴이 느릿하게 부풀어 올랐다.
「태상 씨.」
“듣고 있어.”
「……미안해요.」
“…….”
손에 쥐면 바스러질 듯 여린 음성이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한 줌 남은 인내심은 이미 재가 되어 날아간 지 오래였다.
“가서 듣지.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아, 아뇨. 오지 마세요! 얼굴 보면 미안해서 더 말하기 힘들 것 같단 말이에요. ……그냥 전화로 들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었지?”
「……아까 태상 씨 어머님께서 왔다가 가셨어요.」
발밑이 술렁이는 기분이었다. 태상은 다리에 힘을 꽉 주고 귓가에 신경을 집중했다.
「태상 씨와 제 관계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셨는데…… 우리 비밀을 다 알고 계신 것 같았어요. 미안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상처 입은 듯한 다정의 목소리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태상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에 속으로 신음했다.
“……험한 말, 듣지 않았어?”
“네?”
“모질고, 나쁜 말…… 듣지 않았느냐고.”
턱에 힘을 너무 꽉 주었는지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태상은 꽉 문 어금니에 겨우 힘을 풀고 말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내가 보기 전까진 못 믿겠어.”
그가 셔츠 맨 위 단추를 푸르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가지.”
「안 오셔도 돼요. 전 괜찮아요.」
“금방 가.”
차가 안 막혀도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거리. 금방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태상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는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성급한 그의 구둣발이 매끈한 공항 바닥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기품이 넘치는 슈트가 팔락거릴 때마다 그의 위신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태상은 입국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매서운 눈으로 환영 인파를 훑었다. 단번에 김 비서를 찾아낸 그는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부사장…….”
“차 키 주세요.”
“네?”
“시간 없습니다. 어서요.”
“아, 네.”
태상은 얼떨떨해하는 김 비서에게 키를 빼앗듯 가져왔다.
정신없이 뛰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단 하나, 다정의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어머님께서 왔다가 가셨어요.’
불안함을 흠뻑 머금은 채 떨고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듯 혼란스러워 보였고.
태상은 이성이 마비된 사람처럼 뛰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아, 하아…….”
고통이 점점 온몸으로 퍼져가는데 정신은 이상할 만큼 또렷해졌다.
그 덕분일까.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둔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울렸다.
‘무섭단 말이야. 나도 갈래.’
‘안 돼. 위험해. 넌 여기 있어.’
‘그치만…….’
‘여기 가만히 있으라니……!’
다정의 손을 뿌리치는 그 순간, 태상은 미처 몰랐다.
다정의 한쪽 발이 계단에 반쯤 걸쳐져 있다는 걸. 가벼운 힘에도 균형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다정이 객석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장면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때 일이 눈앞에 떠오르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태상은 머리를 한번 거칠게 털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다정에게 가야 했다. 가서 뭘 어쩔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야 한다는 건 알았다. 상처 입은 마음이 더 아프지 않게 곁에 있어 주어야 했다.
다정을 아프게 한 건 그때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또다시 다정을 아프게 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