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충돌 (50/89)


50. 충돌
2023.03.23.



“아, 아닙니다. 물론 아니죠. 한다정 씨가 오늘 아침에 경기도로 향하는 광역 버스에 타는 걸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버스 정류장 중 하나가 이곳 근처였고요.”

“그 말을 먼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명옥은 최 실장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생활관 건물에 들어선 그녀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구두를 바닥에 비볐다. 자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수수한 차림의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고생은요. 여기 선생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명옥이 기품있는 미소를 지으며 단정히 허리를 숙였다. 우아함이 흘러넘치는 모습에서 조금 전 보인 삐딱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드세요.”

“네. 그러죠.”

명옥은 은혜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소개며, 보육원에 대한 설명이 지루하게 이어지는데 복도 끝에 ‘원장실’이라는 작은 팻말이 보였다.


“저희 원장님은 지금 병원에 입원하셔서 만나 뵙기는 좀 어려워요.”

“네. 압니다. 큰 수술을 잘 이겨내셨다고요.”

“어머, 알고 계시는구나.”

“그럼요. 우리 재단이 단순히 돈만 보내는 곳은 아니니까요. 효성 재단은 마음을 나누는 곳이죠.”

“네…….”

은혜는 감동 받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원장실 문을 열었다.

조잡한 책장이며 낡은 소파. 원장실 안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오는데, 한쪽 구석에 잔뜩 움츠린 가녀린 어깨가 보였다.

너구나.

명옥은 먹잇감을 포착한 사냥꾼처럼 입꼬리를 스윽 끌어 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먹잇감이 그래도 꽤 강단이 있는지, 제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물론,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채 감추지는 못했지만.


“네. 안녕하세요. 여기 선생님 되시나 봐요?”

“어머, 아니에요. 다정 씨는 여기 퇴소한 원생이에요.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와서 보육원일 도와주고 그래요.”

“아…… 그러시구나.”

뻔히 아는 은혜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는 동안 명옥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사진보다 훨씬 더 어려 보이는 것 같은데.

동그랗고 순수한 눈동자가 뽀얀 피부가 퍽 잘 어울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며 수수한 옷차림은 오히려 매력을 더해 주었고.

참 안 어울리기도 하지. 명옥은 짐승처럼 날렵한 태상의 눈매를 떠올리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저…… 저 실은 본부장님 얼굴, 회사 신문에서 본 적 있어요.”

“회사? 어머, 혹시 에어 코리아 직원이에요?”

“네…….”

다정이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했다.

제 얼굴은 물론이고 신상정보까지 다 알고 있을 거면서. 시치미를 떼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온화해 차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것도 인연이네요. 회사 사람을 이렇게 밖에서 다 만나고.”

명옥이 화사하게 웃으며 원장실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다정 앞에 멈춰 서 가뿐하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해요. 한다정 씨.”

“…….”

누구도 성을 붙여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다정은 높게 치솟은 입꼬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미 알고 있다고,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은 동그란 눈매에 바싹 힘을 주었다. 태상이 없는 지금, 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윤명옥 본부장님.”

다정이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래요. 그럼 일단 내부를 좀 둘러보도록 하죠.”

“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은혜가 특유의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명옥에게 다가갔다.


“글쎄요? 저는 기왕이면 한다정 씨에게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다정 씨요?”

“네. 선생님께서 아무리 이곳 시설을 잘 안다고 해도 여기 살았던 사람만큼은 아니겠죠. 안 그래요?”

“…….”

명옥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다정은 불안한 듯 모아쥐고 있던 두 손을 퍼뜩 떨어뜨렸다. 침착한 표정과 시선이 명옥에게 향했다.


“그편이 더 좋으시다면 제가 하도록 하죠.”

“그래요. 갑시다.”

명옥이 시원하게 입꼬리를 꺾으며 몸을 돌렸다. 곁에 서 있던 비서들은 따라오려는 듯 발끝을 틀었다. 그러자 명옥이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그들을 저지했다.


“올 거 없어요.”

짧은 손짓이었지만 주위를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건장한 남자들이 훈련된 사냥개처럼 자리로 돌아갔다.

다정은 은혜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미소를 남기고 걸음을 뗐다.

원장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복도의 기운이 구두 아래로 스몄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 끝을 오므렸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어디부터 갈까요?”

마치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당당한 태도였다. 다정은 속으로 기합을 꽉 주고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원생들 머무는 곳부터 가 보시죠. 아가방이 여기서 제일 가까워요.”

“그래요.”

명옥은 뾰족한 구두 앞코를 내디뎠다. 또각또각,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생활관 안에 높게 울렸다.


 

***

1층 시설을 다 둘러보고 난 후, 다정은 명옥을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지금 이 시설에는 총 몇 명의 원생이 살고 있죠?”

“35명이요.”

“다정 씨처럼 퇴소하고 나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아뇨. 많지는 않아요. 다들 사는 게 바빠서 그런지 일 년에 한 번 들르는 정도예요.”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변명조가 되었다. 다정은 흘러내린 척추에 다시 힘을 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도 명옥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안전 관리는 철저한지, 위생 상태는 청결한지.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던지는 질문들은 죄다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역시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진땀을 흘리며 답하는 사이 남자아이들이 쓰는 방 앞에 도착했다.


“고등학생들이 쓰는 방인가 보군요.”

명옥이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없었지만 책이며 옷가지에서 주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이 함께 머물러요.”

“여기 아이들은 퇴소 후에 진로가 어떻게 되나요?”

“대학 진학을 하는 원생들도 있지만 바로 취직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렇군요. 그럼…… 다정 씨는요?”

“네?”

“다정 씨는 여기 나올 때 계획이 뭐였느냐고요?”

갑자기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되자 말문이 턱 막혔다. 다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명옥을 바라봤다.


“그동안 이런 곳에서 고생했으니까, 나도 잘난 남자 만나서 팔자 한번 고쳐봐야겠다…… 뭐, 그런 생각이었어요?”

팽팽하게 당겨진 눈매와 달리 입꼬리는 비죽 솟아 있었다. 가파른 곡선에 담긴 건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순간, 다정의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슨 말이긴요. 출신에 맞게 분수를 지키라 이거지.”

“추, 출신……!”

울컥 말을 뱉어내던 다정이 말을 뚝 멈췄다.

제게 이런 도발을 할 이유가 없는데. 저를 자극한다고 한들 얻어지는 것도 없을 텐데 도대체 왜.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다정은 차분히 분노를 삼켰다. 겨울 호수처럼 담담한 눈동자가 명옥에게 향했다.


“……생각보다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봐요. 저와, 우리 희망원에 대해서.”

“…….”

명옥은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뾰족이 끌어올렸다. 도발에 쉽게 넘어오지 않은 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다 대답해 드릴 테니까 일단 저랑 같이 내려가시죠. 여기 서서 대화를 나누기도 뭐하니까요.”

다정은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휙 돌렸다. 등 뒤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탄성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느긋한 구두 소리가 추격하듯 다정을 뒤따랐다.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도착한 곳은 처음 출발했던 원장실이었다.

또 여기냐는 듯, 명옥이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안으로 드세요. 저는 차라도 한 잔 준비해 가겠습니다.”

“차는 됐어요. 마신 거로 칠게요.”

명옥이 손끝을 까딱하며 도도하게 말했다.


“손님께 차도 한 잔 안 내드리는 건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물론 이건 제 고집이니까 안 드셔도 괜찮습니다.”

“…….”

명옥은 멀어지는 다정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랫사람에게 ‘네’라는 답변 말고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 만만하게 보지 말라 이거지?”

제법 당찬 반응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명옥에게 다정은 어디까지나 ‘조금 강단 있는 사슴’에 불과했다.

그녀는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푹 꺼진 소파에 앉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여실히 들렸다. 잠시 후, 다정이 찻잔을 얹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탁, 올려진 연둣빛 차에서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딱 봐도 녹차 티백을 우려낸 것 같은데. 소박한 차림새가 귀엽다 못해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취향을 몰라서 가장 일반적인 거로 준비해 봤어요.”

“고마워요. 녹차 좋아해요.”

명옥이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정은 테이블 위에 제 몫의 차를 올려두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발끝이 멈춘 건 좁은 공간 끝에 위치한 책상이었다.


“굳이 원장실로 다시 모신 건…….”

얇고 긴 손가락이 책장에 꽂혀 있는 두툼한 파일로 향했다.


“말씀 나누기 전에 보여드릴 게 있어서예요.”

다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파일을 펼쳤다. 가볍게 열린 커버 뒤로 퇴소한 원생들이 보낸 편지와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세요.”

묵직한 파일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자 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 한 장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명옥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네요. 희망원이 없었더라면, 아빠께서 제 곁에 있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 제 곁엔 이 아이들도 없겠죠? 아빠, 자주 찾아뵙진 못하지만 언제나 마음으로 감사드려요.」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너무 많이 담았는지, 편지지 위에 펜 자국이 꾹꾹 눌려 있었다.


“…….”

명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다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 말조심하라 이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