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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네 곁으로 가고 싶은 밤 (49/89)


49. 네 곁으로 가고 싶은 밤
2023.03.19.


***

드넓은 침대 위, 홀로 남겨진 태상은 텅 빈 옆자리를 조용히 쓸었다.

이제는 아무런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데. 그리움으로 가득한 손길이 시트 위를 떠날 줄을 몰랐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태상은 차마 문을 열지 못했다.

넓은 공간 가득 달콤한 체취가 남아 있을 텐데. 달콤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떠다닐 텐데.

다정의 흔적이 담뿍 느껴지는 공간을 홀로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태상은 짙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만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시트가 너무 차가워 견딜 수 없었다.

느릿한 발걸음이 내선 전화로 향했다. 아무래도 방을 바꾸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위잉, 위잉.

그때, 핸드폰이 부드럽게 울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화면을 확인한 태상의 얼굴이 삽시간에 따스하게 풀어졌다.

낭비되는 1초가 아까운 듯, 그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한다정.”

「여보세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귓가의 솜털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태상은 침대 위에 다시 걸터앉으며 핸드폰을 더 바싹 들이댔다.


“기다렸어.”

「그랬어요? 죄송해요. 씻고 나와서 바로 한 건데.」

“…….”

어쩐지 몽글몽글한 수증기의 향이 코끝에 스치는 것 같았다. 태상은 물기 어린 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멋대로 기다린 내 잘못이지.”

「그건…… 그렇죠.」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물방울처럼 귓가로 떨어졌다.


「오늘 회의는 잘 마치셨어요?」

“잘 마치긴 했는데…….”

아득히 가라앉은 시선이 비어 있는 옆자리로 향했다.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야.”

「내일 오후 비행기로 돌아오시는 거죠?」

“응.”

「……저기, 있잖아요.」

잘게 떨리는 음성이 조심스레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복숭아처럼 붉어진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태상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늘요…… 일 끝나고 오는 길에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요.」

“그런데?”

「공항으로 드라이브 가는 게 생각보다 괜찮대요.」

“……?”

「내일…… 제가 공항으로 마중 나갈까요?」

한껏 예민해진 감각 사이로 태상이 조용히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는 아득히 가라앉았고 또렷하던 눈매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한다정.”

「네?」

“지금 네가 여기 없어서 너무 다행이야.”

「왜요?」

“내가 지금 너무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거든.”

이런 얼빠진 표정을 다정에게 보이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나직이 말을 흘리는데 무슨 소리냐는 질문이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갸웃이 기울어진 고개가 눈앞에 선했다. 태상은 그저 가볍게 웃을 뿐 답을 해주지 않았다.


「오늘은 잠 잘 올 것 같아요?」

“아마도.”

「그럼 약 안 먹어도 되겠네요? 다행이다…….」

수줍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보드랍게 간질였다. 기분 좋은 감각이 연달아 휘몰아치자 더는 참아내기 힘들었다. 태상은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머리를 뒤로 툭 젖혔다.

가벼운 충돌과 함께 옅은 진동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찌르르한 그 느낌마저 좋았다.


“앞으로도 안 먹을게.”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때에 따라서는 먹어야죠. 그러라고 처방해 주는 건데…….」

민감한 이야기를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다정이 끝으로 갈수록 말을 흐렸다.


「저기, 태상 씨.」

“……?”

「이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요.」

“해 줄게, 대답. 그러니까 물어봐.”

「진료는…… 잘 받고 있어요?」

다정이 구체적인 이야기를 피하며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잘 받고 있지.”

태상은 가벼운 거짓으로 다정을 안심시켰다. 사실 다정을 만난 후, 진료 같은 건 받은 적이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악몽도 없었고, 신기루 같은 다정을 찾다가 지치는 일도 없었으니까.


“출장 오기 전에도 병원 다녀왔어.”

「의사 선생님께서 뭐래요? 많이 나아졌대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탓일까, 다정은 평소보다 조금 과감하고 거리낌 없이 질문을 던졌다.

침대에서 가까워질 때가 가장 좋은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이거대로 또 좋았다.


“옛날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대.”

「정말요?」

“응. 날 어릴 때부터 봐온 의사 말에 의하면 그래.”

「다행이다.」

태상은 침실 불을 끄고 무드 등만 흐릿하게 남겨두었다. 몸을 감싼 시트가 더는 싸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 덕분이야.”

「제, 제가 뭘요…….」

또였다. 수줍게 가늘어진 목소리가 귓속 신경을 타고 빠르게 온몸으로 퍼졌다. 태상은 베개 위로 느릿하게 머리를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침대에 누웠어요?」

“응.”

「그럼 이제 얼른 자요.」

“글쎄. 하나도 졸리지가 않네.”

「거기 열한 시 반 아니에요?」

“맞아.”

「자꾸 말하면 잠 더 깰 텐데…….」

“그럼 난 듣기만 할게.”

「…….」

“그러니까 계속 말해줘. 계속.”

태상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두 눈이 기쁨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

오랜만에 맞이한 휴일. 다른 회사원들 같으면 한창 침대에 붙어 있을 시간이었지만 다정은 달랐다.

일이다 뭐다 한동안 보육원 일에 소홀했던 것 같은데.

죄책감의 크기만큼 양손이 무거웠다. 원장실에 들어선 다정은 묵직한 간식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은혜가 득달같이 달려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다정 씨, 이젠 이렇게 안 사와도 된다니까. 요새는 먹을 게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죄송해요. 워낙 습관이라.”

넉넉해진 살림 덕에 희망원 식구들은 전에 없던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안정적인 주거 환경이며 적극적인 지원. 태상이 마련해준 든든한 울타리는 희망원 식구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제 가족이 되어 주겠다는 그의 말에는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던 걸까. 저도 모르게 태상을 떠올리고 있는데 은혜가 생각을 훅 자르고 들어왔다.


“다정 씨.”

“네?”

“요새 뭐 좋은 일 있어요?”

“그래…… 보여요?”

“네. 아까부터 연신 싱글벙글이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글쎄요. 따, 딱히 좋은 일 같은 거 없는데……?”

“아…… 알겠다. 다정 씨, 연애하죠?”

다정은 봉투에서 과자를 빼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굳어진 모양새가 마치 로봇이라도 되는 양 뻣뻣했다.


“와…… 온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축하해요.”

은혜는 안 그래도 큰 입을 시원하게 벌려 웃었다.


“고, 고마워요. 근데…… 티 많이 나요?”

“네. 엄청요.”

“아, 그렇구나…….”

어차피 다 알게 될 소식이었지만 제 입으로 연애 소식을 전하는 건 아직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멋쩍게 뒷목을 긁는데 운동장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다정은 토끼처럼 고개를 쭉 빼고 바깥을 내다봤다.

창밖에는 보육원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다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은혜가 부산스럽게 앞치마를 벗었다.


“아, 오셨나보다.”

“누구 올 사람이 있어요?”

“오늘 효성 재단에서 사람이 방문하기로 했거든요.”

“효성 재단이면…… 김 비서님이요?”

“아뇨. 김 비서님 말고 다른 분이요.”

“누구…….”

그때, 열린 차 문 뒤로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정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 사람이 여긴 왜.

명옥은 사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비서진을 양옆에 대동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굽이 그다지 높지 않은 구두, 노려보는 듯한 선명한 눈매. 우아한 사모님이라기보다 사냥터로 나가는 여전사 같았다.


 
다정은 연약한 초식동물처럼 몸을 웅크렸다. 어깨를 끌어안은 채 창 옆으로 바싹 붙어 서자 은혜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왜 그래요?”

“저, 저분이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재단 복지비가 잘 쓰이는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으시대요. 사회 환원의 일종으로 일일 봉사도 참여하신다고 하고.”

“그, 그럴 리가요. 부사장님께서 희망원 일은 모두 김 비서님께 일임하셨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큰 재단 관계자가 어디 한두 사람이겠어요? 저분은 재단 법인 팀장이래요. 그게 뭐 하는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우리는 그냥 하던 대로만 하면 돼요.”

은혜가 싱긋 웃으며 다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가 분명했지만 다정은 잔뜩 올라간 어깨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곳을 찾아온 게 우연일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정 씨, 나 먼저 나가서 인사 좀 하고 있을게요.”

은혜는 그 말만 남기고 원장실을 바삐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다정은 급하게 가방을 열었다. 핸드폰을 꺼내 태상에게 연락을 해보려는데 순간, 손가락이 빠르게 멈췄다.


“아…….”

지금쯤이면 태상이 탄 비행기가 벌써 이륙을 했을 시간이었다.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

차에서 내린 명옥은 보육원 전경을 빠르게 훑었다.

오는 길에 들은 설명에 의하면 이곳 부지에 들어간 돈이 웬만한 건물 한 채 값이라 했다.

대충 봐도 3, 4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시설인 것 같은데.

식비며, 공과금, 거기다 아이들 생활비. 명옥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는 짧은 사이에 이 시설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계산을 마쳤다.

결론은 아주 깔끔했다. 어마어마한 돈 낭비.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차태상, 걔는 참 할 일도 없어.”

가볍게 읊조린 혼잣말이건만 옆에 바싹 붙어선 최 실장이 눈치를 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시설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여기 원장이 쓰러졌을 때 병문안까지 왔다고 하더군요.”

“병문안?”

“네. 심장 쪽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 같습니다.”

“이런 거 짊어지고 있으면 나라도 심장마비 오겠네. 어휴.”

명옥은 팔짱을 척 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수행비서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중히 따라왔고, 최 실장은 바로 옆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확실한 거죠? 한다정 씨 여기 있는 거.”

“네. 확실합니다. 휴일이면 매번 출근 도장을 찍는다고…….”

순간, 거친 모래바람이 명옥의 발끝에서 훅 하고 일었다. 그녀는 빠르게 몸을 돌리며 최 실장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런 추측만으로 나를 지금 여기 데려왔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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