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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너는 왜 (48/89)


48. 너는 왜
2023.03.16.



 


“응. 내가 드라이브를 좀 좋아하거든.”

“아…… 그러시구나.”

독특함을 넘어 이상한 취미였다. 비싼 톨게이트 요금을 내면서 굳이 공항까지 오다니. 다정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마실래?”

수빈이 대뜸 물었다. 마치 사 주겠다는 듯한 말에 다정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러실 거 없어요. 게다가 일행분도 있으신 것 같은데…….”

“나 일행 없는데?”

“네? 그럼 저건…….”

다정이 빈자리 앞에 놓인 머그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킨 지 한참 지났는지 커피 위를 떠다니는 얼음이 손톱만큼 작았다.

다정은 의아한 시선을 다시 수빈에게 보냈다.


“아, 저건 혹시 몰라서 시킨 거.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게 마시고 싶을 수도 있잖아.”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마시다가요……?”

“이상한가?”

“네. 좀.”

이번만큼은 다정도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저 주문 좀 하고 올게요.”

어정쩡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수빈도 시킬 게 더 있다며 카운터로 향했다. 그는 큰 보폭으로 매장을 가로질러 먼저 주문을 넣었다.

차례가 된 다정은 지갑을 꺼내며 직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쾌활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키는 김에 네 것도 같이 시켰어.”

“제 거요?”

“아이스 바닐라 라테, 맞지?”

“…….”

지난번에 시켰던 커피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도 몰랐다. 다정은 지갑을 든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수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왜? 뭐 다른 거 더 시켜줄까?”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번엔 제가 사야 되는 건데 왜 또 내셨어요. 죄송하게.”

“음…….”

가까이 내려온 얼굴 때문에 그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였다. 투명하게 비춰 보이는 다갈색 동공은 마치 물감이라도 풀어 놓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어쩜 저렇게 예쁠까. 순간,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 주고 싶으니까.”

“…….”

꽤 제멋대로인 것 같다는 첫인상은 아주 정확했던 것인지.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픽업 데스크로 향했다.

그는 커피가 나오자마자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나무 쟁반 위에는 생수 한 병과 라테, 그리고 에스프레소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다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테가 매장용 머그잔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마시려고 한 건데.

다정은 멍하니 음료를 바라보다 지갑을 도로 넣었다. 어차피 한가한 오후이니 그와 잠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온 수빈은 얼음이 다 녹은 음료를 치우고 새 커피를 놓아 주었다.


“그런데 여긴 진짜 어쩐 일이세요?”

다정이 테이블 옆에 트롤리를 세우며 물었다.


“안 믿겨? 드라이브 왔다는 거?”

“네. 아무도 안 믿죠.”

“공항으로 드라이브 오는 거 나쁘지 않은데? 뭐, 그래도 안 믿긴다면…… 다른 이유 알려줄까?”

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보러.”

“……네?”

“너 보러 그냥 한번 와 봤는데 네가 진짜 나타났어.”

“……차라리 드라이브가 더 현실성 있겠어요.”

다정이 다소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도 조금 성의가 있어야지 이건 믿기지도 않고 재미도 없었다.


“정말 안 믿겨?”

“안 믿기죠.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이 넓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말이 돼요?”

“맞아…… 말이 참 안 돼.”

수빈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지고 싶었던 게 별로 없는 수빈이었다. 원하는 건 언제나 쉽게 가질 수 있었고, 가지지 못하는 건 애초에 원하지 않았던 척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다정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욕심 같은 게 생겼다. 자꾸만 마주치고 싶었고, 시간을 빼앗고 싶었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은 마치 안 맞는 옷처럼 불편했다.

수빈은 매끈한 미소로 속마음을 감췄다.


“실은 시장조사 나온 거야. 나도 항공업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어, 정말요? 무슨 일 하시는데요?”

“그건…….”

수빈이 말을 잇다가 말고 미간을 바싹 좁혔다. 그는 명치 언저리를 손으로 꾹 한번 누르더니 빠르게 생수 병을 땄다.


“왜 그러세요?”

“속이 쓰려서.”

짧게 말한 수빈이 물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신물이 올라오는지 그는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계속 누르고 있었다.


“커피…… 몇 잔이나 드신 거예요?”

“네 잔.”

그가 물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말했다.


“에스프레소를 연달아 네 잔이나요? 식사는 하고 드신 거 맞죠?”

다정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의아함, 그리고 약간의 책망이 드러나는 얼굴. 수빈은 걱정 어린 그 얼굴이 좋았다.

이 얼굴을 더 보려면 더 걱정을 끼치면 되는 걸까.

수빈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먹었어.”

“그러니까 당연히 속이 쓰리죠.”

“응, 응.”

“저도 커피 좋아해서 이해는 하는데요, 그래도 아플 정도로 드시진 마세요.”

“응. 그럴게.”

“그리고…….”

다정이 말을 멈추며 트롤리 앞 포켓을 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주머니 안을 헤매기를 잠시, 작은 카드 지갑 하나가 손끝에 딸려 나왔다. 다정은 그 안에서 분홍색 종이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등학교 명찰 크기의 종이에는 ‘인천공항 푸드코트 식권’이라고 적혀 있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세요.”

다정이 식권 몇 장을 그에게 밀며 말했다.


“식……권?”

“네. 공항 푸드 코드에서 쓸 수 있는 식권이에요. 저희 회사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팔거든요.”

“…….”

수빈은 느릿한 손길로 식권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훑어보니 한쪽 끝에 ‘오천 원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거 두 개 합쳐서 내면 만 원짜리도 먹을 수 있어요.”

수빈의 시선이 금액란에 너무 오래 머물자 다정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똑 부러지는 말투가 마치 대단한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했다.

수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꽉 참아냈다.


“나, 밥 사주는 거야?”

“그런 셈이죠.”

“왜?”

수빈이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짓궂게 물었다.


“저 두 번이나 커피 사 주셨잖아요.”

“그럴 거면 그냥 같이 가서 사주지, 왜 식권이야?”

“아, 그건…….”

다정이 별안간 얼굴을 붉혔다. 수빈은 눈가를 작게 움찔하며 그 모습을 들여다봤다. 심장이 확 조여드는 느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발그레한 뺨을 물고 늘어지듯 바라봤다.


“그러면…… 남자친구가 싫어할 것 같아서요.”

“…….”

“전에 식당에서 아는 선배랑 인사를 나눈 적이 있거든요? 근데 남자친구가 그것도 되게 싫어하더라고요. 진짜 그냥 인사만 했는데.”

다정이 억울한 기색을 잔뜩 담아 말했다. 마치 동조라도 해달라는 듯한 말투에 수빈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남자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아?”

“네.”

“왜?”

“왜긴요. 좋아하니까죠.”

확신에 찬 대답이 지체 없이 돌아왔다. 진심이 묻어나는 말투에 수빈의 낯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용당하는 거라는 걸 잘 알면서 왜. 어째서 그런 인간을.

다정을 향한 걱정에 가슴 깊은 곳이 술렁였다.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박탈감이 밀려와 속이 그 어느 때보다 쓰렸다.


“다정이는…….”

시선을 허무하게 떨군 수빈이 느릿하게 턱을 움직였다.


“다정이는 그 남자한테 너무 아까운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별안간 낮아진 음성이며, 미소가 싹 가신 얼굴이 꽤 낯설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빈이 다시 해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선배랑 인사 좀 한 거 가지고 쪼잔하게 굴었다며. 그럼 안 봐도 뻔하지.”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그냥 조금 과장해서 말한 거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그의 목소리에 다정이 안도하며 말했다.


“다음에 다시 보면 네 얘기 해줘. 남자친구 얘기 말고.”

“다음……이요?”

“만약에. 만약에 또 이렇게 우연히 만나면.”

그때, 우리의 다음에 차태상은 없기를.

꽉 깨문 잇새로 흘러나오지 못한 말이 뭉개졌다.

***



“차수빈, 너! 너 지금 어디야!”

날카로운 명옥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명옥은 최 실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파일은 다 지웠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이야기를 거꾸로 되돌리기를 한참, 이윽고 밝혀진 수빈의 행각에 그녀는 격노했다.


「드라이브 나왔어. 왜?」

“뭐, 왜? 기가 막혀서 정말. 너 그 파일 어쨌어? 아니, 애초에 그건 왜 가지고 나간 건데?”

「그냥…… 엄마가 또 무슨 일을 벌이나 궁금해서.」

“궁금은 무슨! 너 바른대로 말해. 그거로 뭘 어쩌려고 그래?”

「아무것도 안 해.」

“…….”

핸드폰을 움켜쥔 명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건 수빈을 키운 제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 수빈아,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어디야? 엄마가 갈게.”

명옥이 치미는 화를 꾹 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인천공항.」

“공항? 공항엔 왜?”

「누구 좀 만나려고. 그런데 엄마.」

“응.”

「나긋나긋한 말투 써도 소용없어. 어차피 USB 버렸으니까. 끊을게.」

“수빈아, 차수빈!”

애타게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매정한 통화 종료음뿐이었다.

쾅!

반짝이는 신형 핸드폰이 책상 위에 내리꽂혔다.


“아악, 정말!”

명옥은 거칠게 짜증을 토해내며 창가로 쿵쿵 걸음을 옮겼다.

최 실장은 녹음 내용에 특별한 점이 없다고 했다. 선물을 주고며 여자의 반응을 살피는, 그런 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면 수빈이 이렇게 감출 이유가 없다. 분명 무언가가 더 있는 거다.

명옥은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래.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더는 내몰릴 데도 없는 신세였다. 이대로 태상이 경영권을 승계 받는다면 저나, 수빈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게 뻔했다.

명옥은 책상 앞으로 바삐 걸음했다. 거칠게 움켜쥔 핸드폰에서 그녀가 찾는 이름은 이번에도 최 실장이었다.

다른 대안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뒷말이 나올 만한 일을 시킬 사람은 역시 그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그녀의 미간이 바싹 좁혀졌다.


“어, 난데. 그 여자 좀 직접 만나봐야겠어. 적당한 구실 좀 찾아봐요.”

「그 여자라니…… 누구 말씀이십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토해내듯 내지르는 소리가 답답한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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