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내가 너를 지키는 법
(47/89)
47. 내가 너를 지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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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내가 너를 지키는 법
2023.03.12.
“수빈아, 엄마 나가봐야겠다.”
“뭐? 갑자기?”
비서에게 확인했을 때 분명 별다른 오후 스케줄은 없다고 했다. 수빈의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갑자기가 아니라…… 오늘 이사회 사람들이랑 점심 모임이 있거든. 사무실은 옷 좀 편한 거로 갈아입으려고 잠깐 들른 거야.”
“……지금까지 내 얘긴 뭐로 들었어?”
“미안, 미안. 깜빡했네. 식사는 다음에 하자. 어, 그래. 넌 이대로 할아버지께 가면 되겠다. 원래 점심 좀 늦게 드시니까 지금 출발해도 안 늦을 거야.”
“…….”
명옥은 다시 나갈 채비에 바빴다.
조금 밝은 색감의 재킷으로 겉옷을 갈아입고, 크기가 작은 핸드백을 팔목에 걸치고. 거울에 제 모습을 한번 비춰본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얘, 어서 가봐. 차에 옷 있으면 좀 단정한 거로 갈아입고.”
“…….”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웃고 있는 동안은 모든 게 다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쾅,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지.”
그럭저럭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꼬리는 담담했다. 수빈은 넓은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한동안 굳은 듯 앉아 있었다.
“……한국에.”
수빈은 어리석었던 결정을 자조적으로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여는데 복도 끝을 서성이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빈의 눈동자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누구더라……?’
회사를 떠나 있던 시간이 길어 사람들 알아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수빈이었다.
딱, 딱 소리와 함께 남자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수빈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최 실장님.”
그는 명옥의 비서, 아니 하수인인 최 실장이었다.
“아, 수빈 도련님 아니십니까?”
최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못 본 새 살이 꽤 빠졌는지 양 볼이 핼쑥하게 들어가 있었다.
“엄마 때문에 고생이 많은가 봐요.”
“아, 아뇨. 무슨 그런 말씀을. 회사 다시 복귀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수빈의 눈동자가 스르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시선이 머문 곳은 최 실장의 오른손이었다. 그는 작은 USB 하나를 단출하게 들고 있었다.
도청.
순간, 어제 들었던 묵직한 한 마디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차태상을 도청했다는 걸 텐데. 그렇다면 그냥 놓칠 수는 없는데.
재미있는 먹잇감 앞에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수빈은 태연한 표정을 얼굴에 덧씌운 채 천천히 눈동자를 밀어 올렸다.
“엄마 만나러 오신 거죠?”
“네. 보고 드릴 사안이 좀 있어서.”
“잠깐 자리 비우셨어요. 금방 오실 건데 그건 저 주고 가세요.”
“……이걸요?”
최 실장이 불안한 듯 USB를 등 뒤로 숨겼다.
“네. 실장님 곧 오실 거라고, 저한테 받아 놓으라고 했어요.”
수빈이 사탕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제가 직접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
조금 더 미끼를 던져야 하나. 수빈의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거 말레이시아에서 온 파일이죠?”
“수, 수빈 도련님이 그걸 어떻게…….”
“당연히 알죠. 무슨 일인지 얘기 다 들었는데.”
“아…….”
“설마,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아뇨, 그럴 리가요.”
최 실장이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유능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비서다웠다.
“그나저나 최 실장님은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음성 파일이니까 그냥 메일로 보내셔도 되는 데 직접 여기까지 다 오시고.”
“네, 뭐, 그래도 되긴 하는데…… 이럴 때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거죠.”
최 실장이 멋쩍은 듯 웃으며 시선을 떨궜다.
사실, 그는 에어 코리아에서 불명예로 퇴사한 비서실 전 직원이었다.
이제는 실장도 뭣도 아닌 그저 외부인. 하지만 명옥은 그를 제 개인 비서처럼 부리며 은밀한 고용을 이어왔다.
수빈은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은 미소였다.
“이 파일은 어차피 제 손에 들어올 거였으니까 그냥 저한테 주고 가시면 됩니다. 왔다가 가셨다고 말씀 전해드릴게요.”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USB를 수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수빈은 작은 기계를 만족스럽게 움켜쥐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뚜벅뚜벅,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수빈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뭐가 들었으려나…….”
그는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집무실 안을 가로질렀다. 컴퓨터에 USB를 꽂자 ‘01’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음성 파일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다.
마우스를 조작하는 그의 눈동자가 무미건조했다.
손끝이 몇 번 움직이자 음성 파일이 열렸다. 한동안 잡음만 계속되더니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흘러나왔다.
봉투? 아니면, 종이? 미간을 접으며 볼륨을 줄이려는데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너, 너무 예뻐요.’
“…….”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째서, 어째서 네 목소리가 여기서 들리는 건지.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네가 왜.
수빈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아직 꺼내 보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알아요. 예뻐요.’
수빈은 볼륨 조절 버튼을 거칠게 비틀었다. 커질 대로 커진 음량이 스피커를 두드리듯 흘러나왔다.
“…….”
선물을 꺼내 보는 들뜬 표정, 수줍게 옷을 입고 나오는 광경. 사이좋은 연인의 모습이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졌다.
수빈은 불현듯 치미는 불쾌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다는 수치심, 태상의 목소리가 주는 본능적 불편함.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라 점점 수빈을 불편하게 했다.
더는 못 듣겠네.
이런 것도 약점이라고 굳이 도청까지 한 명옥이 우스웠다. 수빈은 싸늘한 표정으로 USB를 향해 손을 뻗쳤다.
그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상 씨는 필요에 의해서 저를 택한 거잖아요.’
“필……요?”
순간,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필요에 의해서라니. 태상이 다정을 이용이라도 한다는 건가. 흘려들을 수 없는 한 마디에 눈매가 사나워졌다.
수빈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화에 집중했다. 잠시 후, 애처로운 다정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 나왔다.
‘진짜로 하는 결혼도 아닌데…… 우습죠?’
“…….”
진짜가 아니다.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한 마디였다.
설마, 설마 했는데.
명옥이 태상의 결혼은 그저 쇼라고 했을 때, 한가롭게 고개를 젓던 수빈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아닐 거라고. 하지만 여실히 드러난 진실 앞에 수빈은 격한 분노를 느꼈다.
“차태상…… 네가 어떻게…….”
냉정하다 못해 냉혈한 인간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다정에게만큼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불길 속에 두고 나온 다정에게만큼은.
하지만 녹음 속 대화가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태상은 다정을 가짜 신부로 내세워 제 입지를 견고히 하려는 것이다.
수빈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연한 살을 아프게 파고드는데 문득, 저를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다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그 미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그는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USB를 뽑았다.
이 파일이 명옥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명옥이라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다정을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다. 그 아이의 삶이 망가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두 사람의 관계를 세상에 떠벌릴 것이다.
수빈은 빠른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 목록을 한참 뒤지자 다행히 ‘최 비서님’으로 저장된 번호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아주 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최 실장이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네. 수빈 도련님」
“실장님, 혹시 이 파일 내용 들으셨습니까?”
「네? 네. 녹음이 제대로 됐나 확인해 보면서요. 앞부분만 조금 듣다가 껐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가 들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뇨. 잘하셨습니다. 그보다 이 파일, 복사본 가지고 계시죠?”
「네. 있습니다.」
“그거 지금 당장 지워 주셔야겠습니다. 말레이시아에 보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까지 전부 다.”
위압감 있는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꽉 채웠다.
***
바쁘게 움직이던 다정의 발끝이 에스컬레이터 앞에 멈췄다.
그냥 가긴 좀 아쉬운데.
위로 올라가면 맛있는 바닐라 라테를 마실 수 있었고, 그대로 나가면 집으로 가는 공항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매번 하는 이 싸움의 승률은 50퍼센트. 오늘도 아쉽게 패배한 다정은 깡총 뛰는 듯한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발판이 스르르 움직이며 계단이 위로 올라갔다.
바쁘게 구르는 트롤리 바퀴, 카운터를 찾는 설레는 얼굴들. 눈앞의 풍경이 점점 바뀌는데 다정의 마음은 아직도 호텔 스위트룸이었다.
‘다, 다녀오세요.’
‘그런 말은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왜요?’
‘내가 다시 왔을 때 너는 여기 없을 거잖아.’
‘한국에 오면 있잖아요…….’
‘금방 갈게.’
또각또각, 걸음을 옮기는 내내 태상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행복에도 여진이라는 게 있는 걸까. 다정은 잔잔히 밀려오는 떨림을 느끼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커피숍 앞이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자 고소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진짜 왔네.”
나직한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홀린 듯 고개를 돌리자 문 옆자리에 앉은 수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빈 오빠?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으려던 다정의 입술이 서서히 멈췄다.
그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는 2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앞자리가 텅 비어 있었지만 음료는 한 잔이 놓여 있는 상태. 일행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비행 갔다 와?”
다정은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네. 오빠는요? 출국하세요?”
“출국? 아니.”
수빈이 손에 들고 있던 에스프레소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걸음을 옮길수록 다정의 고개가 서서히 위로 꺾였다.
“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인천공항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