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연습의 결과
(4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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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연습의 결과
2023.03.09.
***
무채색 가구만 가득한 공간 속, 유일하게 색을 빛내는 건 묵직한 향을 내뿜는 위스키뿐이었다.
본가에 다녀온 날이면 수빈은 어김없이 술을 찾았다.
태상과의 비교, 명옥의 닦달. 어느 것 하나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없었다.
위스키를 벌써 몇 잔이나 들이켠 수빈은 소파에 기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선택한 주종은 독주였지만 애초에 그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아, 안 돼…….”
고른 숨을 내쉬며 자던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게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 같았다.
“거기로 가면…… 아, 안 돼.”
손을 올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그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수빈이 꾸는 꿈은 언제나 같았다.
예쁘게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자 아이가 걸어간다. 기억 속에 너무 선명한 그 아이는 사방이 캄캄한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수빈은 그 아이를 말려야 한다는 걸 안다.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하지만 목소리는 꽉 막혀 나오지 않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이리, 이리 와…….”
이미 꿈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수빈은 손끝을 겨우 들며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이제 곧 꿈이 끝난다.
수빈은 그렇게 되기 전에 사력을 다해 뛰었다. 오늘도 같은 결말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시뻘건 불꽃이 치솟아 아이를 집어 삼키는 그 결말을.
“안 돼!”
수빈이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을 뱉어낼 때마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고 눈동자 역시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역시 오늘도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수빈은 테이블 위의 위스키 잔을 거칠게 낚아챘다. 반쯤 남은 액체를 탁 털어 넣자 목에 타들어 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싸한 고통이 이곳이 현실이라고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다, 이내 머리칼을 꽉 움켜쥐었다.
“다, 다 차태상 때문이야.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억눌렸던 한 마디가 술기운과 함께 튀어 나왔다. 수빈은 눈을 꽉 감고 남아 있는 붉은 잔상을 지워냈다.
그러자 말간 웃음을 머금은 여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괜찮아요.’
‘오빠, 구해줘서 고마워요.’
순간, 어둡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다. 수빈은 아프도록 감고 있던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
“……괜찮다고 했어, 고맙다고 했어. 분명 그랬어.”
고통에 찬 목소리가 오래도록 거실을 맴돌았다.
***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끝없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출렁출렁, 물결 속을 헤치는 동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서서히 지워졌다.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데. 아쉽게도 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다정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스름한 햇볕이 눈동자 위로 와 닿았다.
태상은 아직 자고 있을 테니까 움직이면 안 되겠지.
“……?”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확인하는데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한참 전에 일어났는지, 손바닥 아래 와 닿는 시트가 차가웠다.
다정은 먼저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그가 일정을 시작하기엔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어디 갔지……?’
의아한 얼굴로 일어나 앉는데 침실 손잡이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소리도 없이 열린 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건 바지만 입고 있는 태상이었다. 그는 은은한 거실 조명을 후광처럼 등진 채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어났네.”
다정은 벙찐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한 팔로는 도저히 감쌀 수 없을 정도로 두툼한 흉통. 물에 살짝 젖어 번들거리는 구릿빛 피부. 관능적인 색과 질감이 두 눈에 아찔하게 새겨졌다.
빨리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건 잘 아는데 조각처럼 아름다운 육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잤어?”
그가 침실을 가로지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네, 네…… 잘 잤어요.”
“자, 마셔.”
태상이 뚜껑을 딴 생수 한 병을 건네며 말했다. 다정은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다 말고 물병을 받아 들었다. 가볍게 들이켜자 미지근한 물이 건조한 목을 부드럽게 적셨다.
태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검사라도 하는 듯한 시선에 다정은 팔목을 조금 더 높게 들었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얼굴이며 정돈되지 않은 머리가 신경 쓰이는데.
따가운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정은 크게 한 모금 물을 마시고 사이드 테이블에 병을 내려놓았다.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다정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재빠르게 빗어 넘기며 말했다.
“자는데 더워서.”
“아, 더우면 에어컨 온도를 좀 낮추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네가 깰 거라.”
태상은 사이드 패널에 있는 버튼을 조작해 침실 조명을 켰다. 조도를 낮게 설정했는지 딱 눈이 아프지 않을 만큼만 방이 밝아졌다.
그는 베개 옆에 놓인 셔츠를 집어 들었다. 아무렇게나 뭉쳐 있는 게 자다 말고 더워서 옷을 벗어 던진 것 같았다.
그렇게 될 때까지 참을 건 또 뭔지. 미안함과 답답함이 동시에 올라왔다.
“깨도 괜찮은데……. 다음부터 온도 꼭 낮추고 자요.”
“…….”
그가 셔츠를 팔에 끼워 넣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가는 게 꽤 재미있는 걸 발견이라도 한 것 같았다.
“연습하길 잘했네.”
“네? 연습이라니…….”
‘우린 어차피 같은 침대를 쓰게 될 텐데. 연습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다정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아…… 그러네요.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
태상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딱히 연습이라는 게 필요할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한 침대를 쓰고 나니 그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다.
옆으로 누워서 자는 걸 좋아한다는 것, 한 손은 베개 위에 올려 두는 습관이 있다는 것. 또 잘 때 더운 걸 못 견뎌 한다는 점까지.
소소한 발견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는데 문득,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의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는?”
태상이 팔에 반쯤 걸려 있던 옷을 마저 꿰어 넣으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딱 한 번 꼬르륵 소리가 난 것뿐인데 그는 어제부터 과도하게 제 식사를 챙겼다. 다정은 정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나중에 시키지.”
태상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가슴께에 말려 있던 옷을 아래로 쭉 내렸다. 허리 근육이 짧게 움직였다. 그러자 그 위에 나 있는 기다란 선 하나가 함께 요동쳤다.
‘…….’
반 뼘 정도 될까. 배꼽 근처에 대각선으로 난 갈색 선은 아름다운 육체에 한 점 흠이라면 흠이었다.
어제 풀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아주 오래된 상흔 같았다.
혹시 마음의 상처를 건드릴까, 다정은 얼른 시선을 얼굴로 끌어올렸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자다 말고 더워서 깼잖아요.”
“평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푹 잤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명료했다.
“다행이다…….”
피곤해 보였던 어제 태상의 얼굴이 떠올라 다정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하루지만 그가 불면의 고통에서 벗어난 게 기뻤다.
조용히 미소를 짓는데 태상이 침대 위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나는 오전에 회의가 있어서 나가 봐야 해.”
“네…… 알아요.”
중요한 회의니까 일찍부터 준비를 해야겠지.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새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정은 눈매를 아래로 축 늘인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얼른…….”
“얼른 뭘 할지 생각해 봐.”
“……네?”
“나가기 전까지 뭘 할지.”
치미는 듯한 눈동자가 집요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그때까지 내 시간은 다 네 거니까.”
***
명옥은 수빈의 다갈색 머리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의 연갈색 머리카락은 햇볕을 받을 때면 더욱 부드러운 색을 띠곤 했다.
검은 야생마처럼 윤기가 흐르는 태상의 머리, 아직도 눈앞에 선한 차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이 집 피가 아니라는 걸 큰소리로 증명이라도 하듯, 수빈의 머리칼은 저 혼자 고집스러운 갈색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왔어?”
그녀가 집무실 문을 가볍게 닫으며 말했다.
주인도 없는 곳에 멋대로 드나드는 건 아들의 천성이자 습관이었다. 기다란 다리를 교차하고 앉은 수빈은 한가로운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점심? 어제 밥 같이 먹은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그게 어디 제대로 먹은 건가? 본가에서 먹는 건 체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수빈이 가느다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엄마랑 같이 밥 먹으면 체한대. 먹는 내내 일 얘기만 해서. 그래서 내가 왔지. 직원 복지 실현 좀 하려고.”
“참 나, 체하면 약 먹어가면서 들으면 되지.”
명옥이 커다란 핸드백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책임감의 크기만큼 무거운 가죽 가방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유리 위에 안착했다.
“와…… 악독하다.”
“악독은 무슨. 다들 약해 빠진 거야.”
“약해 빠진 거로 치면 내가 제일인데?”
수빈의 기다란 눈꼬리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그저 함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라는, 숨겨진 본심이 곱게 접힌 눈매 사이로 쏙 들어갔다.
명옥은 가볍게 팔짱을 끼며 답답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직원들 생각하는 것도 좋고, 엄마 챙기는 것도 좋은데.”
“그런데?”
“다음부턴 여기 말고 본사로 가.”
“……할아버지?”
무슨 얘기인지 뻔히 알겠다는 듯, 수빈이 담담히 시선을 떨궜다.
꾸준하다고 해야 할까, 지긋지긋하다고 해야 할까.
명옥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매사 앞만 보고 돌진했고, 주변을 둘러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 인물로 평생을 살아온 수빈은 쓴 기운을 애써 삼켰다. 어느새 습관처럼 짓는 예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알아. 안 그래도 내일은 할아버지한테도 가 볼 거야.”
“잘 생각했어. 일 얘기 적극적으로 꺼내고, 기회 있으면 상무 자리 얘기도 다시 해보고.”
그제야 제 존재에 구미가 당겼는지 명옥이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보냈다.
“알았어. 그럴게. 그런데 오늘은…….”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명옥이 손목을 한번 꺾어 들여다보고는 놀란 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