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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자자 (45/89)


45. 자자
2023.03.05.



“너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 줄 알아? 실수하면 너도 같이 죽는 거야.”

“지금 내가 위험한 거 가릴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안 돼. 그건 터뜨려도 엄마가 터뜨려. 게다가 지금은 따로 손 써둔 게 있으니까 일단 기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데 명옥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 위로 떠오른 발신인은 수빈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최 실장’이라는 세 글자를 확인한 명옥은 빠르게 수빈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너는 회사 생활이나 열심히 해. 할아버지 자주자주 찾아뵙고.”

“…….”

명옥의 태도는 어딘지 다급해 보였다.

그녀는 어서 가보라는 듯 손짓을 하더니 바삐 몸을 돌렸다. 명옥이 향하는 곳은 본채 건물 뒤쪽이었다.

자신이 들으면 안 되는 전화인 걸까. 순간, 수빈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는 돌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일부러 대문을 크게 한번 열었다가 닫았다. 그러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히 명옥의 뒤를 밟았다.

모퉁이에 숨어 귀를 기울이는데 한껏 낮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건진 게 없다니.”

최 실장은 명옥의 측근 중에도 최측근이었다. 유능함으로 치자면 B+ 정도일까. 하지만 그는 뒤가 구린 일을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건진 게 없다니. 수빈의 얼굴에 흥미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얼빠진 인간을 보냈길래 이렇게 간단한 것 하나 처리를 못 해? 방에서 안 나오면, 도청이든 뭐든 하면 될 거 아니야!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해?”

“…….”

도청.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수빈은 그저 눈썹 끝을 뾰족하게 한번 올릴 뿐이었다.

명옥이라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하고 남을 거라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확실한 증거 잡을 때까지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

전화를 곧 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수빈은 긴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커다란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명옥이 씩씩거리며 건물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즈음, 수빈이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는 서늘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출장지까지 사람을 붙이다니…… 차태상도 피곤하겠네.”

 

 

***

하늘이 완전히 어둑해진 시간. 다정은 소파 위에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었다.

방 안에만 갇혀 있게 해서 미안했던 건지, 태상은 호텔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선사했다.

옥상에 위치한 프라이빗 풀에서 즐기는 수영, 전담 바텐더가 만들어 주는 칵테일. 거기다 스파샵에서 제공하는 아로마 마사지까지.

몇 시간에 걸친 호텔 투어를 마친 다정은 노곤한 기분에 한껏 젖어 있었다.


“피곤해?”

정신이 조금 멍해진 탓에 다정은 그가 다가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네? 아, 네. 조금요.”

“아직도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뇨! 아뇨, 없어요.”

다정이 손사레를 치며 쏜살같이 답했다. 여기서 뭐 하나라도 더 했다간 정말 그대로 쓰러져 버릴 지도 몰랐다.

태상은 눈으로만 살짝 웃으며 곁에 앉았다.


“피곤하면 얼른 자.”

“네…….”

다정은 침실 쪽을 힐끔거리며 태상의 표정을 살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 소파에서 잘 수는 없는데. 게다가 지금은 아까처럼 쪽잠만 자고 버텨낼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같이 자자고 먼저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또 그가 먼저 말을 꺼내려나.

고민에 찬 눈동자가 도르륵 구르는데 태상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자.”

“……네?”

예상 밖의 말에 의아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왜요? 안 졸리세요?”

“졸려. 그래도 난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아…….”

다정은 그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태상은 제가 잠이 들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방에 들어오려는 거였다. 부담스럽지 않게, 또 긴장하지 않게. 무뚝뚝한 한 마디에서 작은 배려가 느껴졌다.


“그럼 그렇게…….”

그게 낫겠다 싶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순간, 그의 제안이 다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미 소파에서 같이 잔 적이 두 번이나 있는데. 그런데도 침대만 꺼린다는 건, 그 공간을 특별한 장소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진짜 연인이라면 모를까. 우리에게 침대는 특별한 공간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자 남아 있던 긴장이 가볍게 날아갔다. 다정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같이…… 들어가요.”

태상이 빠르게 시선을 얽었다. 탐색하는 눈빛이 눈동자 너머의 진심을 읽어내려 하는 것 같았다.


“이젠 익숙해요. 별로 긴장되지도 않고.”

“…….”

“정말이에요. 피곤해 죽겠는데 얼른 들어가요.”

근육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다정은 피곤하다는 말에 진심을 잔뜩 실어 말했다.


“뭐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변한 건 아니고…… 그냥 진짜 피곤해서 그래요. 부사장님도 그럴 것 같고.”

태상은 다정의 변화가 좋으면서도 의아했다.

말끝을 흐리는 게 아무래도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속내를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었다.

태상은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손잡이를 돌리자 여럿이 함께 눕고도 남을 만큼 널찍한 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다정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조심히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쭉 뻗자 시원하면서 부드러운 질감이 온몸을 감쌌다.

태상은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무드 등을 켜고 커튼을 꼼꼼하게 쳤다. 어두워진 방 안에서 커다란 그의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였다.

푸욱, 침대가 꺼지는 느낌이 들더니 옆자리에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 너무 춥진 않아?”

헤드 레스트에 기대앉은 태상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빛이 높은 이마와 콧대에 흐르듯 맺혔다.


“아뇨, 괜찮아요. 부사장님은요?”

“…….”

누운 채로 시선만 올리는데 태상이 깊숙이 눈을 맞춰왔다. 다정은 무거운 눈빛의 이유를 알 수 없어 긴장했다. 괜히 이불 끝만 만지작거리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뭘……요?”

“다시 이름으로 부르는 거.”

“아…….”

다정은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는 사실도, 말로 하지 않고 굳이 기다렸다는 사실도. 모두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깐 이름으로 불렀잖아.”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과감한 시도를 한번 했다가 이미 실패를 맛본 후였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이름으로 불렀을 때 부사장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낯설어서 그랬어.”

“…….”

“그러니까 다시 불러 봐.”

숨을 잔뜩 머금은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다정은 고막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감당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상 씨.”

“한 번만 더 해 봐.”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고개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강렬한 시선이 조그마한 입술 위로 향했다.

잔뜩 집중을 하고 있는지 검은 눈동자가 미동도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다정은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이름으로 불리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 걸까.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의 거리가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태상 씨.”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너무 듣기 좋아.”

부탁인지 허락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느슨하게 흘러들었다.

어딘지 나른하게 늘어진 어깨며 잔뜩 풀어진 눈매. 태상은 마치 배불리 식사를 마친 수사자 같았다.

신사의 말을 하는 짐승이 아닐까. 날것처럼 반지르르한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그럴게요.”

수줍게 답하자 그의 붉은 입술이 어둠 속에서 호선을 그렸다.

태상은 기다란 다리를 이불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넓은 침대가 순식간에 그의 체온으로 꽉 차는 게 느껴졌다.

숨결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두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안녕히…….”

잘 자라는 인사를 하려는데 침대가 조용히 출렁였다. 움직임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고 누운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머리칼이 쏟아지듯 이마를 가리고 있었고, 우람한 어깨는 천장을 향해 비죽이 솟아 있었다.


 


“옆으로 자는 게 습관이라.”

“꼬, 꼭 이쪽을 봐야 해요? 반대로 돌아누워 주시면…….”

“이쪽이 내 취향이야.”

“…….”

다정은 억울한 듯 눈썹을 한번 찡그렸다. 사실, 옆으로 자는 걸 좋아하는 거로 치자면 저도 뒤지지 않았다.

쿠션을 끌어안고 옆으로 눕는 게 얼마나 편한데. 꾹 참고 있는 걸 몰라주는 태상이 조금 얄미웠다.


“옆으로 눕고 싶으면 그래도 돼.”

“저는 똑바로 누워서 자는 게 취향이라서요.”

“그거 참…… 올바르지 못한 취향이네.”

태상이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하는 건 물론이고 마음속까지 훤히 다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정은 재빨리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새, 생각해보니까 저도 옆으로 자는 게 취향이네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갑자기 등을 바라보게 된 태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누군가의 등을 보는 게 이렇게 답답한 기분이 드는 일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쪽 보고 자.”

“벽 보고 자는 게 습관이라서요.”

“…….”

조그마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기를 잠시, 태상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귀여운 싸움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베개를 끌고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다정의 고개가 살짝 움찔했다. 작은 뒤통수에서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바스락, 시트 소리와 함께 태상이 또 조금 거리를 좁혔다.


“바, 반씩 나눠 쓰는 거예요.”

이번에는 참지 못하겠는지 다정이 작게 항의의 뜻을 내비쳤다.

수줍은 목소리가 베어 물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태상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미안. 내가 욕심이 좀 많았지.”

“네. 조금.”

볼멘소리가 허공에 툭 던져졌다. 태상은 숨까지 참아가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 혹은 사랑스럽다. 실수로라도 입에 올릴 일이 없는 단어였는데. 다정을 보고 있으면 내내 생각나는 게 그런 단어밖에 없었다.

어쩐지 점점 머리가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잘 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가슴께에서 머물던 이불이 한 번에 쭉 올라와 다정의 어깨를 감쌌다. 혹시 틈이 생길까 목둘레를 누르는 손길에 자상함이 잔뜩 묻어났다.

가까이 다가온 것에 사심이 없었음이 자연스럽게 증명되었다.

다정은 쭈뼛거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두 뺨이 은은한 조명 아래 사랑스럽게 드러났다.


“……태상 씨도요. 잘 자요.”

태상은 아찔한 풍경을 눈에 선명하게 담았다.

목 언저리에 흘러내린 폭포수 같은 머리칼, 수줍은 듯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 노란빛을 머금은 눈동자도 예뻤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흐트러진 다정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눈가를 찌르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뒤로 넘어갔다.


“그래. 우리 얼른 자자.”

포근한 말과 함께 태상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달게 잘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확신이 가슴에 꽉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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