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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녹아내리는 마음 (44/89)


44. 녹아내리는 마음
2023.03.02.


다정은 길게 숨을 내쉬고 옷을 눈앞에 펼쳐 보았다.

길이는 무릎까지 닿을까. H라인의 진줏빛 윈피스는 치마 끝단과 소매에 브랜드 로고가 무늬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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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옷이었다.

다정은 한쪽 벽면에 위치한 커다란 화장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 위에 옷을 대고 모습을 비춰보는데 흰 피부와 크림색 원단이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빠른 손놀림으로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원피스에 다리를 끼워 넣고 위로 끌어 올리자 부드러운 안감이 허벅지 안쪽을 착 감쌌다.

사이즈도 몰랐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잘 맞는 걸 산 건지. 맞춘 듯 허리가 알맞게 조였고 어깨너비도 정확했다.

다정은 손을 뒤로 보내 지퍼를 올렸다. 힘겹게 위로 끌어 올리는데 마지막 반 뼘이 영 잘 올라가지 않았다.

양손을 다 써가며 낑낑거리는데 순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바쁘게 움직이던 두 손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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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생각보다…….”

예쁘장한 첫인상과 달리 원피스는 꽤 과감한 면이 있었다.

허리 봉제선이 잘록하게 잡혀 있어 상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고, 가슴 라인도 꽤 깊숙이 파여 있었다.

연회장이나 명품관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 단언컨대 살면서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치미는 어색함에 다정은 연신 치맛자락만 쓸어내렸다.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갈아입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나직한 노크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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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정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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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코트가 필요하다면 내가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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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에스코트라니…….”

수줍어 꼼짝도 못 하는 제 모습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말투였다. 다정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번 들여다보고 천천히 문가로 향했다.

느릿하게 문을 열자 그 앞에 우뚝 선 태상과 눈이 마주쳤다. 일순, 새까만 그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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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때요?”

긴장을 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거실에 조용히 울렸다.

태상은 남김없이 빨아들일 기세로 다정을 바라봤다. 짙고 묵직한 그의 시선이 흰 피부 곳곳에 도장을 찍었다.

한 줌도 안 되어 보이는 허리, 빛을 받아 반짝이는 동그란 어깨. 지독하게 아름다운 선들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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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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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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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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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입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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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은 정말 잘 입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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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태상이 다정의 등 뒤로 유려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깨 높이까지 손을 올린 그는 기다란 머리칼을 한쪽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훤히 드러난 등 위로 서늘한 공기가 쏟아졌다.

지이익.

그의 손길이 닿자 살짝 열려 있던 지퍼가 가뿐하게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조금 삐딱하게 벌어진 목둘레선이 예쁘게 정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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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 지퍼를 올려주는 태상. 가슴이 깊게 파여 있는 맨소매 크림색 원피스. 긴 머리는 한쪽 어깨로 몰아서 앞으로 내려온 상태. 어깨 끈 부분은 조금 두꺼운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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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정은 멋쩍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거울로 한참을 들여다본 저도 눈치 채지 못한 건데. 얼마나 빤히 바라봤는지 그는 지퍼가 끝까지 올라가지 않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설픈 실수에 다정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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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잘 입었네. ……예쁘다.”

나직한 음성이 등 뒤에서 은은하게 울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로 듣는 예쁘다, 소리는 어쩐지 가슴을 꽉 조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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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마워요.”

다정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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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수는 내 앞에서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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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해요……. 어디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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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는 해도 돼. 또 올려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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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부터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다정은 시선을 떨구며 괜히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출렁이는 검은 물결이 목 언저리를 폭포수처럼 가렸다.

태상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길게 늘어진 머리칼에 손등을 대고 어깨 뒤로 부드럽게 밀어 넘겼다.

애써 감춘 목덜미가 다시 훤히 드러났다. 보드라움과 가녀림의 결정체가 까만 눈동자 위에 긁듯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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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상은 다정에게서 손을 물리며 허공을 꽉 움켜쥐었다. 잡을 수 없는 게 허공뿐인 게 안타까웠다.

다정은 마치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같았다.

긴 세월 찾아 헤맨 끝에 결국 찾아냈다. 자꾸만 보고 싶어서 다가갔고. 이젠 곁에 꼭 묶어두고 싶어 결혼까지 하려는데 아직도 사라질까 불안하기만 했다.

내가 너를 다치게 한 걸 알아도, 내가 너를 그곳에 두고온 걸 알아도. 그래도 너는 내 곁에 남아 줄까.

불안한 마음이 흉폭하게 날뛰었다. 태상은 두 눈을 꽉 감았다 뜨며 감정을 죽였다.

어차피 결론은 같다. 훗날 다정이 저를 떠난다고 해도 지금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제 선택은 언제나 한다정이므로.

태상은 애잔한 눈빛으로 다정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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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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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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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아.”

불러도 불러도 모자랐다. 해소되지 못한 억눌린 욕망이 자꾸만 입을 타고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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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부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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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부르면 불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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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상 씨를 불안하게 만든다고요?”

순수한 눈동자가 놀란 듯 커다래졌다. 보석보다 빛나는 두 눈은 아무래도 제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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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곁에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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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언제나 불안한 건 저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태상의 눈동자가 왈칵 일그러졌다. 어떠한 형태로든 다정의 마음이 다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물어뜯을 것처럼 다정의 입술로 향했다. 어서 답하라는 의미를 읽은 다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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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 씨는 필요에 의해서 저를 택한 거잖아요.”

빠져들 듯 집중하는 그의 눈동자에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다정은 또렷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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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불안한 건 언제나 제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태상 씨는 언제고 훌쩍 떠날 사람이고 저는……그냥 남겨질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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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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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하는 결혼도 아닌데……우습죠?”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아프게 번졌다.

잠깐이라도 그의 곁에 머물면 이 갈증이 해소될 거라고 믿었다. 차태상이라는 남자를 향한 먹먹한 갈증이.

하지만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애정 어린 시선을 받을 때마다 그의 진심이 탐이 났다.

결혼 상대가 필요해서, 제가 손을 잡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서. 그런 필요와 이유 없이 그가 저를 봐 주기를 바랐다.

사실, 어떨 땐 진짜 그렇게 믿어 버리기도 했다.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달콤해서, 걱정 어린 한 마디가 너무 따뜻해서.

하지만 늘 그렇듯, 영화는 끝나고, 착각도 끝난다.

다정은 살며시 시선을 떨군 채 다가올 현실을 기다렸다. 아름답게 얼어있던 얼음판이 발밑에서 서서히 깨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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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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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꿈을 깨버린 그가 미워 약간의 반항심이 올라왔다. 다정은 고집스레 얼굴을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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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정.”

그가 조그마한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다시 속삭였다. 따스한 체온에 이끌려 고개를 들자 무너질 듯 위태로운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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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허락하는 한, 나는 언제고 네 옆에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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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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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결혼은…… 네가 끝낼 때 끝나. 그러니까 네가 혼자 남겨질 일은 절대 없어.”

순간, 다정의 심장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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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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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해. 그러니까 내 옆에서 끝을 바라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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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없다면, 이렇게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는 걸까. 가깝게 보이던 끝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작은 희망 하나가 마음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마지막이 멀어진다면, 계속 그렇게 멀어지다 보면 아예 영영 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작게 움튼 희망이 점점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다. 다정은 속마음을 꽁꽁 숨긴 채 조심히 그를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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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론 그러지 않을게요. 저…… 부사장님 옆에 있는 동안은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게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태상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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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을 씹는 것 같은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차 회장은 다과를 곁들인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물론, 연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태상과 수빈이었다.

왜 진작 태상이에게 회사 일을 배워두지 않은 거냐.

너도 태상이처럼 좀 진득할 수는 없겠냐.

태상이, 태상이.

체하기 직전까지 태상의 이름을 들은 수빈은 가까스로 웃는 낯을 유지했다. 끔찍했던 후식 시간이 끝나고, 명옥은 수빈을 배웅하겠다며 그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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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아, 차수빈!”

수빈은 명옥의 부름에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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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잠깐 멈춰 보라니까!”

명옥이 다급히 수빈을 돌려 세웠다.

한 줄기 남아 있던 미소까지 모두 마른 그의 얼굴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명옥은 익숙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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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내가 그동안 할아버지한테 잘하라고 한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가 태상이 위로 올라갈 방법은 저 늙은이한테 잘 보이는 것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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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태상, 차태상 노래만 부르는 걸 듣고도 그런 말이 나와? 내가 뭘 해도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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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니까. 차태상이라고 완벽해? 그 녀석도 언젠간 미끄러져. 그때 기회를 잡으려면 미리미리 잘해 놓아야 하는 거라고.”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명옥이었다. 말 좀 들으라는 듯, 수빈의 팔을 꽉 잡고 흔드는데 불긋불긋한 수빈의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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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이거…….”

커다랗게 붙은 밴드 위로 핏물이 다시 올라와 있었다.

지난번 컵에 벤 상처가 아직도 안 아물었을 리는 없는데. 순간, 명옥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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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주먹을 쥐고 있었어? 응? 정말 대단하다, 차수빈.”

명옥은 두 손으로 수빈의 손등을 조심히 감쌌다. 얼마나 심각한지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가 거칠게 손을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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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고. 차태상 병원 기록이나 넘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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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걸로 뭘 어쩌려고.”

예상하지 못한 말에 명옥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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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긴. 터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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