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녹아내리는 손끝 (43/89)


43. 녹아내리는 손끝
2023.02.26.


***

다정은 기분 좋은 포만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연신 음식을 나르는 태상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배불리 먹은 식사였다.

접시는 모두 깨끗이 비워진 채 뚜껑이 덮여 있었다. 그대로 두고 좀 쉬려는데 태상이 거실을 가로질러 내선 전화를 집어 들었다.

식사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까지 식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지, 그는 바로 직원을 호출했다.

잠시 후, 룸서비스 담당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와 트레이를 수거했다.

태상은 그를 배웅하듯 복도까지 함께 걸으며 무어라 말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빳빳한 지폐 여러 장이 남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척 보기에도 한두 장이 아닌 것 같은데. 다정은 거실로 돌아온 태상에게 의문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셰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어.”

“아…… 잘하셨네요. 저도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계속 그렇게 맛있게 먹어.”

태상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소파로 와 앉았다. 옆자리가 푹 꺼지는 걸 느끼며 다정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아까 얘기했던 그 영화 볼까요?”

룸서비스를 기다리던 중, 다정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영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거의 다 모르는 제목이었지만 그 가운데 보고 싶었던 로맨스 영화가 한 편 있었다.

조심스레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태상은 의외로 선선히 그러자고 했다.

영화를 재생시키자 잔잔한 배경음악이 먼저 흘러나왔다.


“지루하면 중간에 딴 거 틀어도 돼요.”

“이게 네가 보고 싶은 거잖아.”

“그렇긴 한데…… 부사장님 취향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난 네 취향이 좋아.”

“…….”

네 취향을 내 취향으로 삼겠다니.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다시 입을 떼려는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무튼 재미 없으면 말해 주세요.”

다정이 빠르게 말을 마치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는 느릿한 속도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의지할 곳 없는 두 남녀가 서로를 찾고 알아가는 내용이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펼쳐졌다.

어느새 영화에 빠져든 다정은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허리가 푹 잠기는데 옆자리가 꾹 눌리는 게 느껴졌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가까운 거리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재미…… 없어요?”

“재밌어.”

태상이 얼굴에 머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계속 이랬던 것 같은데. 다정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태상의 눈길이 제게 향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언제나 돌아보면 가까운 곳에 그가 있었고, 눈이 맞았고, 손길이 닿았다.

신경이 쓰여서 옆에 두어야겠다던 말. 그건 제게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다정은 긴장된 눈동자를 슬쩍 밀어 올렸다.

붉은 와인을 머금은 그의 입술이 관능적으로 빛났다.


“부, 부사장님…….”

짙은 눈동자가 빠르게 다정을 품었다.


“저, 있잖아요…….”

“…….”

“전에 했던 말이요…….”

“내가 했던 말?”

“아, 아니에요.”

다정이 작게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를 향한 마음이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마음으로 품는 건 쉬웠지만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웠다.

혹시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 그냥 필요에 의한 관계라고 하면 어쩌나. 다정은 차오르는 궁금증을 다시 꾹 눌렀다.

그때, 중반부를 넘어선 영화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허당미 넘치는 주인공의 친구가 귀여운 실수를 저질렀고, 이를 지켜본 주인공이 수습을 한답시고 사고를 더 크게 키웠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팍 터뜨렸다. 습관처럼 손이 입가를 가렸다.


“하하, 하…….”

다시 소파 위에 손을 올려놓은 다정의 입매가 빠르게 굳었다.

아무 곳이나 대충 짚은 건데.

손 아래로 단단한 무언가가 와 닿았다. 굵직한 뼈대며 뜨거운 체온.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태상의 손가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정은 슬금슬금 손바닥을 옆으로 움직였다.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도망가는데 빠르게 위치가 역전되는 게 느껴졌다.

아슬아슬하게 붙잡힌 건 기다란 새끼손가락이었다. 태상은 손톱 끝을 타고 느릿하게 올라와 손가락 마디를 꽉 감았다.

얇은 뼈마디가 완벽히 포박된 건 순식간이었다. 약속이라도 하듯 얽힌 손가락 위로 그의 체온이 느릿하게 비벼졌다.

다정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손끝에 감각을 집중했다.


 


“영화 보는 거 오랜만인데.”

“…….”

“생각보다 재미있네.”

“……저, 저도요.”

다정이 수줍게 소리를 뱉어냈다.

이런 달콤한 기분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확신할 수 없는 관계에 마음을 다 주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손이 영 제멋대로였다.

다정은 그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손마디를 오므려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주인공이 오해를 하고, 싸웠다 다시 만나고, 사랑을 확인하고. 온갖 장면들이 이어졌지만 더 이상 영화에는 집중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손끝으로 심장이 옮겨간 것 같았다.


“내일이면 가겠네.”

달콤한 기분에 무방비하게 취해가는데 귓가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네?”

“비행. 내일이잖아.”

“아…….”

다정은 내일 오후 비행기를 운항해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제가 떠나는 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이 넓은 방에 혼자 남겨질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싸하게 아팠다.


“이틀 더 있다 오신다고 했죠?”

“이틀이나 더.”

“저 가고 나서도 잠 잘 자요.”

“……노력해보지.”

“약이랑 술, 같이 먹지는 말고요.”

뻔한 이야기라는 건 잘 알지만 이것밖에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정은 안타까운 마음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의사도, 전문가도 아닌 제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답답한 마음이 눈처럼 소복이 쌓여가는데 순간, 움찔하며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전화로 목소리 듣는 건 도움이 안 될까요?”

“……?”

“전화로 사람 말소리 듣다 보면 잠 잘 오고 그러잖아요. 옆에 있는 것만큼은 아니래도 효과 있지 않을까요?”

목소리라.

태상은 귓가에 속삭이는 다정의 목소리를 떠올려봤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귓가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다정에게 향했다.


“좋을 것 같아. 자기 전에 네 목소리 들으면.”

“……전화할게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때맞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다정은 얽혀 있는 손가락을 아쉽게 바라봤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은 마치 현실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끝이 정해진 관계도, 불확실한 서로의 마음도. 전부 덮어놓고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나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머뭇거리며 손을 조금씩 빼는데 그는 여전히 감은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정이 조금 더 과감히 손을 움직였다. 그때, 작은 노크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누구……?”

문가 쪽으로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데 태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순간, 서늘한 공기가 새끼손가락 위로 빠르게 내려앉았다. 전에 없이 찬 느낌에 다정은 빠르게 손을 움츠렸다.


“잠깐만 있어.”

그렇게 말한 태상이 객실 입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뭐예요?”

다정이 제 앞으로 내밀어진 쇼핑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 대신.”

“대신…… 이요?”

“와인 때문에 못 입게 됐잖아.”

“아…….”

저도 잊고 있었던 이 작은 얼룩을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이야. 다정은 그의 섬세함에 새삼 놀랐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는데 리본으로 장식된 커다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불리는 브랜드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게…… 제 거라고요?”

다정이 조심스레 상자를 꺼내며 물었다.


“어서 풀어봐.”

“나가지도 못하는데 이런 걸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유능한 직원 덕분에.”

“아…….”

어쩐지 트레이를 치우는 직원과 이야기를 길게 나눈다 싶더라니.

뒤늦은 깨달음에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전부터 이 상황을 계획하고 있었던 거였다.


“여, 열어 볼게요.”

다정이 천천히 리본 끝을 당겼다.

새틴 소재의 끈은 한 번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양쪽 모서리를 잡고 뚜껑을 열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먼저 귓가를 사로잡았다.


“와…….”

상자 안을 확인한 다정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단정히 접힌 채 중앙에 놓여 있는 크림색 원피스, 그 둘레를 꼼꼼히 감싼 분홍빛 드라이플라워. 옷 위에 올려진 감사의 카드까지.

받는 이에게 최대한의 감동을 주기 위한 아름다운 배치였다.


“너, 너무 예뻐요.”

“아직 꺼내 보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알아요. 예뻐요.”

다정이 홀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어 봐.”

“지금요?”

“입은 모습 보고 싶어. 내가 제일 먼저.”

태상이 파고드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호기심을 넘어선 강한 열망이었다. 처음으로 보고 싶다는, 아니 사실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

그는 끓는 것 같은 속마음을 미끈한 미소로 감췄다.


“아, 안 어울려도 별말 하기 없기예요.”

다정이 상자에서 옷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어. 매장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옷으로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사, 사랑스러운…….”

귓가를 타고 들어온 목소리가 어쩐지 굉장히 뜨거운 것 같았다. 참아볼 새도 없이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다정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대답했다.


“아, 알겠어요. 입고 나올게요.”

도망치듯 일어선 다정은 침실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닫은 문 위로 등을 대고 서는데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강하게 뛰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꾹 눌렀다.


“하…… 진짜 건강에 안 좋아.”

가슴을 휘젓는 말이며 녹는 듯한 눈빛. 늘 그렇듯 그는 감당하기 벅찬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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