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녹아내리는 자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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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녹아내리는 자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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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녹아내리는 자제력
2023.02.23.
기업의 재무를 담당하는 그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 태상은 지금껏 단 한 푼도 허투루 써 본 적이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듣는 말 앞에 뭐라 반응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손끝으로 가볍게 이마를 짚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저는 이거, 나시고랭.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다정이 메뉴판 한가운데를 콕 짚으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이쪽은 해주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답답해 죽을 지경인데 담백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태상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날 더 이용해 볼 순 없나.”
“이용……이라뇨?”
“조금만 더 써먹어 봐.”
의도적인 접근, 혹은 친절로 가장한 시커먼 속내. 태상은 그런 것들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이름보다도 더 자주 듣는 ‘효성 3세’라는 수식어 덕분에.
처음에는 태상도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의도를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요령이라는 게 생겼다.
태상은 사람들의 간사한 속내를 칼같이 읽어냈고, 필요하다면 그 마음을 역으로 이용했다.
그런 제가 스스로 이런 말을 하다니. 태상은 쓴웃음을 흘리며 다정을 바라봤다.
“너라면 괜찮을 것 같거든. 이용당하는 거.”
“그러니까……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 주겠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래. 뭐든 다.”
드디어 생각해 볼 마음이 생긴 건가. 태상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휘어졌다.
다정은 커다란 눈동자를 무해하게 깜빡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꽃구경이요.”
“꽃, 구경?”
“네. 맨날 일하느라 바빠서 한 번도 제대로 보러 간 적이 없거든요. 저는 꽃이라면 아무거나 다 좋으니까 나중에 같이 가 주세요.”
“…….”
원한다면 커다란 정원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한겨울에도 꽃을 피우게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바라는 게 고작 꽃구경이라니.
철저히 써 먹혀 줄 마음이 있는 태상으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요청이었다.
답답함이 명치 언저리를 꽉 누르는데 다정이 말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냥 지나가다 보는 거 말고 진짜 꽃구경이요.”
“피자마자 데리고 가 주지.”
“네? 피자마자는 안 되죠.”
“……?”
진지한 그의 표정에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막 피었을 때는 별로 안 예쁘잖아요. 활짝 피는 절정, 그때 보러 가는 거예요.”
“그럼 조금 더 기다려야겠네.”
“조금 더…….”
“내년 봄. 벚꽃이 에일 예쁘게 필 때까지.”
“…….”
한여름 뙤약볕인 지금, 태상은 저와 함께하는 봄날을 서슴없이 그린다.
어쩌면 그는 이 결혼에 진심일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속절없이 뛰었다.
“네. 좋아요.”
다정은 벚꽃처럼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 답했다.
***
룸서비스를 기다리는 중, 다정은 트롤리에서 편한 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실내라고는 하지만 태상에게 하루 종일 잠옷 입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한국에서 챙겨온 옷은 요란스럽지 않은 면 소재의 롱원피스였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다정은 색이 있는 립밤을 살짝 발랐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태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침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지 방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그때, 짧은 노크 소리가 거실에 나직이 울렸다.
「룸서비스.」
“어? 벌써 왔네.”
다정은 바삐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문부터 닫았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통과해 객실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직원이 왜건을 끌고 서 있었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조심스레 접시를 날랐다.
통유리로 된 거실 창 앞에는 흰색 테이블보가 씌워진 동그란 식탁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직원이 커다란 접시를 연이어 내려놓자 작은 테이블이 금세 가득 찼다.
「와인, 지금 따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식사가 준비되는 소리를 들었을 테니 태상이 통화를 그리 오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일에 굳이 직원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비스업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직업병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남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객실을 나섰다.
다정은 한 손으로 와인 병을 끌어안듯 잡고 오프너를 코르크에 가져다 댔다.
-끼릭, 끼릭.
마개 안으로 나선이 밀려 들어가자 손안에 뻑뻑한 질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끝까지 스크루를 돌린 다정은 오프너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꾹 눌렀다.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열려.”
미간을 잔뜩 모으고 힘을 한번 세게 주자 갑자기 코르크가 위로 쑥 밀려났다.
놀란 다정은 급하게 손에 힘을 뺐다. 하지만 힘의 균형을 맞춰주던 마개가 사라지자 몸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
급하게 상체를 뒤로 물려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출렁이며 튀어나온 와인이 원피스 앞섬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자줏빛 액체가 베이지색 옷감 위에 스미며 수묵화처럼 잔잔히 퍼져 나갔다.
“하…….”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굳이 갈아입은 건데.
다정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냅킨을 집어 들었다. 힘을 주어 꾹꾹 찍어 누르는데 얼룩은 옅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어느새 통화를 마치고 나온 태상이 곁에 다가와 물었다. 그는 테이블과 다정을 차례로 훑어보며 조용히 사태를 파악했다.
“네. 괜찮아요. 조금 튄 것뿐이에요.”
다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며 냅킨을 멀찍이 치웠다. 어설픈 실수에 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지 않았다.
태상은 오프너를 치우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전화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는지, 그는 흰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잘 때 입는 옷은 식사 때 입지 않는다. 몸에 밴 생활 습관이 고스란히 읽히는 순간이었다.
태상은 다정의 잔에 생수를 따라 주었다.
“얼른 먹어. 하루 종일 자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네.”
그가 공복이라는 걸 상기시켜서인지, 아니면 고소하고 달콤한 음식 냄새 때문인지 입안에 군침이 가득 고였다.
다정은 무릎 위에 리넨을 깔고 둥그런 스테인리스 뚜껑을 열었다. 윤기가 흐르는 볶음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태상의 접시에 담긴 음식은 핏기가 적당히 도는 스테이크였다. 그는 우아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다정이 습관처럼 인사를 하고 볶음밥을 크게 한술 떴다. 간이 딱 맞는 채소며 고슬고슬한 밥알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뭉개졌다.
“맛있다.”
앙 다문 입이 부지런히 움직이자 미간이 기분 좋게 찌푸려졌다.
태상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들여다보다 잠깐잠깐 시선을 내려 고기를 썰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다정을 볼 때마다 서글서글하게 풀어졌다.
“이것도 먹어.”
그는 잘게 썰린 스테이크를 다정의 접시 위로 옮겼다. 그러곤 식기를 내려놓은 채 다정의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언제부터인지, 태상의 신경은 다정의 입술에 전부 쏠려 있었다.
빙그레 웃을 때 그려지는 곡선, 말할 때마다 동그랗게 오므려지는 모양. 분홍빛 살점이 만들어 내는 모습은 뭐든 미치도록 좋았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음식을 씹어 넘길 때였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태상은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다시 포크를 들었다. 한 점, 두 점. 작은 입에 맞춤으로 썬 고기가 끝도 없이 넘어갔다.
“이렇게 많이 주시면 부사장님은 뭘 드시려고요.”
“부족하면 더 시키면 돼.”
태상이 단호하게 말하며 포크를 또 한 번 움직였다. 볶음밥 옆에는 어느새 조각난 스테이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정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들여다봤다. 이러다 그의 몫까지 전부 다 제가 먹게 될까 걱정이었다.
순간, 너무 말라서 더 먹여야겠다던 그의 말이 퍼뜩 머릿속을 스쳤다.
“저…… 챙겨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매번 이렇게 많이 먹이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보기보다 엄청 튼튼해요.”
“내 눈엔 그렇게 안 보여.”
“…….”
평소보다 많이 먹는 것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배불리 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이렇게 과식을 할 수는 없다.
위기를 감지한 다정이 포크를 내려놓고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있잖아요.”
태상의 시선이 다정에게 향했다.
“우리, 식사도 연습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요?”
“…….”
익숙한 한 마디에 그의 눈썹이 작게 움찔했다.
“아까 그러셨잖아요. 우린 앞으로 한 침대를 쓰게 될 텐데 연습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그랬지.”
“밥 먹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앞으로 한 식탁을 쓰게 될 텐데 연습이라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요?”
태상은 식기를 내려놓고 빠르게 얼굴색을 바꿨다.
“타협을 좀 하지.”
“어떻게요.”
다정의 눈썹 끝이 뾰족이 올라갔다.
머리 회전이 빠른 데다가 행동력까지 갖춘 남자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그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끌려갈 게 뻔했다.
“앞으로 내 음식은 조금만 권할게.”
“대신……?”
“대신 에피타이저 하나쯤은 더 시켜. 아니면 디저트나 식전 빵이라도.”
“…….”
다정은 머릿속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재보았다.
제안을 거절하면 그가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설까. 다른 협상안을 제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에 잠긴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 테니까 저 먹는 거에 너무 신경 쏟지 마세요. 저 때문에 못 드시는 것 같아서 미안하단 말이에요.”
태상은 미묘한 시간차를 두고 느릿하게 입을 뗐다.
“……밖에선.”
“네?”
그가 두 손을 가볍게 모으며 테이블 위에서 깍지를 꼈다. 그 모습이 마치 중요한 회의의 최종 결정이라도 내리는 사람 같았다.
“밖에서는 그렇게 할게.”
“안에서는 왜 안 하는데요?”
다정이 반쯤 포기한 채로 물었다.
“우리 집은 부엌을 가장 신경 써서 준비했거든. 널 잘 먹이려고.”
“……우리, 집이요?”
“그래. 우리 집.”
“설마 집을 벌써 구하셨어요? 어, 언제요?”
실행력이 빠른 남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빠르게 물들었다.
“주차장에서 네 허락을 들은 날.”
“그렇게 빨리요?”
“내가 워낙 여유가 없는 성격이라.”
절제는 태상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가정환경과 치열한 회사 생활 속, 절제와 인내는 언제나 삶의 일부였으니까.
하지만 이 작은 여자 앞에서는 어느 것 하나 마음이 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굳건하게 쌓아 올린 인내심이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져 내렸다.
태상은 고기 한 점을 포크 위에 얹어 다정의 접시로 옮겼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더 먹어.”
“이거 그만하기로 하셨잖아요.”
“연습이잖아. 연습에서는 원래 실수가 많은 법이야.”
흠잡을 데 없는 변명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실수’를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