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녹아내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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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녹아내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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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녹아내리는 시간
2023.02.19.
아니나 다를까, 차 회장이 묵직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지.”
“생각해 놓은 부서는 있고?”
“다시 마케팅팀으로 가고 싶습니다. 적성에 가장 잘 맞았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려무나.”
이때다 싶어 명옥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님, 전에 말씀드렸던 상무 자리…….”
“과장 자리 하나 만들어 놓으라고 할 테니 다음 주부터 출근하려무나.”
“아, 아버님!”
명옥이 펄쩍 뛰며 소리를 높였다. 경영권 승계다, 뭐다 말이 많은 이 시기에 과장이라니. 이건 수빈을 대놓고 배제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참고 기다린 세월이 얼마인데. 차오르는 배신감에 차마 뭐라 말도 이을 수 없었다.
명옥은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아버님, 직원들 보는 눈도 있는데 과장이라뇨.”
“태상이는 평사원부터 시작했다.”
“…….”
순간, 명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이런 순간에도 태상을 들먹거리다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식탁 밑에서 꽉 말아 쥐는데 맞은편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효성의 전설이라고 불린다죠? 역시 형은 참 대단해요. 공채로 입사해서 임원이 되다니.”
“그럼 너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련?”
“아뇨!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평탄한 길이 좋습니다. 쉽게, 쉽게 과장부터 갈래요.”
“…….”
속도 없는 놈.
해사하게 웃는 아들을 바라보는 명옥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런 눈빛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수빈이 또 기가 막힌 말을 뱉어냈다.
“그런데 다음 주는 조금 이르고 이달 말부터 출근하겠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는데 저도 좀 놀아야죠.”
“녀석. 시간 아까운 줄을 몰라. 마음대로 하거라.”
차 회장이 혀를 쯧쯧 차더니 다시 수저를 들었다.
명옥은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고 겨우 젓가락을 들었다.
눈에 보이는 반찬을 아무거나 집어 들어 입가로 가져가는데 혀에선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
까무룩 잠이 들었던 걸까.
깨어나기 싫은 나른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다정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모든 건 잠이 들기 전 그대로였다. 창밖에서 부드럽게 들이치는 햇빛, 객실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 그리고 제 머리맡을 받치고 있는 단단한 어깨까지.
살며시 고개를 들자 고른 숨을 내쉬는 태상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고 있는 거겠지……?’
슬쩍 상체를 일으키는데 가죽 소파에서 옅은 뿌드득 소리가 났다. 다정은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무게 중심을 옮겼다.
그러자 마치 제가 없어진 걸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태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정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시곗바늘은 이미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속하기도 하지. 잠깐 눈만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다정은 원망스러운 눈빛을 거뒀다.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건 아쉽지만 곤히 잠들어 있는 태상을 볼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니까.
기다랗게 내려앉은 속눈썹이며 부드럽게 풀어진 눈매. 고른 숨을 내쉬는 오뚝한 코.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비행기에서도 좀 이렇게 자지…….’
모두가 잠든 새벽, 태상의 자리는 밝게 불이 켜져 있었다.
잠이 잘 오는 허브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권해 보았지만 태상이 필요로 하는 건 그냥 생수였다. 수면제를 먹기 위한 생수.
‘분명 엄청 피곤하겠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합병 관련 기사, 차기 효성 후계자로서의 행보.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들이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쉬고, 많이 자도 부족할 텐데. 불면의 밤으로 고통받는 그가 안쓰러웠다.
‘왜 맨날 이렇게 못 자…… 사람 맘 아프게.’
안타까운 마음이 올라오는데 눈가를 찌르는 앞머리 몇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얼굴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깔끔하게 드러난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입꼬리가 들썩인 것 같은데.
다정은 긴장된 눈빛으로 그의 입술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러자 불그스름한 입술이 또 한 번 부드럽게 휘었다.
“깨, 깼죠?”
다정이 그의 머리 주변에 있던 손을 빠르게 물리며 말했다. 다 알면서 가만히 있는 그가 꽤 괘씸했다.
태상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단번에 제게 향하는 게 한참 전부터 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옆에 있으면 긴장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건…….”
“그래서 같이 못 자겠다고.”
늘 그렇듯 그는 맞는 말로 정곡을 찔렀다. 다정은 우물거리며 재빨리 변명의 말을 생각해냈다.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찔러서 그런지 계속 미간을 찡그리고 계셨어요. 그래서 도와드린 거예요. 잘 자라고.”
다정은 관계없는 두 가지 사안을 빠르게 엮었다. 시간차가 날지언정 둘 다 사실이긴 하니까.
“……찡그리긴 했지.”
태상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정은 괜히 뜨끔해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응.”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은 어깨를 쫙 펴며 굳어 있던 근육을 깨웠다. 그러자 잠잠하던 가슴이 커다란 굴곡을 만들며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정이 눈을 돌리며 어색하게 입을 뗐다.
“벌써 세 시예요.”
“세 시?”
“네. 한 삼십 분 정도 잤겠지 했는데 벌써 이렇게 됐더라고요. 알람이라도 맞출 걸 그랬나 봐요.”
“…….”
끝으로 갈수록 흐릿해지는 목소리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태상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다정의 얼굴을 살폈다.
또렷하던 눈매가 어느새 아래로 축 처져 있었고, 아랫입술은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작은 얼굴에 가득 드러난 건 짙은 아쉬움이었다.
태상은 실망한 강아지 같은 그 얼굴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곁에 있고 싶다고,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니까.
“아직 시간은 많아.”
나직한 목소리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웃음이 섞여들었다.
“영화부터 볼까?”
“영화요?”
“보고 싶다며.”
“아.”
가볍게 흘리듯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빠르게 기억을 훑은 다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다른 건.”
“네? 다른 거라뇨?”
“또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봐.”
“…….”
시간이 많이 흐른 게 아쉽다고 불평을 한 것 치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생각하는 게 워낙 소박해서 그런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별로 없는데…….”
가볍게 입을 여는 순간,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둘만 있는 조용한 공간이라 민망한 울림이 평소보다 훨씬 더 크게 들렸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배를 두 손으로 가렸다.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손이 부족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태상이 허리를 굽히며 가까이 다가왔다.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 진짜.”
다정은 얼굴을 푹 숙인 채 작게 웅얼거렸다.
예쁘고 똑 부러지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맘을 몰라주는 위장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태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협탁에 놓인 룸서비스 메뉴를 집어 들었다.
“영화가 아니라 먹을 것부터 권할 걸 그랬네.”
“배, 배가 많이 고픈 건 아니에요. 그냥 조금 허기진 정도지.”
다정이 메뉴판을 받아들며 변명조로 말했다.
“내가 많이 고파. 그러니까 얼른 열어 봐.”
“…….”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거짓말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민망함이 자연스레 가시고 몽글몽글 기분이 좋아졌다.
순간, 작은 깨달음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태상과 무언가 대단한 걸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냥 이렇게 소소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거지.
이제 보니 하고 싶은 걸 생각해내지 못한 게 당연했다.
다정은 빙긋 웃으며 두꺼운 책자를 펼쳤다. 그러자 태상이 곁에 와 앉으며 자연스레 같은 페이지를 내려다봤다.
“없는 메뉴를 말해도 괜찮아.”
“설마요. 이렇게 두꺼운데 이 안에 먹고 싶은 게 있겠죠.”
다정은 동남아 음식이 적힌 페이지를 펼쳐 위에서부터 하나씩 꼼꼼히 읽어 나갔다. 혹시 모르는 음식이 있으면 설명까지 천천히 살펴보는 게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상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심각하죠. 맛있는 거로 고르고 싶단 말이에요.”
다정은 음식을 주문할 때 그다지 운이 따르는 편이 아니었다.
제가 고른 음식만 유독 늦게 나온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요리보다 훨씬 맛이 없다거나.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꽝손’이라고 놀림을 받을 때도 있었다.
오늘도 꽝을 뽑을 수는 없다. 그렇게 결심한 다정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그만 봐. 다 시켜줄게.”
“다 시키다니요.”
다정이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대꾸했다.
다 시킨다는 말을 그저 농담으로 취급하는 게 분명했다. 태상은 메뉴를 한번 훑더니 페이지 어딘가를 손끝으로 짚었다.
그의 손가락이 머무는 곳은 음식 이름이 아니라 ‘로컬 푸드’라고 적혀 있는 카테고리였다.
“이걸 시키면 되는 건가?”
“네……?”
다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동남아 음식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
직원식당에서 가볍게 나눈 대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머리가 좋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또 다른 섬세함을 요하는 일이었다.
다정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건 시키는 게 아니에요. 제목이잖아요, 제목.”
부드럽게 분위기가 풀어진 탓일까. 다정은 어느 정도 유지하던 거리를 저도 모르게 좁혀가고 있었다.
“돈이 너무, 너무 많으신 건 잘 아는데 그래도 아껴 써야 해요.”
“아껴…… 쓴다라.”
태상이 껄끄러운 표정으로 어색하게 따라 읊조렸다.
“네. 전에도 느낀 거지만 고르는 게 귀찮다고 전부 다 사고 그러면 안 돼요. 부사장님은 씀씀이가 너무 관대하다고요.”
“관대.”
태상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