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녹아내리는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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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녹아내리는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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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녹아내리는 입술
2023.02.16.
“……무슨 뜻이지?”
태상이 의아한 투로 말했다.
“그, 그러니까, 그 웃는 거요…… 방금 전처럼…….”
“웃는 게 싫은 건가?”
“아뇨! 좋아서요. 좋은데…….”
“……?”
“아까우니까……요?”
머리를 쥐어 짜낸 대답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다정은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며 빠르게 소파 쪽으로 향했다.
“아무튼 제가 여기서 잘게요. 부사장님은 침대에서 편히 주무세요.”
대충 자리를 잡고 앉는데 차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정은 힐끔거리며 그의 발끝만 응시했다.
“…….”
태상은 살짝 숙인 동그란 머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문 채였다.
더 기다려야 하는데. 살금살금 다가올 때 쫓으면 더 도망가는 법인데.
잘 알면서도 오늘 같은 날은 영 참아지지가 않았다. 다정이 제게 조금씩 다가오는 이런 날엔.
묵직한 걸음이 소파로 향했다.
-꾸욱.
태상은 자연스럽게 다정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꽤 가깝게 붙은 거리. 다정은 양옆을 한번 빠르게 훑고 소파 빈 공간을 가리켰다.
“저, 저쪽에 자리 많잖아요. 왜 굳이 좁게 이쪽으로…….”
“잘 땐 더 좁아질 텐데?”
“잘 때……? 설마 소파에서 주무시려고요?”
태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어차피 한 침대를 쓰게 될 텐데.”
“…….”
“연습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느릿하게 파고드는 말투가 마치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 같았다.
다정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태상이 갈색 눈동자 안을 빤히 들여다봤다.
다정은 방어막처럼 눈꺼풀을 내렸다.
“무슨 걱정을 하는 거지?”
그가 일렁이는 감정을 읽어내고 빠르게 말했다.
“거, 걱정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
태상이 제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와 한 침대에 눕는다는 것 자체가 긴장이 되었다.
함께하고 싶지만 또 동시에 겁이 나는. 서로 다른 마음이 양쪽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태상 씨를 믿으니까 걱정 같은 건 안 해요. 그치만…… 그래도 긴장은 좀 돼요. 같이 누울 거 생각하면.”
“…….”
태상은 생각에 잠긴 듯한 시선으로 다정을 바라봤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를 부드럽게 풀더니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럼 이대로 있지.”
팽팽하던 근육에서 힘이 빠지자 안 그래도 커다란 몸이 더 크고 묵직해 보였다.
“이대로요?”
“눕는 거, 긴장된다며.”
그가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기대고 싶으면 기대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부드럽게 전해졌다.
“……풉.”
다정은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순진한 해석을 내놓는 남자가 좋았다.
줄다리기가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다정은 허벅지에 힘을 주며 조금씩 그의 곁으로 붙었다.
어깨에 기대는 정도니까. 태상이 하라고 했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머릿속이 바빴다.
다정은 크게 굴곡진 그의 어깨 위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어차피 돌처럼 단단하기도 하고, 잠깐 자다 일어날 거니까 이 정도 고생은 시켜도 될 것 같았다.
“별로…… 안 무겁죠?”
“…….”
아무 말이 없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가볍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웃지 말라니까.
다정은 몰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의 어깨에 기댔다.
단단함이 점차 편안함을 바뀌었고, 낯선 체온은 제 체온과 하나가 되었다. 기분 좋은 감촉과 함께 빠르게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점심때를 조금 지난 시간, 본가 주방은 오랜만의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었다.
“아니, 그건 좀 더 푹 익혀요. 애가 워낙 퍼진 식감을 좋아해서. 어, 그 반찬은 내지 말고요.”
주방을 진두지휘하는 건 다름 아닌 명옥이었다. 평소 주방 일에는 관심도 없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은 수빈이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본가에서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완벽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식탁은 차 회장과 수빈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빠르게 채워져 갔다.
마지막으로 밥과 국만 뜨면 되는데.
“얘가 설마…….”
명옥은 벽에 걸린 시계를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차 회장이 시간 약속에 엄격하다는 걸 잘 알면서 왜 또 이러는 건지. 아슬아슬하게 조여 오는 시간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힐끗, 힐끗 문가를 보기도 지칠 즈음, 서재에서 나오는 차 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차수빈, 하여간 정말.”
명옥은 억눌린 탄식을 흘리며 식탁 위의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었다. 수빈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현관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할아버지!”
나름 신경을 쓴다고 썼는지, 수빈은 의외로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다.
“그래. 수빈이 왔구나.”
차 회장이 점잖은 투로 수빈을 맞이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반가움이 느껴졌지만 태상을 대할 때처럼 흥분된 기색은 아니었다.
“잘 지내셨죠?”
“나야 늘 똑같지.”
“똑같긴요. 주름이 훨씬 느셨는데.”
“그래. 그랬겠구나.”
살가운 장난에도 차 회장의 태도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어서 들라는 듯 손짓하며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찍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명옥은 내심 피가 말랐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좀 달라지려니 했건만, 수빈을 대하는 차 회장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늘 그렇듯, 그에게 수빈은 2등짜리 손주였다.
명옥은 사르르 녹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얘, 수빈아. 그러니까 엄마가 한국 좀 자주자주 들르라고 했잖아. 네가 그동안 너무 안 찾아뵈어서 할아버지 얼굴에 주름이 늘었잖아.”
“응.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가 오라고 할 때 올걸.”
수빈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 회장은 그를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말투, 아직도 못 고친 게냐.”
“아, 맞다.”
수빈이 얼른 목을 가다듬으며 얼른 다시 입을 뗐다.
“어머니께서 오라고 할 때 올 걸 그랬어요.”
“아…… 응. 그래.”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명옥은 아들을 대신해 재빨리 변명을 읊었다.
“수빈이랑 반말하는 게 친근하고 좋아서 그냥 뒀는데 이렇게 습관이 오래갈 줄을 몰랐네요. 죄송해요, 아버님. 제 실수예요.”
“말은 사람을 담는 그릇이야. 앞으론 조심하거라.”
“네.”
명옥이 단정하게 답하며 수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멀뚱멀뚱 서 있던 수빈이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할아버지. 주의할게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차 회장이 아쉽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식구가 다 모였는데 태상이가 없구나.”
“형은 또 출장 갔다면서요?”
“그래. 곧 돌아올 거니까 태상이 오면 그땐 둘이 같이 들르거라.”
“네. 그럴게요.”
수빈이 해사하게 웃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속이 텅 빈 인형 같은 미소였지만 숨 쉬듯 자연스러워 별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차 회장은 식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움직임이 신호탄이 된 듯, 멈춰 있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사 도우미들은 마지막까지 온기를 더하던 요리를 식탁에 냈고, 명옥과 수빈이 자리에 앉았다.
“너 좋아하는 거 잔뜩 했어. 많이 먹어.”
식사 인사를 마치자마자 명옥이 수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수빈은 차 회장이 한술 뜨기를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었다. 음식을 조금씩 입에 넣고 조용히 씹어 삼키는 게 어릴 때부터 예절 교육을 제대로 받은 태가 났다.
식탁 위에는 한동안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눈엣가시인 태상도 없고 오랜만에 수빈도 함께하는 식사 자리.
평소 같으면 온갖 칭찬과 과장으로 수빈을 띄웠을 명옥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수빈이 입국하기 며칠 전, 명옥은 차 회장에게 은근히 운을 띄웠다.
‘아버님, 수빈이 이번에 들어오면 상무 자리 하나 정도는 내어주는 게 어떨까요? 회사에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게.’
‘일단 들어오고 나면 이야기하도록 하자.’
칼같이 자르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더라니 차 회장은 그 후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명옥은 초조했지만 보채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입국 소식을 전해도, 식사 자리 얘기를 꺼내도 차 회장은 한결같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어쩜 예나 지금이나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지.
수빈을 향한 차 회장의 무심한 태도는 수빈이 회사에 재직 중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수빈은 여느 평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게 차 회장의 의중이라고 말했다. 태상을 벌써 차기 후계자로 점찍은 것 아니겠냐고. 그러니 미리미리 가지치기를 하는 거 아니겠냐고.
수빈이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건 바로 그즈음이었다. 도피성 출국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던 명옥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끈기가 조금 없다 뿐이지 업무 성과 자체가 나빴던 적은 없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분명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줄 텐데.
믿고 지원해주지 않는 차 회장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다 과거의 감정이었다. 마지막 기회 앞에선 그런 원망도 사치였다.
“예쁘긴 정말 예쁜데 날이 너무 추운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다시 얘기를 꺼내면 좋을까,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는데 수빈은 그동안 찍은 새에 대한 이야기로 바빴다.
합병이다 중요한 해외 미팅이다, 식사 때마다 굵직굵직한 화제를 꺼내는 태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답답한 마음에 연신 물만 들이켜는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수빈이 그간 찍은 사진으로 국제 대회에 나가 상이라도 받았다는 점이었다.
“텐트까지 치고 3일이나 기다려서 겨우 찍었다니까요.”
“그 고생을 하면서 새를 찍는 게 뭐가 좋다는 건지. 할아비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구나.”
차 회장이 다소 찌뿌둥한 얼굴로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수빈이 하는 일에 무엇 하나 만족한 적 없는 차 회장다웠다.
명옥은 하는 수 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게 대단하잖아요. 수빈아, 앞으로 회사에서도 딱 그렇게만 해. 알겠지?”
“네. 그럴게요.”
이렇게까지 티를 냈으면 이제는 모른 척 할 수 없겠지. 명옥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은근히 차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수빈아, 회사로 다시 돌아오고 싶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