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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내 하루가 바쁜 이유 (39/89)


39. 내 하루가 바쁜 이유
2023.02.12.


***

다정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호텔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도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믿기지 않아 머릿속이 조금 멍했다.

가만히 앉아 눈만 깜빡이는데 옆자리에서 가죽 시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장에게는 내가 따로 말을 해 두지. 비행 전 공항에서 팀원들과 합류할 거라고.”

태상이 허벅지를 교차하며 그 위로 가볍게 손을 올렸다.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지.”

“다른 호텔로 옮기게 됐잖아요.”

태상은 차에 타자마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5성급 호텔로 목적지를 정했다. 한 통의 전화만으로 금세 스위트룸 예약이 완료되었다.


“네가 불편해하는 걸 보느니 호텔을 옮기는 게 백번 나아.”

같은 호텔에 체류하는 이상 로비며 식당, 곳곳에서 동료들을 마주칠 게 뻔했다.

그때마다 그 소문 진짜냐, 라는 소리를 듣느니 오늘은 그냥 방 안에만 있을까 했는데. 태상의 배려로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감사해요.”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네?”

툭 던지는 듯한 그의 말에 다정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비행기에서. 아까 네가 날 도와줬잖아.”

“아…….”

잠시 잊고 있었던 남자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되살아났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시선이며 의심 어린 눈초리. 그때의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라 다정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끌어안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시는 거죠?”

태상은 기다란 속눈썹을 차분히 떨어뜨렸다. 붉은 입술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으며 다정의 애를 태웠다.


“그 남자는 윤명옥 본부장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흐릿하긴 하지만 본 기억이 있어.”

“윤명옥 본부장이면…….”

“내 어머니.”

의아함에 차 있던 다정의 얼굴이 일순 빠르게 굳었다.

어머니라니. 이런 무서운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다름 아닌 어머니라니.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피는 이어지지 않은 새어머니지.”

“아,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다정이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결혼은 회장님의 염원이자 경영권 승계의 시작이야. 그 여자는 우리 사이가 가짜라는 증거를 잡아서 그걸 막으려는 거고.”

“그, 그런…….”

다정은 수상쩍었던 남자의 정체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의 치부를 포착하기 위해 명옥이 파견한 사냥개였던 셈이다.

순간,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혹시 지금도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혹시 지금도 몰래 따라오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겠지.”

태상이 편안한 투로 말했다. 다정은 황당하다는 듯 눈썹 끄트머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감시하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요?”

뜬금없는 질문에 다정의 얼굴에 벙찐 표정이 어렸다.

멀뚱멀뚱 그를 들여다보는데 태상의 입술이 미끈하게 휘었다. 서늘하게 굳은 눈매와 어우러지지 않는 표정이 꽤 사악한 느낌을 자아냈다.


“숨어서 안 나오는 거.”

 

***

뽀얀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안.

다정은 세면대 앞에 서서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 물기를 머금은 투명한 입술이 거울 안에서 붉게 빛났다.


“하아…….”

반복적으로 타월을 문지르는데 문득,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샤워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태상의 말 때문이었다.


‘숨어서 안 나오는 거.’

 
태상은 내일 아침, 말레이시아 항공 본사에서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아직 해가 머리 꼭대기에도 이르지 못한 시간. 내일까지 숨어 있자는 얘기는 결국 하루 종일 같이 있자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함께 TV를 보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보통의 연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할 일들이겠지만 다정에게는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다정은 떨림이 묻어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욕실을 나섰다. 묘한 긴장과 흥분 탓에 밤을 새운 피곤함마저 잊혔다.

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가 목덜미를 감쌌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데 거실 끝에 기다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태상이었다. 그는 생수 한 병을 손에 들고 테라스 앞에 서 있었다.

물기가 맺힌 촉촉한 머리칼, 수증기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전신에 습윤한 기운이 흘렀다.


 


“…….”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고개를 돌린 태상과 눈이 딱 마주쳤다. 훔쳐보다가 걸리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정이 어수선하게 입을 열었다.


“씨, 씻고 나오셨나 봐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수를 내밀었다. 다정은 슬금슬금 다가가 물병을 받아 들었다.


“마셔. 목마를 거야.”

태상이 발그레한 다정의 볼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처럼 새하얗던 피부가 어느새 장미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정은 살짝 손목을 기울여 물을 홀짝였다. 그러자 태상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접었다.


“더.”

“많이 마셨어요.”

“조금만 더 마셔. 욕실에 꽤 오래 있었어.”

“…….”

걱정 어린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혔다. 다정은 물을 여러 번에 나눠 조금씩 마시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태상은 그제야 표정을 편하게 풀었다.

물 몇 모금 더 마신 게 그렇게 만족스러운 일인지. 다정은 의아함을 안은 채 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앞의 풍경에 집중하려는데 낯선 체향이 자꾸만 주의를 흩트려 놓았다. 평소의 묵직함 위에 옅은 보디샴푸 향이 덧씌워진 듯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아무리 태연한 척을 해 보아도 둘만 있는 공간이라는 걸 자꾸만 의식하게 되었다.


“내일…… 회의 참석하러 몇 시에 나가세요?”

다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홉 시쯤.”

“오늘은 아무 일정 없으신 거죠?”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함께 있을 하루가 기대된다는 본심을 숨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금살금 눈동자를 위로 밀어 올리는데 단호한 음성이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아니. 오늘이 더 바빠.”

“아…….”

예상치 못했던 그의 한 마디에 동그랗던 눈매가 축 처졌다. 다정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이, 일하시는 거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있을게요.”

“일 같은 건 안 해.”

“그럼……?”

“오늘은 너랑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 있을 예정이라.”

“…….”

“그래서 바빠.”

인장을 찍듯 꾹꾹 눌리는 목소리에 다정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설렘과 두근거림, 거기다 묘한 긴장감이 뒤섞여 마음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다정은 엉킨 실타래 같은 마음을 안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우리……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네요?”

“그렇지.”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해외라면, 호텔이라면 정말 지겨울 만큼 와 보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함께하는 하루는 소중하고 특별했다.

뻔한 룸서비스도 좋고, 한가롭게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다정은 들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 안에만 있으면 심심할 텐데 영화라도 볼까요?”

“영화도 좋지만…….”

말을 잠시 멈춘 태상이 손을 뻗어 커튼 끝을 가볍게 당겼다.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정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어둑한 그림자가 어렸다.


“지금은 얼른 자야지.”

“벼, 별로 안 졸려요.”

“밤새워 일하고 안 자면 몸 상해.”

“그건 그렇지만…….”

다정이 운항한 비행은 손님에게는 최고이지만 승무원에게는 최악인 밤 비행이었다.

저녁에 출발해 밤을 새워 날아가는 비행.

편히 잠을 잔 후 목적지에서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하는 손님들과 달리, 승무원들은 밤을 꼴딱 새운 후 호텔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태상은 붉은 기가 도는 다정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일어나서.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 하자. 네가 좋아하는 거 다.”

“……안 잔 건 부사장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비행 내내 깨어 계신 거 다 봤어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몰라줘서일까. 다정은 저도 모르게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웅얼거리는 말투가 어쩐지 귀엽게 앙탈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제 말투가 어떻게 들릴지 뒤늦게 깨달은 다정은 놀라 귓불을 붉혔다. 하지만 다행히 태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나도 밤을 새웠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 얼른 자자.”

“네?”

태상이 다정의 말끝을 낚아채며 새로운 결론을 도출했다. 다정은 놀란 듯 멍하니 그를 들여다봤다.

그의 말은 꼭 같이 자자는 것처럼 들렸다.


“서, 설마 같이 자자는 말씀이세요?”

“침대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래야겠지.”

태상이 열려 있는 침실 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위트룸은 침실과 거실, 그리고 두 개의 욕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대가 하나라면 그냥 방을 하나 더 예약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따라붙었을지도 모르는 남자를 생각하니 선뜻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선택지는 함께 자거나 아니면…….


“그럼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이 정도 크기면 저한테는 침대나 다름없어요.”

“…….”

태상은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다정의 얼굴을 훑었다. 잘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발그레한 두 뺨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함께 잔다는 말을 다르게 해석한 게 분명했다. 바로 오해를 풀어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냥 알려주기엔 발그레한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태상은 미소를 삼킨 채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어쩌지. 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사람을 소파에서 자게 할 생각이 없는데.”

“……열심히 일 안 했어요.”

다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상사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린가?”

“농땡이를 피웠다는 게 아니라, 부사장님께서 달랑 커피 한 잔만 시키셨잖아요. 손님이 조각상처럼 앉아만 있는데 저희가 바빴을 리가 없죠. 생긴 것도 조각상처럼 생겨서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다 보니 얼결에 본심이 흘러나와버렸다.

하지만 다정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렇게 잘생긴 이상, 어차피 스스로도 외모에 대한 자각은 있을 터였다.


“조각상.”

태상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네. 좀.”

“그럼 내가 소파에서 자도록 하지.”

“네?”

“조각상이니까. 소파면 충분하겠지.”

“아뇨, 그런 뜻이 아니…….”

바삐 손을 내젓는데 가파르게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끝만 삐딱하게 끌어올린 모습이 꽤 짓궂었다. 날렵한 눈매가 뒤를 이어 휘자 서늘한 얼굴이 장난스럽게 흐트러졌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얼굴에 순간, 다정의 심장이 멈췄다.

이런 모습, 이렇게 보석 같은 모습은 꼭 제게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다정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 안 웃으시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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