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내가 너를 지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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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내가 너를 지키는 법
2023.02.09.
“네?”
“애초에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잖아요.”
나연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 게 뉘우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앙칼진 눈동자로 희령을 쏘아보았다.
“저 정식으로 레포트 올릴 거예요.”
“레, 레포트?”
나연이 말하는 레포트란 운항팀으로 넘어가는 정식 보고서를 말했다.
관리자에 의해 작성되는 이 서류는 대부분 손님과의 마찰을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동료들 간의 트러블도 그 대상이 되곤 했다.
“사무장님께 말씀드려서 레포트 올릴 거예요. 선배님 두 분께서 강압적인 분위기 조성하면서 괴롭혔다고.”
“…….”
희령의 턱이 끝을 모르고 떨어졌다. 다정 역시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그녀는 여전히 잘못한 거 하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 사무장님 저기 계시네요.”
휙휙 주변을 둘러본 나연이 체크인 카운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목적지가 정해진 그녀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또각거리는 울림이 로비에 빠르게 퍼졌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다정은 일순, 놀라 숨을 멈췄다.
“부, 부사장님……?”
언제 이 호텔에 도착한 건지.
커다란 로비도 좁아 보이게 만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태상은 체크인을 마친 김하나 사무장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열대어들 같은 승무원들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무리를 이끄는 흑표범 같았다.
그가 보는 앞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다. 다정은 급한 마음으로 나연의 뒤를 쫓았다. 가느다란 팔목이 잡힐 듯 가까워지는데 그녀가 결승 테이프를 끊듯 먼저 입을 열었다.
“사무장님.”
억울함 가득한 나연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차례로 돌아갔다.
태상은 느릿하게 눈동자를 내려 무례한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무미건조한 시선이 나연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뒤이어 도착한 다정은 긴장된 숨을 내뱉으며 발끝을 멈춰 세웠다.
피부 위로 와 닿는 묵직한 시선이 느껴지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이 일은 제 손을 떠난 것임을.
“네. 나연 씨, 무슨 일이죠?”
김하나 사무장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고 드릴 일이 있는데 잠시 괜찮으세요?”
“보고요?”
비행이 다 끝나고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이때 보고라니. 게다가 함께 걸음한 다정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다.
김하나 사무장은 알만 하다는 듯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 중 제게도 대놓고 거짓말을 한 나연이다. 그런 그녀가 다른 동료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태상을 향해 가볍게 몸을 돌렸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사무장님께서는 언제 쉬십니까?”
“저도 곧 방으로 올라갈 겁니다.”
“착륙과 동시에 업무는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태상이 다정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꽉 깨문 입술이며 힘없이 바닥을 향하는 고개. 죄인 같은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비행이 끝남과 동시에 업무가 종료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요?”
이 상황을 설명하라는 듯 태상이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희령까지 더해져 상황은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은 잔업이 조금 있는 날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상은 투명하고 일관성 있는 경영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수익을 공평하게 나누는 주주 환원 정책을 펼치는 건 물론이고, 직원들의 요구도 합당한 선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달가워할 리 없다. 그걸 잘 아는 사무장이 대표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보다는 무슨 일인지 알고 싶군요.”
“…….”
“임금도 못 받는 시간에 굳이 일을 하려는 이유가 뭔지.”
태상이 검은 눈동자에 힘을 주며 나연을 바라봤다. 주동자인 네가 입을 열라는 메시지가 다분히 드러났다.
나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무장이 쩔쩔매는 거로 보아 회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 그게…… 선배님들께서 제 말을 무시해서…….”
“고작 그런 이유입니까?”
“아, 아뇨!”
“그럼?”
“지, 집단 괴롭힘 수준이었어요. 저는 그냥 들은 얘기를 전한 것뿐인데…… 무조건 제 잘못이라고, 저한테 막 사과하라고 하면서…….”
기어코 감정이 북받쳤는지 나연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잘게 떨려왔다.
나연은 누가 봐도 팀 내에서 가장 어린 승무원이었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자 어느덧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똑 부러지기로 유명한 김하나 사무장도 나연에게 마음이 살짝 기우는 걸 느꼈다.
“그래서요.”
“네, 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될 거라 믿었는지. 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얼른 설명해 봐요.”
“아, 그, 그게…… 저도 잘은 모르는데…… 선배님이 한 분이 남자친구 덕에 승진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제가 지어낸 얘기도 아니고 전 그냥…….”
“그 말을 전했다.”
“네! 그렇죠. 저는 그냥 말을 전한 것밖에는…….”
“본인 앞에서.”
순간,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김하나 사무장은 눈동자만 겨우 굴려 그를 올려다봤다. 슬쩍 확인한 태상의 옆얼굴은 간이 오그라들 만큼 서늘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연을 찌르듯 바라봤다.
“김하나 사무장님.”
그가 나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한 채 말했다.
“네, 네.”
“오늘 팀원이 총 몇 명입니까?”
“콕핏 승무원(기장, 부기장) 포함 열여섯 명입니다.”
“비행 중 사고가 나면 여러분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열여섯 명뿐인 거, 맞습니까?”
“……맞습니다.”
무게감 있는 그의 말에 사무장의 목소리에 의연한 기색이 서렸다. 태상은 나연의 명찰로 시선을 가볍게 떨어뜨렸다.
“서나연 승무원, 이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관계에서 할 수 있는 행동입니까?”
“…….”
“나연 씨, 부사장님께서 물으시잖아요. 얼른 대답해요.”
“부, 부사장님……?”
나연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태상을 올려다봤다. 젊고 잘생긴 사람이 부사장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젊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나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결국 다시 입을 연 건 태상이었다.
“동료를 소중히 여길 마음이 없다면 이 직장은 서나연 씨에게 맞는 곳이 아닙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의 눈가에서 기어코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리 항공사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서비스보다 마음을 먼저 배워요.”
묵직한 태상의 목소리에 로비에 남아 있던 동료들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소문을 한 번이라도 옮겼던 사람, 듣고도 가만히 있었던 사람.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입을 꾹 다물었다.
태상은 한 걸음 크게 내디뎌 다정의 앞을 가리고 섰다.
커다란 그림자가 순식간에 다정을 검게 물들였다. 조심히 고개를 들자 널찍한 등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순간, 이로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이 빠르게 찾아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곳만큼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확신 같은 것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만.”
“…….”
“제가 아끼는 여자를 상처 입히지 말아 주십시오.”
커다란 로비에 정적이 깔렸다. 다들 집어 마신 숨을 내뱉지도 못하는데 놀란 눈동자만 아우성이었다.
태상은 가볍게 고개를 돌려 사무장을 바라봤다.
“동료들과의 마찰이 있었으니 한다정 승무원은 오늘 다른 호텔에 묵게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태상이 손을 뻗어 다정의 손을 잡았다.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갈까?”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부드러웠다.
“네…….”
집중하는 듯한 태상의 시선이 얼굴에 바싹 따라붙었다. 순간,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걱정했던 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길었던 인내, 분노, 그리고 부탁. 모든 것이 다 저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나 저를 걱정해주는데.
그가 소문을 수습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안에 작게나마 제 자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정은 대답 대신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실었다. 그러자 태상이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제 트롤리를 가져다 끌었다.
동료들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지는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무슨 걱정이요?”
“더는 네가 시달리는 일 없게 다 바로잡을 거니까.”
“…….”
어떻게, 라는 질문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는 수단 따위에 구애받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잠시 망설이던 다정은 걱정 섞인 당부를 건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거야말로 무리였어.”
조금 전 일을 곱씹고 있는지 태상의 턱에 어느새 힘이 꽉 들어갔다. 솟구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그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옥죄어오는 굵은 뼈마디에 놀라 다정이 손을 바짝 움츠렸다. 그러자 아주 빠르게 손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대신 손등 위로 뜨거운 체온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부드럽게 살결을 문지르는 그의 손가락은 마치 사과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같이 놀던 강아지가 미안하면 이랬던 것 같은데. 다정은 동물적인 그의 언어를 또 하나 알게 된 게 기뻤다.
태상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 모습은 본 직원이 카운터 안쪽에서 급히 발을 놀렸다. 말끔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 뛰쳐나온 곳은 VIP 회원 전용 라인이었다.
「차태상 님, 체크인 안 하고 나가십니까?」
「네. 미안하지만 오늘 이 호텔에 머물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러시군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다음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아쉬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