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후배의 급발진 (37/89)


37. 후배의 급발진
2023.02.05.



“…….”

손님이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구경을 하겠다니.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순간, 따스하던 다정의 눈빛이 빠르게 식었다.


“나연 씨, 그게 지금 근무 중인 승무원이 할 소리예요?”

“네? 아, 저는 그냥…….”

그녀가 아랫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작게 웅얼거렸다. 그때, 자리를 비웠던 김하나 사무장이 커튼을 열고 갤리 안으로 들어왔다.

나연을 발견한 그녀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나연 씨? 여기는 무슨 일이죠?”

“아, 저…… 서류, 입국 신고서가 부족해서 가지러 왔어요.”

다정이 쓰려고 놓아둔 서류를 퍼뜩 집어 들며 말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게 거짓말이 아주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누가 퍼스트로 오라고 허락했어요?”

“부, 부사무장님이요. 이거 가져오라고 시키셨어요.”

나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사무장은 알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납함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그녀는 보고서 작성을 하고 오겠다며 다시 갤리를 나섰다.


“와…… 큰일 날 뻔했네.”

“…….”

“선배님, 비밀 지켜주실 거죠? 네?”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제멋대로 일 수 있을까. 다정은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때, 다시 한번 커튼이 열리더니 선배 승무원 희령이 급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연 씨, 여기서 뭐해요. 부사무장님이 찾으시는데.”

“네? 왜요?”

“손님께서 면세품 아직도 못 받았다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아, 맞다!”

나연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녀는 지금 가져다 드리겠다는 말만 남긴 채 쌩하니 갤리를 빠져나갔다.

남겨진 다정은 가볍게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자 말 안 해도 안다는 듯, 희령도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나연 씨, 여긴 왜 왔대요?”

“부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어서 왔대요.”

“참, 나. 이코노미에서 부사장님 잘생겼다고 다들 한마디씩 하니까 고새 보러 왔나 보네.”

희령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나연 씨 진짜 간이 큰 것 같아요. 저 같으면 그냥 신문에서 본 거로 만족하고 말 텐데.”

“그게, 본 적이 없대요.”

“네?”

“경제, 시사랑은 담쌓고 살았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본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 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회사 부사장을.”

“와…….”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회사로 출근하는 직군이 아니다보니 본사 사람들과 접점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인 걸까. 다정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무튼, 또 보러오면 나한테 알려줘요. 그땐 확실히 주의 주게.”

“네. 선배님.”

희령이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다정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갑자기 조용해진 공간 속, 귓가가 진공 상태처럼 편안해지는데 문득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또 보러 와……?’

그 말 한 마디가 가슴 안쪽을 들쑤셔 놓았다.

태상을 구경하러 왔다는 나연의 말을 들었을 땐 그저 그녀의 어설픈 직업의식에 화가 났다. 아무리 신입이라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고.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녔다.

나연이 보고자 했던 건 제가 좋아하는 남자다.

태상을 손님이 아닌 남자로 놓고 생각하자, 뾰족하게 치솟은 마음의 정체가 드러났다. 희미한 질투 혹은, 불안감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객관적으로 말해, 나연은 저보다 훨씬 어리고 예뻤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태도는 이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태상의 주변에 저런 여자는 셀 수 없이 많겠지. 다정은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늘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지만…….’

내가 정말 그에게 특별한 여자인 걸까.

손톱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던 감정이 어느새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다정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새까만 커피를 들이켰다.

***

공항 밖으로 나온 다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에 올라탔다.

호텔에서 보내준 커다란 관광버스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팀원들을 다 싣고도 자리가 남았다.

무난하다면 무난했던 비행. 하지만 수상한 인물에 신경을 너무 쏟은 탓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툭, 창가에 머리를 기대자 입안을 감돌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얘기를 좀 더 해 볼 걸 그랬나…….’

비행 내내 거리를 유지하다 보니 태상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어디서 머무는지, 언제 떠나는지. 가장 간단한 것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비행기가 착륙하고 난 뒤였다.


“다정 씨.”

그에게 연락을 해볼까 싶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네. 사무장님.”

“잠깐 옆에 앉아도 돼요?”

“그럼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혹시 비행 중 실수한 게 있었나 싶어 머릿속이 조용히 바빠졌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다정 씨에게 사과를 해야겠더라고요.”

“네? 사과요?”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

그녀는 직설적이지만 예의 바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주변에서 하도 들은 얘기가 많아서 브리핑 때 말이 너무 거칠게 나왔어요.”

“아…….”

 


‘휴식 중이신 VIP 손님을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김하나 사무장은 비행 내내 다정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태상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팀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까.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감시하듯 따라오는 눈빛이 그랬다.

신분 상승을 노리는 여우 이미지가 덧씌워졌으니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꿋꿋이 버티는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태도가 서서히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왜 말 안 했어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정 씨가 괜히 얼쩡거리는 거 아니라고. 오늘 보니까 얼쩡거리는 건 부사장님 쪽이던데.”

“네? 부사장님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 전에도 부사장님 모시고 비행한 적 있어요. 승무원들 챙긴다고 선물 같은 거 사 오신 적 한 번도 없어요.”

“…….”

“그리고 갤리 안에서 누가 나올 때마다 어찌나 쳐다보시는지……. 내가 나올 때마다 노골적으로 실망하시길래 나중엔 나가기도 꺼려지더라고요.”

“아…….”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인기척이 날 때마다 서늘한 눈매를 번뜩였을 태상을 상상하니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다정은 달콤한 기분에 빠르게 젖어 들었다.


“소문만 믿고 멋대로 오해한 내가 나빴어요. 오늘 같이 일해 보니까 다정 씨 좋은 사람인 거 딱 알겠던데.”

“사무장님…….”

“괜히 면박 주는 리더도 리더라고 오늘 하루 잘 따라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싱긋 한번 웃어 보이더니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이는데 어쩐지 마음속은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다정은 한결 편해진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근거 없는 말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 위로 새살이 돋는 것 같았다.

음악으로 기분을 마저 달래려 이어폰을 귀에 꽂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 몇 개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시내 중심에 다다른 버스가 커다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익숙하게 짐을 꺼내고 계단을 오르자 도어맨이 친절한 미소와 함께 문을 열어 주었다.


 
체크인 데스크 앞에 늘어선 동료들은 삼삼오오 모여 오늘 일정을 의논했다.


“요 앞에 쇼핑몰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 사람?”

“선배님, 1시에 셔틀버스 있는데 그거 타면 10분이면 가요!”

“그래? 아휴, 그동안 난 좀 자야겠다.”

“난 바로 갈 건데, 택시 타고 지금 나갈 사람?”

체크인을 마친 희령이 손을 흔들며 지원자를 찾았다. 하지만 밤샘 비행을 마친 팀원들 중 쇼핑몰 구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정도 슬쩍 시선을 피하며 체크인 카운터로 향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어깨를 붙들었다.


“다정 씨, 여기 몰에 자주 가는 식당 있다며. 같이 안 갈래?”

“네? 아, 저는 피곤해서 그런지 밥 생각이 없네요.”

사실 방에 올라가면 바로 태상에게 전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온 정신이 그에게 쏠려 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거였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둘러대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나연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늘 그렇듯, 그녀는 예의 없음과 귀여움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에이, 다정 선배님은 안 되죠. 오늘 일행 있으시잖아요.”

“다정 씨가 일행이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 비행 중에 어디 갔다 오셨어요? 오늘 다정 선배님 남자친구분 타셨잖아요.”

나연이 애교 넘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미리 말씀을 해 주시죠. 남자친구라서 못 보여주는 거라고. 그럼 저도 안 졸랐잖아요.”

“…….”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지. 황당하고 무례한 추측에 다정의 말문이 콱 막혔다.


“그리고…… 좋은 남자 있으면 저도 소개 좀 시켜주세요. 이코노미에서 일하는 거 지긋지긋해 죽겠단 말이에요.”

또랑또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주변에 다 들리고도 남을 정도로 크고 정확했다.

다정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눈만 간신히 깜빡거렸다. 앞으로 사람들이 뭐라고 수근거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연 씨!”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데 힘이 실린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퍼뜩 고개를 들자 잔뜩 화가 난 표정의 희령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그 말, 무슨 뜻으로 한 거예요.”

“네? 아, 저, 저는 그냥…….”

나연이 어물어물 말을 흐리며 다정의 어깨 뒤로 몸을 숨겼다. 조금 전 제가 욕보인 상대라는 건 벌써 까맣게 잊은 듯했다.

희령이 추궁하듯 따져 물었다.


“그냥 뭐요.”

“그냥…… 딱히 무슨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요…….”

“그런 막말을 아무 생각도 없이 한다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연은 잡고 있던 다정의 팔을 놓고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풀이 죽은 듯 보였지만 앙다문 입술에서 고집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작은 웅얼거림을 흘렸다.


“다, 다들…… 했어요.”

“뭐라고요?”

“다들 그렇게 말했다고요. 저뿐만 아니라.”

억눌린 감정이 느릿하게 입을 비집고 나왔다. 희령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연 씨,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는 거예요.”

“선배님은…… 선배님은 왜 맨날 저만 가지고 뭐라고 하세요.”

“뭐……라고요?”

“비행 중에도 그렇고, 맨날 저한테만 엄격하시잖아요.”

나연이 퍼뜩 고개를 들며 희령를 쏘아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눈동자는 어느새 물기로 살짝 흐려져 있었다.


“하, 기가 막혀. 본인이 잘못한 건 모르겠고 여전히 남들만 나빠요?”

“저…… 선배님.”

그때까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다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진작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선배가 하는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어 가만히 있었던 거였다.


“저는 괜찮으니까 그만 하세요.”

“괜찮을 게 따로 있죠. 기본 예의도 안 지키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두고 봐요.”

“그렇긴 한데…….”

희령의 말은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다정은 그저 이 소란이 더 커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애타는 시선이 조용히 나연에게 향했다.


“나연 씨, 얼른 선배님께 사과드리세요.”

“……제가 왜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