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녹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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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녹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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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녹을 것 같아
2023.02.02.
안을 들여다보자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들이 잔뜩이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게 온갖 종류의 디저트가 다 들어 있는 듯싶었다.
“혼자 먹긴 너무 많아요. 이것도 같이 먹어야…….”
“…….”
“아, 아니에요. 저 혼자 먹을게요.”
따갑다 못해 아픈 시선이 느껴져 다정이 얼른 말을 바꿨다.
식당에서도 그렇고 왜 자꾸 이렇게 많이 먹이려 하는 건지.
말이 적은 이 남자에게 뭘 먹인다는 건 나름의 의사소통 같은 걸까. 그런 추측이 들자 함부로 거절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어 보이며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답이었는지 그의 미간에 잡혀 있던 실금이 스르르 풀어졌다.
다정은 쇼핑백을 수납공간에 넣으려 몸을 돌렸다. 순간, 대충 넘겨들었던 그의 한 마디가 화살처럼 머리를 스쳤다.
‘동남아 음식을 좋아하나?’
“…….”
설마 도착 후에도 또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는데.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함과 동시에 미소가 바싹 말랐다.
***
이륙 후 가장 바쁜 첫 번째 서비스 시간.
두 명밖에 손님이 타지 않은 퍼스트 클래스는 평소보다 한가했다. 게다가 태상은 식사 대신 커피만 한 잔만 주문한 터라 더더욱 할 일이 없었다.
“다정 씨, 아메리카노 준비 다 됐어요?”
“네. 됐습니다.”
“저는 기장실 들어가 봐야 하니까 다정 씨가 서빙 좀 해줘요.”
“네.”
씩씩하게 답을 마친 다정은 트레이를 들고 객실로 들어섰다.
태상의 자리는 프라이버시 도어가 반쯤 열린 상태였다. 벌어진 미닫이문 틈으로 보이는 건 끝을 모르고 쭉 뻗은 그의 기다란 다리였다.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 좁아 보일 수도 있구나.
태상의 우월한 신체 조건에 새삼 놀라는데 맞은편 좌석의 프라이버시 도어가 갑자기 열렸다.
손님이 먼저 문을 연다는 건 보통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정은 이어질 호출을 예상하며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아무런 부름이 없었다.
“……?”
분명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이었는데.
마냥 문을 열어놓기만 하는 손님이 의아해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순간, 힐끔거리며 곁눈질을 하던 남자와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작게 움찔하더니 이내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저…….”
“네. 손님.”
“화장실이 어딥니까?”
“앞쪽에 두 군데 있습니다.”
다정이 상냥하게 웃으며 기내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정은 커피를 든 트레이를 제 몸 쪽으로 끌어당기며 좌석 도어에 등을 바싹 붙였다. 덕분에 널찍해진 복도로 남자가 편안히 발을 내디뎠다.
“감사합니다.”
“네.”
고개를 살짝 숙이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은 태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미간을 바싹 좁힌 채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보기엔 눈빛이 너무 매서운데.
남자는 기내 앞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탐색이라도 하는 듯한 태상의 시선이 여전히 그를 따랐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태상을 불렀다.
“부사장님……?”
태상은 움찔하며 뾰족한 시선을 거둬들였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속눈썹 너머로 고민하는 기색이 어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
몇 번의 느릿한 깜빡임 후, 그가 조각 같은 입술을 짧게 움직였다.
“한다정.”
“네?”
“이제 내 와이프 맞지.”
“가,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저돌적인 남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트레이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지금부터 애틋해져야 할 것 같아서.”
“우리가 애틋해져요……?”
태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멀찍이 시선을 던졌다. 눈동자를 따라 굴리자 남자 승객이 들어간 화장실이 보였다.
“저 남자는 손님이 아니야. 우리 둘을 감시하려고 탄 거지.”
“네? 감시요? 어, 어째서…….”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잡으려고.”
“…….”
증거를 잡는다니. 누군가에게 의심이라도 받고 있다는 뜻일까. 순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그러니까 잠시만 날 진짜 연인처럼 대해줘.”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달칵.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데 금속성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정은 어깨를 움찔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언제 문을 열고 나왔는지 남자가 커다란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1분도 채 안 되어 화장실에서 나오는 거로 보아, 손만 급하게 씻고 바로 나온 듯했다.
다급함의 원인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일까.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벌써 가까웠다.
다정은 긴장을 집어먹은 채 조용히 앞만 응시했다. 바짝 서는 목덜미의 털이 그의 시선이 제게 닿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의심을 풀기 위해 연인인 척을 하라는 뜻인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비행기 안이다. 일터라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이 온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아…… 커피.’
불안한 시선이 좌우로 흔들리는데 손에 들고 있는 트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태상의 말에 놀라 들고만 있던 아메리카노였다.
다정은 최대한 친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커피, 자리에 놓아 드릴게요.”
애틋함이라고는 쌀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생각이 점점 엉망으로 꼬여가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스몄다.
“여기면 돼.”
태상이 창 밑에 위치한 사이드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접혀 있는 메인테이블을 여는 건 간단하지만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투박한 행동 위로 자상한 의도가 고스란히 덧대어졌다.
다정은 애써 긴장을 지우며 그의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뜨,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트레이를 내려놓자 태상이 머그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데.
“앗!”
방향을 튼 커다란 손이 멀어지는 팔목을 가볍게 잡았다. 가느다란 뼈대가 두툼한 손바닥 안에 폭 감겼다.
태상은 엄지손가락으로 팔목 안쪽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눈 녹듯 부드러운 촉감이며 팔딱거리는 연약한 맥박. 손끝에 묻어나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한동안 다정의 손목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잘 마실게.”
태상이 미끄러지듯 손을 타고 내려오며 말했다. 아쉬운 듯, 기다란 손가락은 머뭇거리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네, 네…….”
애틋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절절하게 와 닿는 느낌이었다.
덕분일까. 없던 용기가 생겨버린 다정이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손바닥 안에 만들어진 좁은 공간에 그의 엄지손가락이 꽉 들어찼다.
태상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띤 채 다정을 올려다봤다. 어서 입도 떼어 보라며, 집중하는 듯한 시선에서 무언의 재촉이 느껴졌다.
다정은 달아오른 얼굴로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태상 씨.”
“…….”
순간, 태상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근무 중인 상황인데 제가 너무 경솔했을지도 모른다.
성난 듯 잔뜩 부풀어 오른 그의 가슴을 본 다정은 재빨리 손을 뒤로 당겼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건 말건 이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더…… 더 필요하신 거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다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황급히 그의 좌석을 빠져나오는데 이쪽을 보고 있던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괜히 딴청을 부렸다.
다정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애잔한 스킨십도, 처음 불러 본 그의 이름도. 낯선 행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심장이 어찌나 크게 뛰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렸다.
불현듯 멈춰 선 다정은 두 손으로 소중히 가슴을 눌렀다. 심장이 그에게만 반응하는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
애잔한 커피 서빙을 마친 후, 다정은 최대한 객실로 나가는 걸 삼갔다.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만 가는 것 같았다. 창문 가리개를 슬쩍 열고 밖을 내다보는데 어두운 밤하늘은 오늘따라 볼 게 별로 없었다.
붙박이장처럼 갤리에 남아 있기를 한참, 다정은 커피를 새로 한 잔 내리고 연신 시계를 들여다봤다. 착륙까지는 아직도 2시간이나 남았다.
‘서류가…….’
다시 바빠지기 전에 입국 서류를 작성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반에서 기다란 종이 한 장을 빼내는데, 옆에 있는 커튼이 빠르게 열렸다.
팔랑이는 천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애교 넘치는 후배 나연이었다.
“선배님.”
“아, 나연 씨.”
나연은 입사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주니어 크루였다. 그녀는 갤리 안을 슬쩍 훑어보더니 안쪽으로 조심히 발을 들였다.
“사무장님…… 안 계시죠?”
“네. 안 계시긴 한데…….”
다정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곤란한 듯 말했다.
비행 중 상위 클래스를 함부로 드나드는 건 규정 위반에 해당했다. 게다가 손님들이 조용히 잠을 자야 하는 밤 비행에서는 더더욱.
기본적인 사항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마음대로 어기는 건지. 둘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어 다정의 표정이 애매하게 찌푸려졌다.
“선배님, 저 잠깐만 퍼스트에 있다가 가면 안 돼요?”
나연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살짝 눈썹을 꺾으며 불쌍한 척까지 하는 게 몰라서 실수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다정은 다그치기보다 차분히 설득하는 편을 택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냥?”
“그냥 구경이 좀 하고 싶어서요.”
“아…….”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다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같은 비행기 안이라고 해도 상위 클래스는 기내 환경이며 서비스가 이코노미와 완전히 달랐다. 때문에 신입 승무원들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가끔 이렇게 퍼스트를 찾곤 했다.
저도 한때 그랬으니까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다정은 너그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타일렀다.
“궁금한 건 알겠는데요, 나중에 랜딩하고 다시 와요. 지금은 손님들 계시니까 둘러볼 수가 없잖아요.”
“아뇨. 궁금한 건 그 손님인데요?”
“……네?”
다정이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들여다봤다.
“오늘 타신 손님 중에 우리 회사 부사장님 있다고 했잖아요. 되게 잘생겼다던데 저 슬쩍 한 번 보면 안 돼요? 너무 궁금해서요. 자리 어딘지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