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너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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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너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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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너만 먹어
2023.01.29.
태상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의 손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계속 다정의 어깨에 얹어진 맹랑한 손이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민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구겨져 있던 그의 미간이 조금씩 펴졌다.
실수로 지뢰라도 밟은 사람처럼 민준은 슬금슬금 다정의 곁에서 멀어졌다.
“네, 네에……. 그렇죠. 주의하겠습니다.”
태상은 그를 바라보는 딱딱한 시선을 유지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민준은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이고 도망가듯 걸음을 옮겼다.
식당 내 모든 사람은 그 움직임에 맞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다들 진지하게 식판만 바라보는 게 혹시 모를 불똥에 대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정은 딱딱해진 주변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러면 직원들이 앞으로 부사장님 주변으로는 다가오지도 않을 거예요.”
“그 정도는 감수하도록 하지.”
태상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아! 잠시만……!”
말릴 새도 없었다.
그는 제 식판 위의 제육볶음을 푹 퍼서 다정의 식판에 옮겼다. 산처럼 쌓인 고기는 결국 균형을 잃고 밥 위로 쏟아져 내렸다.
“너무 말라서.”
“아…… 이걸 누구더러 다 먹으라고…….”
다정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며 태상을 살며시 노려봤다. 태상은 그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어서 먹으라는 듯 식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살찌면 유니폼도 안 맞는단 말이에요.”
다정이 젓가락으로 제육볶음을 뒤적거리며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다시 맞춰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이따 랜딩 하고 맛있는 거 먹으려고 했는데…….”
“동남아 음식을 좋아하는 건가?”
“네. 엄청 좋아하…….”
순간, 다정이 멍한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말하는 투로 보아 스케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대놓고 날아오는 반말이었다.
“저 어디 가는지 아세요? 아니, 잠깐만요. 그보다 왜 갑자기 반말이세요?”
툭툭 말을 던지기는 했어도 대놓고 말을 짧게 하지는 않던 태상이었다.
갑자기 왜. 혹시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하대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싫다는 표정인데.”
“싫다기보단…… 갑자기 왜 그러시나 해서요.”
“반말하면 더 내 거 같으니까.”
순간, 단단하게 굳어 있던 태상의 눈동자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쿠알라룸푸르 비행이 예정된 13번 브리핑 룸.
“죄송합니다!”
다정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브리핑이 시작되려면 아직 5분이 남은 시간. 하지만 승무원의 세계에서 지각이란 ‘선배들보다 늦는 짓’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리핑 룸에 도착한 다정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다정 씨, 다음부터는 조금 더 일찍 다니세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사무장님.”
주변의 눈치가 보여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밥을 다 먹다 보니 평소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다정은 속으로 ‘무개념 배식남’을 탓하며 잽싸게 끝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다 모였으니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김하나 사무장이 태블릿 PC를 토도독 두드리며 말했다. 다정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핸드백을 열어 브리핑 다이어리를 꺼냈다.
편명, 비행시간, 탑승 승객 수.
기본 정보 공유가 끝나자마자 사무장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퍼스트 클래스에 VIP께서 탑승하십니다. 이메일로 온 사항 다들 숙지하셨죠?”
“네.”
“…….”
홀로 입을 열지 못한 다정은 이대로 조개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갑작스레 투입된 승무원인지라 운영팀이 정보를 미처 공유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사무장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다정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한다정 씨?”
“죄송합니다. 저는 이메일을 받지 못해서요. 브리핑 끝나고 숙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합류한 게 다정 씨인가요?”
“네.”
그런 게 아닌 거였다면 아마 뼈도 추리지 못했겠구나.
다정은 뾰족하게 올라간 사무장의 눈썹을 보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깐깐한 만큼 공평한 성격인 사무장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바로 업무 전달에 들어갔다.
“그럼 지금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죠. 다들 알다시피 우리 항공사의 부사장님께서 오늘 VIP로 탑승하십니다.”
“…….”
역시 그랬구나.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 어디를 가는지 알고 있는 듯한 말투. 혹시나 했던 생각이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건 앞뒤 상황뿐이었다.
쉴 시간도 없이 바쁜 그가 관광을 갈 리는 없고 분명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방문일 텐데. 굳이 저를 데리고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참 딴생각에 잠겨 있는데 사무장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조용하게 비행하시는 걸 선호하시니 갤리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합니다. 알레르기 있는 식품은 따로 없고 와인은 보르도를…….”
다정은 사무장의 말을 따라잡으려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남편 될 사람에 대한 정보를 브리핑에서 받아 적는다니. 사각사각, 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사이로 옅은 한숨이 섞여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정의 노트가 필기로 빽빽해졌을 때 즈음, 사무장이 말을 뚝 멈췄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그녀는 모두를 한번 쓱 훑어봤다.
“휴식 중이신 VIP 손님을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라……?’
압정으로 내리꽂는 듯한 시선이었다.
다정은 제발 날 보는 게 아니기를, 하는 마음으로 슬쩍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왼쪽은 텅 빈 의자였고 오른쪽에 앉은 건 남자 승무원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한다정 씨?”
“네?”
“대답이 없으시네요?”
“네, 네……. 유념하겠습니다.”
떠도는 소문이 그새 또 부풀려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과장된 건지. 당사자 앞에서는 입을 열지 않으니 다정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럼 이동하도록 하죠.”
김하나 사무장의 단호한 한 마디를 끝으로 브리핑이 종료되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 고소하다는 눈빛.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온갖 감정이 따갑게 몸에 와 닿았다.
오늘 비행도 쉽지 않겠구나. 다정은 그런 슬픈 예감과 함께 브리핑 룸을 나섰다.
***
손님 맞을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비행기 안.
다정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미래의 남편을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번엔 무슨 폭탄을 터뜨릴지, 또 얼마나 사람을 당황하게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정맥이 올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탑승을 환영합니다.”
김하나 사무장이 고급스러운 ‘솔 톤’으로 첫 번째 탑승객을 맞이했다.
다부진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눈을 한 남자였다. 그는 비행기에 발을 들이자마자 사무장과 다정의 이름표를 번갈아 확인했다.
깐깐징어로구나.
비행 시작 1초 만에 이름을 스캔 당한 다정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손님일수록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다정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사무장에게서 손님을 인계받았다.
“제가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탑승권을 확인하는데 의외의 좌석 번호가 찍혀 있었다.
SEAT 1E.
그의 좌석은 창문을 끼지 않은 중간 자리였다. 예약이 꽉 찬 날도 아닌데 굳이 중간 자리를 발권하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손님, 오늘 여유 좌석이 많은데 창가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
“됐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냉랭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말투에 순간 당황했지만 다정은 우아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남자는 뒤늦게 변명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창가 자리를 싫어합니다.”
“그러셨군요. 오늘은 난기류도 없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정이 상냥하게 말하며 남자의 좌석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불안해서 주위를 살핀다기보단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에 더 가까웠다.
“샴페인이나 주스, 음료 좀 준비해 드릴까요?”
“물이면 됩니다. 그보다 오늘 승객은 몇 명이나 탑니까?”
“손님을 포함해서 총 두 분입니다.”
“그래요? 나머지 한 명 자리는 어딥니까?”
“그건…….”
어차피 몇 분 후면 알게 될 텐데 굳이 왜. 다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볍게 스쳤다. 그러자 그 뜻을 읽은 남자가 자연스레 설명을 덧붙였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옆자리가 비었으면 해서요.”
그가 오른쪽에 나란히 붙어 있는 1F 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정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단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다른 손님께서는 왼쪽 창가 자리에 앉으실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그가 창가 자리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데 통로를 끼고 있어 한 발자국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생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대화를 마친 다정은 갤리로 돌아와 유리잔을 꺼냈다. 생수 한 병을 따서 컵에 물을 따르는데 탑승구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왔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진지한 듯 무표정한 얼굴. 클래식한 디자인의 슈트를 각지게 차려입고 탑승교를 건너는 태상의 모습은 패션 잡지에 등장하는 모델이 따로 없었다.
다정은 근무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른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태상은 금세 탑승구 앞에 다다랐다.
그는 한 손에 면세점 로고가 찍힌 쇼핑백과 서류 가방을 든 채 가볍게 기내로 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사무장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태상을 맞이했고 다정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별건 아닙니다만.”
태상이 쇼핑백을 내밀며 단출하게 말했다. 살짝 벌어진 틈 안으로 보이는 건 선물용 초콜릿이었다.
회사 관계자들은 비행기에 탈 때 승무원들에게 줄 간식이나 선물을 들고 타곤 했다. 훌륭한 서비스에 대한 감사 인사이자 일종의 깜짝 이벤트였다.
사무장은 그의 뜻을 빠르게 이해하고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들 좋아할 거예요.”
태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익숙하게 기내로 향했다.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좌석을 혼자 못 찾을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다정은 바삐 걸음을 놀려 앞장서 걸었다.
자리에 도착한 태상은 먼저 사이드 테이블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가방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또 하나의 쇼핑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에 사무장에게 건넨 것과는 다른 브랜드의 봉투. 그는 쇼핑백을 앞으로 내밀며 빤히 눈을 맞춰왔다.
“이건 네 거.”
“……네?”
“이건 너만 먹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