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그 손, 치워주시겠습니까? (34/89)


34. 그 손, 치워주시겠습니까?
2023.01.26.


석상 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건 바들바들 떨리는 눈동자뿐이었다.

뭘 알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추측을 부풀리는 건지.

진의를 파악하려는 그녀의 눈동자가 아들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수빈아, 누구한테 그런 헛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하, 이거 또 걸작이네.”

“뭐……?”

“누구긴. 엄마지, 누구야.”

“…….”

감정의 진폭이 커서 항상 과장이 섞여 들어가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즐기는 아이는 아니었다. 명옥의 얼굴이 무서운 추측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그러자 수빈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책상 맨 위 서랍을 열었다.


“이거 봐. 아직도 못 고쳤잖아.”

“…….”

드르륵, 하고 열린 서랍 안에는 반쯤 남은 위스키 한 병과 작은 유리잔 하나가 들어 있었다. 수빈은 가벼운 동작으로 위스키를 따라 입에 툭 털어 넣었다.

어지간히 독했는지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에 선명한 금이 갔다.


“내가 엄마 술 끊으라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노래를 불렀잖아. 그게 엄마 건강을 걱정해서였을 거 같아?”

“…….”

“그럴 리가.”

수빈이 유리잔을 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어, 언제,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몰라. 너무 어릴 때라 나도 잘 기억 안 나. 그냥 엄마가 술 취해서 신나게 주절거렸다는 거 빼고는.”

명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빈에게 달려들었다. 어깨를 부여잡는 손길이 살갗을 파고들 듯 억셌다.


“수빈아! 엄마 말 잘 들어. 다 지난 일이야.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 지하에 묻힌 차태상 아빠한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마, 말하려고 했어! 말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이가 갑자기 그렇게 가버리는 바람에…….”

“…….”

꾸욱.

유리잔을 들고 있는 수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힘줄이 돋아나고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이대로 두었다간 잔이 깨져버릴 것 같았다.

명옥은 황급히 수빈의 손을 붙잡았다.


“얘! 이거 좀 놔! 놓고 얘기하자. 응?”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아니야! 수빈아, 진짜야. 진짜 말하려고 했다니까!”

팍!

힘을 견디다 못한 유리잔이 결국 수빈의 손안에서 박살이 났다. 예리한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 드는데 수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배어 나온 피가 손바닥 안의 주름을 따라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홍빛 상처의 색이 너무 연해졌다는 듯. 붉은 피는 팔목의 상처를 새롭게 물들이며 지나갔다.


“수빈아, 제발 그만해!”

“한 번만 더 그 입으로 거짓말하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수빈이 거칠게 유리 조각을 내던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상처 입은 짐승이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비명 같은 목소리였다.


 

***

에어 코리아 승무원들이 공항으로 가기 전 반드시 들르는 브리핑 타워.

다정은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으로 말레이시아행 항공편을 운항하게 되었다. 원래 가기로 되어 있던 비행보다 출발이 한 시간이나 늦어 갑자기 여유라는 것이 생겨 버렸다.

손목을 흘끗 들여다본 다정은 구내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내려가 단말기에 카드를 찍자 삐빅, 하는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는데 예상치 못한 소리가 평온을 깨뜨렸다.


“어머, 다정 씨! 어떻게 된 거야?”

“아, 선배님.”

식판을 든 채로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리자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화영이 눈에 들어왔다. 컴플레인이 있었던 비행을 같이 한 이후로 처음 보는 자리였다.


“벌써 징계 풀렸어? 난 이제 다정 씨 한동안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한데 그녀는 배려 없는 데시벨로 다정의 회사 생활을 공개했다. 다정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징계 안 받았어요.”

“정말? 어떻게? 징계위에서 아주 작정하고 달려든 것 같던데? 메일에 전화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나야 뭐 다정 씨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네, 네. 감사해요. 선배님, 배 안 고프세요?”

다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잘못한 건 없다지만 징계위 내용이 사내 방송처럼 흘러나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아무튼 별일이네. 인사과에서 이렇게 요란 떨면 보통 좋게 안 끝나던데……. 다정 씨 무슨 대단한 백이라도 있어?”

“아, 아뇨. 그런 게 있을 리가…….”

“먼저 떠도 되겠습니까?”

다정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데 긴 다리 하나가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우뚝 서 있는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화영을 내려다봤다.


“어……? 부, 부사장님?”

화영의 한 마디에 구내식당이 술렁거렸다. 가만히 있어도 이목이 집중되는 외모인데 ‘부사장’이라는 타이틀까지 더해지자 그의 존재감이 몇 배로 커졌다.

화영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 부사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누가 그러더군요. 직원 식당은 복지의 첫걸음이라고, 꼭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시선이 천천히 다정에게 향했다. 말간 얼굴에 고정된 눈동자는 한동안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다정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화영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그러셨구나. 누가 그런 좋은 말씀을 했대요? 호호호. 그쵸, 다정 씨?”

“네? 네…….”

다정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상이 그 앞을 자연스럽게 가리고 섰다.


“아직 계산을 안 하신 것 같은데 먼저 떠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요. 맛있게 드세요…… 두 분 다.”

화영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끝에 악센트를 찍었다. 키오스크 기계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화영이 사라지자마자 다정이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으러 왔습니다.”

“여기 직원들 구내식당인 거, 아시죠?”

“저도 직원입니다.”

태연하게 말을 마친 태상은 가볍게 주걱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다정의 식판에 산더미 같은 양의 밥을 퍼 담았다.

누가 보면 태릉 선수촌이라고 착각할 만한 양에 다정이 질색을 하며 도리질을 쳤다.


 


“이,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많이 먹는다고 돈 더 내는 거 아닙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앗, 잠깐만요! 제가 뜰게요.”

태상이 밥에 이어 국까지 뜨려고 들자 다정이 화들짝 놀라 그의 손에서 국자를 빼 들었다.

표면을 스치듯 가볍게 한번. 적당량을 떠서 담는데 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눈치를 보자 태상이 딱딱한 표정으로 식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정은 국자를 최대한 멀찍이 내려놓고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원래 국을 많이 안 먹어서…… 아, 안 돼!”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 태상이 국자를 통 속으로 푹 집어넣었다. 텅, 하고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곧, 국물과 건더기로 가득 찬 국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묵직해진 국자를 조용히 내밀었다.


“진짜 다 못 먹는데…….”

작게 혼자 웅얼거려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잔말 말고 어서 담으라는 매서운 눈빛뿐이었다.

다정은 옅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국자를 받아들었다. 저런 눈빛에 대드는 건 백 번 다시 태어나도 못 할 것 같았다.

식판을 가득 채우고 홀을 가로지르는데 수백 개의 시선이 피부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정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빈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앉으려던 사람들이 갑자기 유턴을 하며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널찍한 식탁에 혼자 앉은 다정은 긴장된 표정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제 앞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데도 자리 많은데요.”

“여기가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태상은 어서 먹으라는 듯 다정과 식판을 번갈아 봤다.

꿀꺽.

머슴도 이렇게는 안 먹을 텐데. 인생 최대의 챌린지를 앞둔 다정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스쳤다.

넘치기 직전의 밥과 국. 장정 셋이 먹고도 남을 만큼 수북이 쌓인 제육볶음.

본의 아니게 직원 식당의 비양심 빌런이 된 다정은 제육볶음 세 점을 한꺼번에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맛있습니까?”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태상이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네. 원래 제육볶음 좋아해요.”

“제육볶음, 매일 나왔으면 좋겠습니까?”

“네? 네. 그럼 좋겠…….”

아무 생각 없이 헐렁하게 대답하던 다정이 순간, 급하게 입을 꽉 다물었다.

보육원 부지를 지키겠다고 재개발 구역 전체를 사들인 남자다. 자칫 잘못했다간 직원들이 1년 365일 제육볶음의 망령에 시달리게 될지도 몰랐다.


“아뇨! 그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정말입니까.”

“네. 그럼요. 어쩌다 한번 먹는 정도예요.”

태상이 이마에 실금을 잡은 채 묻자 다정이 급히 거짓말을 보탰다. 그러곤 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긴 정말 왜 오신 거예요?”

“한다정 씨가 오라고 해서 온 겁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짠한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를 구내식당으로 초대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직원들이 없는 신사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태상도 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남자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설마 사람들 보라고 이러시는 건 아니죠?”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회사에서는 제발 참아주세요. 소문이 얼마나 빨리 나는…….”

다정이 두 손을 맞잡고 간절함을 피력하던 그때, 순둥한 얼굴의 남자 승무원이 활짝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 다정아! 오랜만이네.”

“아…… 민준 오빠.”

주변이 텅 비어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인데. 눈치도 사회 경험도 부족한 동기 민준이 겁 없이 합석을 시도했다.


“여기 자리 비었어?”

“네. 비었어요.”

“안 비었습니다.”

두 개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다정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태상을 바라봤다.

눈썹에 최대한 힘을 주고 큰 눈을 바쁘게 깜빡깜빡. 모스 부호 버금가는 눈치 주기였지만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사적인…… 얘기?”

당황한 민준은 식판을 들고 남자의 얼굴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놀라움과 의아함이 번갈아 피어났다.


“어? 혹시…….”

“맞습니다.”

“아니, 여기는 왜……? 야, 다정아, 너 아는 사이야?”

민준이 한 손으로 다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상의 미간이 순식간에 와락 구겨졌다. 아까부터 친근하게 다정아, 다정아. 살갑게 부를 때마다 화가 치밀었는데 이젠 정말 참아줄 수가 없었다.

태상은 새까만 눈을 무섭게 빛내며 그를 노려봤다.


“아는 사이가 아니라 사귀는 사이입니다. 그 손, 치워주시겠습니까?”

“……!”

순간, 구내식당 전체에 메아리 같은 울림이 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