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상처 입은 짐승
(33/89)
33. 상처 입은 짐승
(33/89)
33. 상처 입은 짐승
2023.01.22.
다정을 바래다주고 다시 회사로 향하는 차 안. 태상은 술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었다.
‘하고…… 싶어요.’
그 달콤한 한 마디가 귓가를 끊임없이 간질였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져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이라는 변명 뒤에 숨어 그녀를 제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
태상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채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함께 맞을 아침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힐 듯 좋았다.
톡톡.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즐거운 리듬감이 어렸다. 내일이 오는 게 기다려지는 건 살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는 달콤한 상상을 끝마치고 부드럽게 눈을 떴다.
바쁘게 길을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재킷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벌써……?’
발신인은 김 비서일 것이다. 태상은 그렇게 확신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말씀하신 대로 희망원에 대한 지원을 서류로 구체화했습니다. 확인 마치시면 공증 절차 받도록 하겠습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서류였다. 태상은 나른한 눈동자로 화면을 한번 훑고 그렇게 하라는 답장을 보냈다.
이제 위자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류만 따로 작성하면 그녀를 온전히 붙잡아 둘 수 있다.
분명 모든 게 간단한데. 서류가 모든 걸 그렇게 말해주는데.
그런데…….
‘한 가지만 더요. 우리 서로 선은 지키기로 해요. 헤어질 때 감정 상할 일 없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며 표정이 똑 부러지기 이를 데 없었다. 가슴을 할퀴는 한 마디를 곱씹는 동안 태상의 눈매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아무리 끝이 정해져 있다 해도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끝을 늦출 순 없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순간을 안 오게 할 수는 없을까.
그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꺾으며 답 없는 문제를 홀로 되뇌었다.
***
평창동 본가는 쭉쭉 뻗은 소나무가 외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조경수치고는 다소 뾰족하고 높은 모양새. 차 회장은 제 성품을 닮은 이 풍경을 퍽 좋아했다.
그는 향긋한 차를 들이켜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태상의 결혼 문제까지 해결되어 모든 것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한때였다.
“아버님, 기사 봤어요. 태상이가 또 결혼을 한다니 이게 다 무슨 얘기예요?”
차 향기만 가득한 공간에 뾰족한 목소리가 높게 울렸다. 명옥은 시폰 소재가 너풀거리는 블라우스를 휘날리며 차 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사 그대로다. 식은 내달 말이고.”
“내달 말이요? 아니, 이렇게 서두르실 거 없잖아요. 아버님, 남들 보면 욕해요. 대성이랑 혼담 깨진 지 얼마나 됐다고…….”
“서두를 이유가 없긴 왜 없어. 결혼 문제가 빨리 해결이 되어야 내 회사를 편히 넘겨줄 게 아니냐.”
“…….”
시집와서 지금껏, 반찬 밑간부터 가구 하나 새로 들이는 것까지 언제나 차 회장의 취향이 우선이었다.
고집이라면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명옥에겐 꽤 잔인한 일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 아들은 투명 인간 취급을 하며 태상만 끼고 도는 차 회장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명옥은 분노로 달달 떨리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번엔 또 어느 아가씨 앞길을 망치려고 이러세요. 두 번째라고 태상이가 다르겠어요?”
“다르지. 이번엔 제가 데리고 온 처자니까.”
“네? 태상……이가요?”
“그래.”
“…….”
의심에 가득 찬 눈동자가 도르륵 소리를 내며 굴렀다. 명옥이 아는 한 태상의 주변에 여자는 없었다. 백 번 양보해 누군가 있다 치더라도 그가 제 스스로 결혼을 하겠다 할 리 없고.
명옥은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태상이, 거짓말하는 게 분명해요.”
“거짓말할 게 없어 어디 그런 거로 거짓말을 해.”
“태상이는 그러고도 남을 노…… 크, 크흠. 그렇게 노력을 해도 쉽게 고쳐지는 병이 아니라 이거죠.”
“제 마음을 고쳐줄 만한 여자를 만난 게지.”
“…….”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느라 명옥이 고개를 떨궜다.
그동안 태상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본 건 차 회장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치료를 갈 때마다 명옥은 잘 훈련된 사냥개 마냥 그의 뒤를 쫓았다.
상담 내용이며 약물치료 과정, 경과보고까지. 명옥은 뒤에서 태상의 상태를 낱낱이 보고받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의 상태를 낫게 할 여자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순간, 명옥의 눈동자에 가느다란 빛 한 줄기가 어렸다.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버님, 만약 태상이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결혼이고 뭐고 다 가짜로 하는 눈속임이었다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없겠지만……?”
“이번에도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지 못한다면 자리를 물려주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봐야지.”
차 회장이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애초에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손주의 눈에서 본 진심. 그것은 꾸며낼 수도, 억지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명옥이 태상의 자리를 탐하는 건 알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승산이 없었다.
***
노란 햇볕이 부드러운 주황빛으로 바뀌어 가는 시간.
명옥은 신경질적으로 액정을 두드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화면에 떠오른 ‘아들’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눈빛이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명옥이 불만스럽게 뇌까리며 집무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묵직한 문이 빠르게 열리는데 멀리 떨어진 의자 위로 비죽이 솟아오른 머리 하나가 보였다.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한가롭게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이러고 있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남자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명옥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핸드폰을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니니.”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엄마, 오랜만.”
다리로 바닥을 찍어가며 의자를 돌린 남자는 거의 눕다시피한 자세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명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손을 짚었다.
“차수빈, 이리 와서 똑바로 앉아.”
“잠깐만. 나도 본부장 기분 좀 내볼래.”
“뭐? 기분을 내? 자리에 앉혀 놓으려고 죽어라 붙잡을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인제 와서 뭐가 어째?”
명옥이 책상 위에 핸드백을 거칠게 올려놓으며 말했다.
수빈은 제 속으로 낳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이였다. 흥미를 보이다가도 싫증을 내는 게 일상다반사였고 남들 같은 성취욕도 없었다.
게다가 효성 그룹 차남씩이나 되어서 기껏 한다는 일이 새 촬영 전문 사진가라니. 찍히는 새가 다 비웃을 일이었다.
“예쁜 얼굴에 주름져요. 화는 할머니 되어서 내도 늦지 않아.”
“너는 정말…….”
“에이…… 잔소리만 할 거면 나 그냥 가고.”
수빈이 또 능청스럽게 속을 긁어 재꼈다. 한껏 내민 입술이며 동그랗게 뜬 눈이 꽤 순진해 보였지만 이런 얕은 속임수에 넘어갈 명옥이 아니었다.
“어디서 또 수작이야. 너 이번엔 잔말 말고 한국에 박혀 있어.”
“왜요? 형 결혼 때문에?”
“……멀리서도 듣는 귀는 있나 보네.”
“잘난 형 소식이야 뭐 세상 어디서든 들리지.”
수빈이 또 한 번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명옥이 못 참겠다는 듯 빠르게 다가가 의자 팔걸이를 꽉 눌렀다.
“…….”
뭘 어쩌라는 거냐는 듯한 도전적인 눈빛이 명옥을 향했다. 치켜뜬 두 눈에서 억눌린 분노가 일렁였다.
“차태상이 잘났으면 너는 네 자리를 더 잘 지키고 있어야지. 왜 자꾸 싸돌아다녀.”
“나야 뭐…… 엄마가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너 지금 그게……! 수빈아,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명옥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그러자 수빈이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밀치며 팔로 만든 작은 감옥에서 벗어났다.
“또 할아버지 얘기야?”
“알면서 뭘 물어.”
“아양 떠는 거 싫어.”
“아양? 잘못하다간 그룹 전체가 다 태상이한테 다 넘어가게 생겼는데 그런 말이 나와?”
깨질까, 엇나갈까 유리 인형 대하듯 싸고 돌던 아들이었다. 천 번 속으로 화를 삭이고 밖으로 한 번 내지를 정도로.
하지만 지독할 만큼 변한 게 없는 아들의 태도 앞에 인내심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차태상 하는 거 반만 닮아봐. 결혼이라니? 자기 여자 앞에서도 문제없다고, 정신머리 말짱하다고, 할아버지 보란 듯이 시위하는 거 아냐.”
“아닐 수도 있지. 그 여자라면 진짜로 괜찮은 건지도…….”
“아니, 얘가 왜 이렇게 한가해! 지금 네 처지가…… 헙!”
순간, 명옥이 빠르게 입을 가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본인도 당황한 듯싶었다.
“…….”
“수, 수빈아. 그러니까 엄마 말은…….”
처지. 별거 아닌 이 한 마디는 수빈의 앞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다가올 폭풍을 예상한 명옥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그, 그러니까 엄마 말은 우리가 조금 더 현명하게 굴어야 한다 이거야. 다른 뜻은 없고…….”
와장창!
나른하고 조용한 얼굴이었다. 지루해 보일 정도로.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 수빈은 책상 위 스탠드며 유리잔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 모습이 흡사 마취 총을 맞고 발작하는 야생동물 같았다.
“처지, 처지, 그놈의 처지!”
“수빈아! 진정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명옥이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한번 폭발하면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아들이다. 조심히 다가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배어 나왔다.
“……뭘. 엄마가 뭘 잘못했는데?”
“응? 어, 저기 그러니까 그 처…… 네가 싫어하는 말, 엄마가 단어를 잘못 골랐어. 미안해.”
“그게 아니지.”
수빈이 책상 한구석에 놓인 가족사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진을 찢을 수 있다면 이미 조각조각 찢겨 나갔을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었다.
“엄마 잘못은 그게 아니잖아? 나를 이 집안에 밀어 넣은 것부터가 잘못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밀어 넣다니.”
“이 집 자식도 아닌 걸 억지로 집안에 넣어 놨으니 밀어 넣는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나?”
“……!”
순간, 명옥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