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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결혼의 조건 (32/89)


32. 결혼의 조건
2023.01.19.


그 냉랭한 분위기에 놀란 다정이 급히 제가 한 말을 주워 담았다.


“어, 어릴 때 그랬다고요. 어릴 땐 다 그렇죠. 샘내고 질투하고.”

“어릴 때만? 다정이는 역시 다정하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철든 거죠.”

“동생은 지금도 특별해?”

“네. 천재 코스 쭉쭉 밟아서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난 예고 다니십니다.”

다정이 기합을 잔뜩 넣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아 예고 다니는구나.”

“어? 아시네요.”

“알지. 나도 한때는 피아노…… 뭐, 천재는 아니고 그냥 좀 쳤으니까.”

어딘지 모르게 지친 듯한 느낌이 나는 미소였다. 더 자세히 묻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정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위잉.

그때, 짧은 정적을 메우기라도 하듯 가방 안에서 진동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만요.”

“응, 응.”

습관인 건지 수빈이 대답을 두 번 반복하며 귀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정은 그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결정 내렸습니까.

태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다정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수천 번을 생각해도 그의 제안은 거절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별거 아닌 문자 하나에 또 이렇게 심장이 요동치는 걸 보면 가슴은 제멋대로 다른 답을 내린 것 같았다.


“누구야?”

한동안 말이 없자 수빈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아, 그게…….”

남자친구는 아닌데 저한테 결혼하자고 하는 사람이요.

태상을 설명하자면 그렇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 다정은 말끝을 얼버무리다 슬며시 가방을 챙겼다.


“죄송한데 저는 이만 일어나봐야겠어요. 약속이 있어서.”

“그래……?”

헤어짐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 실망스러움이 빠르게 퍼졌다. 감정을 숨기려는 노력 따위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럼 안녕이네. 잘 가, 다정아.”

“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얼른 가. 붙잡기 전에.”

“…….”

끝까지 묘한 사람이었다. 다정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다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 끝만 겨우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을 열고 나선 다정은 한 손으로 트롤리를 끌며 나머지 한 손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답장이 돌아오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공항 지하 주차장.

“하.”

한참 전에 도착해 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걸까. 다정은 가벼운 탄성을 흘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따라 유독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덜덜 끌리는 트롤리 소리. 유리문 밖 공항은 번잡하기만 한데 수빈의 주변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그는 의자에 축 늘어진 채 멀어지는 다정의 등을 가만히 바라봤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데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인사를 나누는 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두 명의 승무원이었다.

두 사람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정의 어깨를 스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무언가 바삐 말을 주고받으며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게 다정 씨 얘기라니까요.”

“설마!”

“진짜예요. 아는 후배가 얼마 전에 공항 앞에서 봤대요. 부사장이 데리러 오는 거.”

순간, 수빈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문 바로 뒷자리에 앉은 그를 보지 못한 두 사람은 신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박. 여자라면 관심도 없다던 그 부사장이?”

“보나마나 비행기에서 엄청 꼬리 쳤겠죠.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는.”

“와…… 다정 씨 대박이다. 부사장을 낚은 거야?”

“제 말이요.”

두 사람은 연신 말을 이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

홀로 남겨져 있던 수빈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죽은 식물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흘러넘쳤고 입꼬리는 즐거운 듯 올라가 있었다.

그는 고양이처럼 몸을 한 번 웅크렸다 두 팔을 쭉 폈다. 그러곤 빠른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그가 신이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나? 나 수빈이. 나 그거 할래. 전에 말했던 학교 일, 나 그거 시켜줘.”

 

***

바퀴 마찰음만 가득한 지하 주차장.

특유의 눅눅한 공기 사이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정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태상을 찾았다. 그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조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멀리서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세단 옆에 서 있는 태상이 보였다. 수행기사 없이 혼자 왔는지 그는 운전석 옆에 홀로 서 있었다.

다정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걸음을 옮겼다. 태상에게 가까워질수록 잠잠하던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언제 오셨어요?”

급한 마음 탓인지 몇 걸음 만에 그의 앞에 다다랐다. 다정은 최대한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방금 막 왔습니다.”

태상이 커다란 보폭으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게 오늘도 역시 본론으로 바로 뛰어들 작정인 듯싶었다.


“결정은 했습니까.”

“……했어요.”

다정의 입에서 가느다란 대답이 흘러나왔다.


“대답은?”

“하고…… 싶어요.”

위험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향해 기울어진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이 결혼의 끝이 어떻게 나든 지금은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까?”

“안 해요. 다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태상이 저를 원하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는 마음의 병이 있어 저를 필요로 하는 것뿐이지 결코 이 결혼에 진심이 아니다.

때가 되면 훌쩍 떠나갈 남자. 그런 사람 앞에서 당당해지려면 저 역시 목적이 있어야 했다. 그를 돕는다는 이유 말고 조금 더 확실한 명분이.

다정은 부드러운 눈매에 힘을 또렷이 줬다.


 


“앞으로도 우리 희망원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럼 할게요, 이 결혼.”

“그건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희망원은 효성 재단에서…….”

“저도 알아요. 이미 도움 주기로 약속하신 거.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신 건 이전 후원자님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 언제까지고 돕겠다.”

“……좀 더 확실한 걸 원합니까.”

“네.”

다정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 고작 보육원을 내세우는 일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얄팍한 속내를 읽힌 건 아닐까.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려오는데 그가 의외로 선선히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위자료 건과 함께 서류로 남기도록 하죠.”

“아, 아뇨. 위자료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진짜로 결혼한 게 아니니까 그런 건 받을 수 없어요.”

“진짜든 가짜든, 결혼은 결혼입니다.”

“그래도 안 받을래요. 돈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싫어요. ……위자료는 받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써 주세요.”

이미 사적인 의도로 잔뜩 물든 결혼이지만 그를 돕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다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를 바라봤다.

생각에 잠긴 듯, 태상이 잠시 시선을 떨궜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다시 얘기해요.”

“그럴게요.”

다정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걸로 조건은 끝입니까?”

“네? 네. 이거면…….”

편안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문득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한 가지만 더요. 우리 서로 선은 지키기로 해요. 헤어질 때 감정 상할 일 없게.”

“선…… 이라면?”

“사생활이라든가, 아니면…… 시, 신체 접촉이라든가.”

다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흘렸다.


“…….”

불편한 돈 얘기에도 선뜻 입을 열던 태상이 이번만큼은 답이 없었다. 그는 목에 한껏 힘을 주고 턱을 꽉 다물었다. 울렁이는 목울대가 말을 삼키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부사장님?”

“좋습니다. 그렇게 해요.”

무언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가 짤막한 대답을 내놓았다. 다정은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며 속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태상이 묵직한 목소리로 짧은 정적을 깨뜨렸다.


“대신.”

“……?”

“대신 나도 조건이 있습니다.”

다정의 눈이 놀란 듯 커지다가 곧 다시 서글서글한 원래 모양을 되찾았다. 제가 이렇게 조건들을 내거는데 태상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리 없었다.


“말씀하세요.”

“간단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은 내 옆에서 자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을 같이 자자니?”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한 집에서’도 아니고 ‘내 옆에서’라니. 그 말은 마치 한 침대를 쓰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한다정 씨가 집에 다녀간 후로 난 잠을 제대로 이룬 적이 없습니다. 술도, 약도. 이젠 뭐 하나 듣는 게 없어요.”

“누가 곁에 없으면 잠을 못 잔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셈이에요. 누가 없으면, 그러면 못 잡니다.”

“아니, 일곱 살짜리 애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쏟아내던 다정이 급히 말의 방향을 틀었다.


“아무리 그래도 함께 잘 수는 없어요.”

“그때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할 수 있습니다.”

“…….”

당당한 태상의 태도에 말문이 턱 막혔다. 정말 구구절절 다 말을 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다정은 다소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볼 언저리가 화끈거리는 게 어느새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냥 잠깐 소파에 기대서 조는 거랑 한 침대에서 매일…… 딱 붙어 자는 거랑은 다르죠.”

“한다정 씨.”

태상이 옥죄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내 조건은 이거 하납니다.”

“…….”

“받아들여요.”

최후의 통첩 같은 그의 말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다정은 마른 침을 삼키며 떨리는 눈동자에 힘을 줬다.


“좋아요. 어차피 운동장만큼 넓은 침대일 텐데. 뭐, 저도 별로 신경 안 써요.”

태상의 곁에 머물기로 한 이상, 이젠 제가 그에게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에 없던 당당한 태도가 절로 취해졌다. 다정은 태연한 척 턱을 당당히 치켜들었다.


“그럼 이걸로 조건 합의는 끝난 겁니다.”

“네.”

“이 결혼, 다시는 못 무릅니다.”

“알아요. 안 물러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상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만족스러움이 가득 어린, 입안에 무언가 넣고 음미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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