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기억 속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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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기억 속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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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기억 속 그 남자
2023.01.15.
한숨 소리 같기도 했고 고통에 겨운 신음 같기도 했다. 다정은 찻잔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객실로 향했다.
“으, 으흑.”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온 건 손님이 주무시고 계신다는 1A 좌석이었다.
고소공포증인지 심장 질환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다정은 급히 프라이버시 도어를 열었다. 그러자 두 눈을 꽉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는 젊은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그는 간헐적으로 고개를 휙휙 돌렸다.
“손님, 괜찮으세요?”
“으…….”
가까이 서서 그를 불러 보았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남자의 팔을 조심히 잡고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아…….”
은은한 좌석 조명 아래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서서히 드러났다. 잔잔한 떨림을 토해내는 게 아직도 악몽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괜찮으세요?”
“……하, 한다정?”
“네? 네…….”
다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꿈인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깨워드렸어요. 악몽을 심하게 꾸시는 것 같아서.”
남자가 아직도 잠기운에 취해 있다고 판단한 다정은 좌석 옆 핀 라이트를 켰다.
부드러운 노란빛이 얼굴 위로 스며들자 남자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옅은 속 쌍꺼풀이 진 눈이며 동그란 눈동자. 전체적으로 맑고 깨끗한 피부. 거기다 남자치고 매끄러운 턱선까지. 그는 제법 미소년 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
조금 기다려봤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다정은 일단 사이드바에서 생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물을 받아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정이는 성격도 다정하네. 예전처럼.”
“……?”
처음에는 그저 명찰에서 이름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를 아는 듯한 반응이 벌써 두 번째였다.
다정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기억을 헤집었다.
이전에 탑승한 적이 있는 손님일까. 아니면 회사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걸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은 잊는 게 더 어렵기도 했다. 아리송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하네. 생명의 은인 얼굴도 까먹고.”
“아……!”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쏟아지던 밝은 빛, 불길 사이를 헤치며 뛰어오던 소년. 다정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반가워. 드디어 보네. 한다정.”
“우, 울보 오빠?”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거야? 알아보지도 못하더니 여러모로 너무하네.”
“아, 죄송해요.”
말은 죄송하다고 하고 있었지만 들썩이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다정의 기억 속 그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못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건 영진이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한 날이었다. 부모님의 관심을 빼앗긴 게 내심 샘이 났던 다정은 콘서트홀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땐 그저 부모님을 놀라게 해 줄 생각뿐이었지 그런 사고가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굳게 닫힌 문, 점점 치솟는 불길. 이곳에서 정말 죽는 건가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을 때 유일한 위로가 되어준 건 함께 갇혀 있었던 오빠뿐이었다.
나갈 수 있다며 다독여주던 자상한 소년. 하지만 그는 결국 저를 두고 혼자 도망을 쳤다. 눈을 떴을 때 제 곁에 있어준 건 눈물범벅의 울보 오빠였다.
“다시 꼭 뵙고 싶었어요.”
“나도.”
그가 미소를 짓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었다. 마치 사람을 잘 따르는 여우 같은 표정이었다.
다정은 단정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려서 늘 마음에 걸렸어요.”
“뭐야, 뭐가 이렇게 딱딱해? 나 안 반가워?”
“반갑죠. 반갑긴 한데…… 제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서요.”
다정이 주위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런가?”
눈썹을 위로 쭉 밀어 올리는 게 그다지 이해가 된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강요할 생각은 없는지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받이에 몸을 풀썩 기댔다.
다정은 최근 주변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남자 손님은 다 꼬시고 다닌다는 말부터 팔자 고치려고 승무원을 한다는 이야기까지. 파다하게 퍼진 소문의 시작은 태상이 손님으로 탑승했던 비행이었다.
그날 다정은 태상에게 먼저 다가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본 후배 하나가 꼬리를 쳤다며 일파만파 이야기를 부풀렸다.
덕분에 남자 손님과 얘기만 나누고 있어도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게 요즘 다정의 일상이었다.
살짝살짝 주위를 살피는데 객실을 가르는 커튼이 열리는 게 보였다.
다정은 한 발자국 뒤로 급하게 물러서며 정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그가 상체를 빠르게 일으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항 3층에 있는 네로 카페에서 기다릴게. 그리로 와.”
다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그가 다시 급하게 말을 이었다.
“넌 아직도 내 이름 모르지?”
“네……? 네.”
“차수빈. 울보 오빠 아니라 수빈 오빠.”
“수빈…… 오빠.”
다정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그러자 수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른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수고하셨어요.”
“네. 다정 씨도요.”
고된 비행을 마치고 뿔뿔이 흩어지는 아름다운 시간. 다정은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입국장 문이 좌우로 갈라지듯 열리고 익숙한 공항 풍경이 펼쳐졌다.
다정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한쪽 구석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이상하다…….”
커피숍 안에 수빈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퍼스트 클래스 손님은 하기가 매우 빨라 승무원보다 늦게 나올 리가 없다. 혹시 기다리다 지쳐 그냥 가버린 걸까.
조급함에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데 머리 위로 경쾌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다정아.”
“……?”
고개를 돌린 순간 목이 위로 확 꺾여 올라갔다.
180cm 정도 될까. 비행기 안에서는 앉아만 있어서 몰랐는데 수빈은 생각보다 큰 키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티셔츠 위로 드러난 윤곽이 꽤 탄탄해 보였다. 생글거리는 눈매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실루엣에 다정은 속으로 작게 놀랐다.
“앉아계시지 않고요.”
“신이 나서 그럴 수가 없었어.”
수빈은 가까이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며 앉으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그러곤 카운터 뒤에 펼쳐진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뭐 마실 거냐는, 즉 내가 낼 거라는 무언의 메시지.
자리에 앉으려던 다정은 그 동작을 보고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뇨! 제가 사야죠.”
“넌 비행기에서 나한테 홍차 만들어 줬잖아.”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아요.”
“비슷해. 그러니까 얼른 골라. 안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로 두 잔 시킨다?”
수빈이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말했다. 쑥 올라간 입꼬리며 동그랗게 나온 광대가 자연스러운 곡선을 만들어 냈다.
매사 신날 일이 참 많기도 한 사람이구나.
다정은 지갑을 꺼내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들여다봤다. 그러자 그가 못 참겠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긴 다리로 몇 발자국 움직이자 금세 카운터 앞이었다.
“아, 알겠어요! 저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 마실게요.”
“오케이. 알겠어.”
그가 팔짱을 척 끼며 말했다. 말끝마다 제스처가 동반되는 게 외국에서 오래 살고 온 사람 특유의 부산함이 느껴졌다.
손님이 없는 시간대인지라 주문한 음료는 금방 만들어졌다. 수빈은 픽업 데스크 옆에 잠시 서서 기다리다가 커피 두 잔을 받아 왔다.
그는 다정에게 라테를 건네주고 나머지 한 잔을 제 앞에 내려놓았다. 작은 커피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거 에스프레소 아니에요?”
“응. 더블.”
공항 냉방이 수준급이긴 했지만 긴 팔 티셔츠를 입은 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조금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악몽을 꿔 놓고 더블 에스프레소가 뭐예요.”
“괜찮아. 오늘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거든.”
말을 마친 수빈이 미소와 커피를 동시에 머금었다. 눈에 보이는 다갈색 머리카락과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콧물 범벅으로 기억된 그가 이렇게 꽃미남이 되어 나타날 줄이야. 다정은 저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네? 아니…… 그때 그 초등학생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요.”
“나 엄청 멋있어졌지?”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어린 시절 기억이라는 건 원래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부정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병원에 실려 가는 제 손을 꼭 잡아주던 그의 얼굴만큼은 놀라울 만큼 또렷했다.
어릴 적 느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며 다정은 새삼 10년이 넘는 세월을 체감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말도 없이 사라져서 제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요? 오빠가 그때 어른들 불러오지 않았으면 저 진짜 큰일 났을 거예요.”
“……내가 말도 없이 갔었나?”
일순이지만 그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눈이 묘하게 일그러진 느낌을 자아냈다.
“나중엔 저희 부모님이 몽타주까지 그려서 오빠 찾아다녔다니까요?”
“……못생긴 몽타주였겠네.”
또다시 수빈의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기도 잠시,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어색함을 빠르게 차단하는 게 부정적인 감정은 잠시도 끌어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너 아직도 피아노 쳐?”
“피아노요? 아…… 제가 아니라 동생이요.”
“동생?”
“네. 그날 저는 그냥 응원하러 간 거고 대회에 나간 건 제 동생이었어요.”
바닥을 기던 꼬맹이 시절부터 멜로디언을 띵동거리던 영진은 어린 시절부터 각종 피아노 대회를 휩쓸었다.
영진의 재능은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의 자랑이자 부담이었고, 다정에게는 어쩔 수 없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랬구나. 예쁘게 차려입고 있길래 나는 네가 대회에 나간 건 줄 알았어.”
“그건 제가 하도 샘을 내니까 엄마가 저도 예쁘게 입혀주신 거예요. 동생이 워낙 특별하니까 제가 질투를 많이 했었거든요.”
“그랬겠지. 특별한 건…… 주변에 독이니까.”
순간,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