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너여야만 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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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너여야만 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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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너여야만 하는 나
2023.01.12.
“네? 지금 뭐라고……?”
“나와 결혼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
처음에는 그저 잘못 들은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또렷했다.
다정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태상을 올려다봤다. 놀랍게도 마주한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서늘한 눈매며 굳게 다문 입술. 고집스러움이 한껏 느껴지는 모습에 기가 차 말문이 다 막혔다.
다정은 몇 번이고 입을 벙긋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왜, 왜요? 아니, 그보다 지금 누굴 바보로 아시는 거예요? 결혼이라뇨. 지금 부사장님 결혼 기사로 인터넷이 도배가 됐는데.”
“그 기사에 내가 누구랑 결혼한다고도 나와 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다정이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어디 대단한 가문의 자제분이겠죠. 그러니까 꼭꼭 숨겨 놓고 기사에 안 내보내는 거고.”
“안 내보내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누구와 결혼을 할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그래서 못 내보내는 겁니다.”
“…….”
결혼은 하는데 누구와 할지는 모른다니. 조금 전 받은 청혼이 인생에서 겪은 가장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정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난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 결혼을 하게 될 겁니다. 어디가 되었든 우리 효성의 힘이 필요한 집안과.”
“잘…… 됐네요. 어차피 그쪽 집도 부사장님께 큰 도움이 되어줄 거잖아요.”
결혼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의 턱시도 차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정은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게 무슨…….”
“정말 내가 아무 여자와 결혼을 하길 바랍니까?”
찌르는 듯한 시선이 눈동자 안으로 치밀었다. 다정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영미도, 철중도. 이젠 하다, 하다 태상까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정말이냐’고 묻는데 이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태상을 좋아한다. 아니, 전부터 쭉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넓은 어깨를 아낌없이 내어준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무뚝뚝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 순간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는 마음이 제 안에서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막아보려 했지만, 모른 척도 해 봤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태상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 가슴속에 선명히 남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는 여전히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남자이니까.
가볍게 쿡 찔리기만 해도 서러운 속마음이 울컥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다정은 도망치듯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을 질끈 감고 발을 내디디는데 희미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난 그런 결혼 하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니 날 도와줘요.”
“왜…… 왜 하필 저예요?”
다정이 홱 돌아서며 원망의 눈빛을 던졌다. 수락할 수도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그런 제안을 하는 그가 미웠다.
“난 한다정이어야만 하니까.”
“저여야만…… 한다고요?”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태상은 그 불안한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한 소문, 들어본 적 있습니까?”
“소문이라면…….”
“부사장이 여자를 기피한다는 소문.”
“그건 어차피 다 헛소문이잖아요.”
“헛소문이 아닙니다. 난 여자라면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싫어요. 그러니 언론에서도 연일 추문이 끊이지 않는 거고.”
“자, 잠시만요. 그럴 리가요. 부사장님은 언제나 서슴없이…….”
거리끼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손길이 아직도 피부 위에 선명한데. 그런데 이제 와서 여자라면 손끝 하나 닿지 못하겠다니.
다정의 얼굴이 혼란스러움으로 물들었다.
“한다정 씨는 괜찮습니다.”
“어째서요?”
“왜인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난 당신이라면 괜찮습니다. 가까이 있어도, 몸이 닿아도. 그러니까 잠깐만 내 옆에 있어 줘요. 내 여자로, 내 신부로.”
“…….”
정신 나간 제안이다.
싫다고 해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통제를 잃은 입술은 엉뚱한 말을 만들어 냈다.
“저, 정말 그 이유가 다예요?”
“무슨 뜻이지?”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건 아니냐고요.”
“……아니, 다는 아닙니다.”
“뭐가 더 있는데요?”
대답하기 어려운지, 그가 미간을 바싹 좁히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짧은 시간이 애간장이 녹을 듯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태상이 단정적인 목소리로 입을 뗐다.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
“그래서, 신경이 쓰여서 내 눈에 잘 보이는 데 두고 싶은 겁니다.”
다정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마치 제게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저를 향하는 짙은 눈동자는 지나치게 짙고 평온했다.
서로 다른 감각이 동시에 찾아오자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고,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불투명한 생각의 갈래 속, 다정은 가장 확실한 길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제게 다가오는 수많은 이유 중 마음이라는 게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녹을 듯 설레었다.
“어, 얼마나 오랫동안이요?”
“길게는 아닙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이 풀릴 정도면 돼요.”
“그때가 되면…… 헤어지는 건가요?”
태상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효성의 일가족이었던 만큼 이혼 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결혼 중에도 마찬가지고.”
“걸맞은 대우요?”
“결혼을 하게 되면 한다정 씨뿐만 아니라 한다정 씨의 가족도 내 가족입니다. 피아노 수재인 동생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한영진 군?”
“……네.”
“클래식 인재 양성은 회장님과 내가 동시에 관심을 쏟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피아니스트, 교수, 지휘자. 누가 되었건, 세계 어디에 있건 영진 군이 원하는 사람을 멘토로 초청해 주죠.”
“저, 정말요?”
다정이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영진이 매일 같이 영상으로 찾아보는 세계의 수많은 음악가들. 피아노에 대해 잘 모르는 다정도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나같이 수업은커녕 이야기 한번 나누는 것도 황송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음악가들을 만나 함께 피아노를 칠 수 있다니. 영진이 행복해 할 모습이 눈앞에 저절로 그려졌다.
“물론 영진 군에게 진짜 가족이 되어줄 생각입니다. 형이 필요한 순간에는 형으로, 아빠가 필요한 때에는 아빠로.”
“…….”
가족. 그 말이 주는 뜨거운 울림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진이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수천 번을 넘게 했던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이 남자가 울타리가 되어 준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정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곤 작은 손을 말아쥔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 생각해 볼게요.”
“…….”
태상은 조용한 눈동자로 다정의 모습을 담아냈다. 말을 아끼는 모습이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와 같았다.
지금은 침착해야 할 때였다. 섣부르게 입을 열면 겁 많은 다정이 어디론가 도망을 칠지도 모른다.
그는 술렁이는 마음을 눈동자 속에 꼭 가둔 채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싫으면 거절해도 됩니다. 부담을 줄 생각은 없으니까.”
태상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천천히 문을 나섰다. 다정은 시선을 피한 채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탁.
가볍게 문이 닫힌 후, 다정은 흐물거리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긴 한숨을 내쉬며 침구 위에 손을 얹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주인의 센스를 탓했던 커다란 꽃다발이 보였다.
“하.”
이제 보니 부족했던 건 꽃집의 센스가 아니라 제 눈치였다.
이건 병문안이 아니라 청혼을 위한 꽃다발이었다.
***
폭풍 같은 청혼을 받고 난 지 며칠 후.
다정은 운항 시간만 11시간이 넘는 LA 비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밥 먹을 틈도 없이 바쁜 비행 속,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건 교대로 다녀오는 휴식 시간이었다.
“하…….”
벙크(승무원의 수면 공간)에 몸을 누인 다정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베개에 머리를 깊게 파묻었지만 어쩐지 잠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나와 결혼해줄 수 있겠습니까.’
머리를 휘휘 저어도,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 보아도. 태상의 목소리는 끈질기게 귓가를 따라붙었다.
처음엔 고민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수는 없다고.
하지만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가만히 있던 눈동자가 슬그머니 옆으로 올라갔다.
그와 결혼을 한다면. 그가 내 남편이 된다면. 그와 한집에 산다면. 상상은 날개라도 돋친 듯 훨훨 날아 태상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절대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손에 닿을 듯 아주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애가 타고, 더 고민스러웠다.
다정은 한숨을 푹 쉬며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자 캄캄해진 시야를 배경으로 철중의 모습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래? 병문안을 오셨어? 아이고, 이렇게 죄송할 데가 있나. 내가 먼저 찾아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환자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다정아, 희망원은 너희들에게만 희망이 아니야. 내게도 희망이고 등불 같은 곳이란다. 나 세상 뜨고 나면 우리 보육원은 누가 돌보나…… 그런 생각에 편히 눈도 못 감을 것 같았는데 이젠 한시름 덜었어.’
‘눈을 감긴 뭘 감아요, 진짜 별 얘길 다 해.’
항상 힘든 일이 있어도 허허, 웃어넘기는 철중이었다. 그런 그가 눈시울을 붉히자 다정 역시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위잉, 위잉.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던 생각에 코끝이 찡해오는데 머리맡에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뜬 눈으로 휴식 시간을 다 보내버린 다정은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막힌 청혼 덕분에 벌써 며칠 밤을 새우는 건지. 다정은 뚱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왔다.
기내로 복귀하자 함께 일하는 선배가 반가운 얼굴로 다정을 맞이했다. 교대자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눈치였다.
“다정 씨, 1A 손님은 아직 주무시니까 식사 준비는 나중에 해.”
“네. 알겠습니다. 잘 쉬고 오세요.”
선배를 보내고 혼자 남은 갤린 안.
다정은 번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따뜻한 차 한 잔을 우려냈다. 티백을 찻물에 넣었다 빼며 또 같은 생각에 빠져드는데 이상한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으, 으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