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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찾았다, 내 신부 (29/89)


29. 찾았다, 내 신부
2023.01.08.


캄캄한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진 늦은 밤.

다정은 철중의 이불을 끌어 올리며 연신 참새처럼 조잘거렸다. 원장 아빠의 수술이며, 징계위, 거기다 보육원 문제까지 모두 해결되자 말 그대로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보육원은 재개발 구역에서 아예 제외하기로 했대요. 앞으로도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게.”

“그랬구나.”

“그리고 복지 재단에서 사랑의 나눔 행사라는 걸 하러 왔는데, 정말 별의별 게 다 있는 거예요. 아빠, 효성 식품 알죠?”

신이 난 다정이 목소리 끝을 위로 쭉 끌어올리며 말했다.


“알지, 그럼. 그…… 휴마트, 그것도 거기 거잖아.”

“네. 그 마트에 들어가는 물건이랑 효성 베이커리 제품까지, 정말 끝이 없더라고요.”

“요새 후원이 다 끊겨서 고민이었는데 정말 다행이구나.”

“그러니까요. 아, 저희 회사 부사장님이 운영하는 재단이라고 제가 말했나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다정을 바라보며 철중은 할 말을 잃었다.

하루 종일 어찌나 그 ‘부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을 늘어놓는지 만나지도 않은 사람이 눈에 훤히 그려질 지경이건만. 정작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보기엔 정말 엄청 무섭게 생겼거든요? 근데 애들 대하는 거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요. 예슬이 말로는 눈만 무서운 아저씨래요.”

“예슬이가 그래?”

“네. 그리고 남자애들이 축구 할 사람 없다고 같이 해달라고 졸랐거든요? 절대 안 해 주겠지 했는데 그걸 또 같이 해 주는 거예요.”

“마음씨가 좋으신 분이구나.”

“그게…… 그런 것 같기는 한데…….”

노랫소리처럼 이어지던 다정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어느새 눈꼬리까지 축 처진 게 무언가 근심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아니, 좋은 분인데……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 말을 해서요.”

요즘 들어 태상의 주변에는 이상한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직장 내 성차별을 일삼았다는 악의적 보도며, 성적 취향은 운운하는 추측성 기사까지. 그를 음해하는 게시물들이 연일 포털 사이트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이런 말을 퍼뜨리는지는 몰라도 그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다정아.”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철중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너…… 혹시 그 사람 마음에 드니?”

“네에? 아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회사 부사장이라니까요? 그, 신문에 맨날 대문짝만하게 나는 사람.”

“내가 언제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물었어? 마음이 있느냐고 했지.”

“아니, 그게…….”

다정은 어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제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여 줄 거로 생각했는데 그의 반응이 너무 뜻밖이었다.

-위잉.

그때, 짧은 진동 소리가 어색한 정적을 깨뜨렸다. 다정은 갑자기 날아온 문자에 감사하며 바삐 핸드폰을 확인했다.


“자, 잠시만요.”

화면을 켜자 영미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박, 이거 봤어? 또 결혼한대.
 


‘또……?’

다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미가 함께 보낸 링크를 눌렀다. 그러자 ‘효성 3세 전격 결혼 발표’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던 ‘효성가 3세’ 차태상 부사장. 그가 대성 그룹과의 혼담을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결혼을 발표했다. 하지만 신부가 누가 될지는 베일에 싸인 상태. 에어 코리아 홍보팀에 따르면 결혼은 내달 말, 가족들만 참석하는 극비…….]

거기까지 읽은 다정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태상이 결혼을 한다. 어느새 함께 있는 게 자연스러워진 그가 곧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더니 눈앞에 저절로 그의 결혼식 장면이 그려졌다.

이지적인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할 날렵한 선의 턱시도, 버진로드를 가르는 기품 있는 발걸음. 식장에 선 태상은 누구보다 늠름하고 멋있을 것이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둘러싸인 신부가 있을 것이고.

그 모습을 상상하자 이상할 만큼 가슴이 아팠다. 통증이 너무 생생해 마치 누군가가 예리한 날붙이로 심장을 찌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정아.”

“…….”

“다정아?”

“네?”

다정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어느새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일 있니?”

“아, 아니요. 무슨 일은…….”

다정은 대충 얼버무리고 재빨리 핸드폰을 가방 안으로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의 결혼식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도 회장님께서 일방적으로 결혼을 밀어붙이는 걸까. 그렇다면 또 그가 나서서 혼담을 깨지 않을까.

다정은 제가 한 생각을 깨닫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마치 제가 그의 결혼이 깨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낯선 노크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

다인실 병실에서 노크라니. 다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문가를 바라봤다. 그러자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김 비서님……?”

다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읊조렸다. 문밖에 선 김 비서는 고개를 짧게 숙이며 나와달라는 무언의 표시를 보냈다.


“아빠,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아는 분이니?”

“네. 그…… 복지 재단 관계자분이세요.”

철중은 고마움의 인사를 대신해달라 신신당부하며 다정을 내보냈다. 다정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손잡이를 밀자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옆으로 열렸다. 다정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작게 인사의 말부터 전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복도로 완전히 빠져나온 다정은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원장님께서 입원하셨다는 소식 듣고 왔습니다.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종이를 넘겨받은 다정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VIP 병동……?”

“네. 사인만 해 주시면 바로 병실 이동 가능합니다.”

“이,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돼요. 지금 있는 곳으로도 충분합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부사장님께서 보육원을 위한 일에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부사장님께서요?”

“네. 복지 재단 실무를 제게 일임하시면서 당부하신 내용입니다.”

“아…….”

일임. 그 한 단어가 가시처럼 아프게 박혔다.

보육원 일에는 신경을 끄겠다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서 하는 걸까. 그렇게 되면 정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텐데.

다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그러자 실망한 기색을 읽어낸 김 비서가 바삐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중요한 결정은 부사장님께서 내려주실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현장을 오가며 진행 상황을 점검할 뿐이니까요.”

“네…….”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지만 축 처진 눈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다정은 한층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병실은 지금 있는 곳으로도 충분해요. 이 돈은 희망원 말고 더 좋은 곳에 써 주세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일단 부사장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는 거로요.”

“아, 아뇨. 그럴 것까지는 없어요. 바쁘신 분인 거 뻔히 아는데…….”

이렇게 되면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조른 거나 다름없다. 다정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도리질을 쳤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지금 이 병원에 와 계시니까요.”

“여기…… 와 계시다고요?”

“네. 시설이 괜찮은지 VIP 병실을 먼저 둘러보고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녀오시죠.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 비서는 연신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정의 등을 떠밀었다.



***

가까울 것처럼 느껴졌던 특별실은 의외로 멀었다. 같은 건물 안에 있기는 하지만 들어가는 입구가 달랐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병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문 앞에 선 다정은 손잡이를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축하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척을 해야 할지. 어떤 얼굴로 그를 마주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작은 한숨만 내쉬는데 갑자기 손잡이가 저절로 움직였다. 놀라 고개를 들자 열린 문 뒤로 태상이 보였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는 병실 문을 가득 채우듯 우뚝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 와서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오는데 좀 헤매서.”

다정은 문 위에 유리창이 나 있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거짓말을 흘렸다.


“들어와요.”

“네.”

다정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병실로 들어섰다.

VIP 병실은 호텔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개인용 샤워실에 벽걸이형 TV. 내부를 쭉 훑으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침대 위에 놓인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온갖 꽃이 빽빽이 들어찬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새빨간 장미꽃과 주위를 둘러싼 샛노란 프리지아, 거기다 이름 모를 보라색 꽃까지.

도대체 어떤 플로리스트의 센스인지 몰라도 병원에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중환자실 면회는 생각보다 제한적이더군요.”

멍하니 꽃다발을 들여다보는데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다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면회요?”

“네. 생각이 짧았습니다. 큰 수술 마친 환자가 방문객을 많이 받을 수 있을 리 없는데.”

“…….”

순간, 다정의 얼굴이 비 온 뒤 하늘처럼 맑게 개었다.

꽃다발도 그렇고 면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는 처음부터 원장 아빠를 보러 온 게 분명했다.

김 비서에게 모든 걸 떠넘겼다며 실망한 게 바로 조금 전이건만. 간사하게도 그의 짧은 한 마디에 다시 기분이 들떴다.


“아니에요. 아빠한테 다녀가셨다고 말씀 전해드릴게요. 병문안까지 와 주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원장님을 뵈러 온 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닙니다.”

“네? 그럼요?”

“사실 한다정 씨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 밤에 여기까지 와서 제게 할 부탁이라니. 다정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태상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네! 말씀만 하세요. 뭐든 다 들어드릴게요.”

“진심입니까?”

“네. 물론이죠. 약속 드렸잖아요.”

“그럼…….”

태상이 짙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말했다. 촘촘하게 시선이 얽히자 채 한 뼘밖에 되지 않는 거리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짧은 침묵 후,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 결혼해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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