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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보드라운 그 손 (28/89)


28. 보드라운 그 손
2023.01.05.



“차태상 부사장님?”

멋쩍게 허공에 손을 띄워 놓기를 잠시, 이 실장이 의아한 듯 태상의 이름을 불렀다. 태상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었다.


‘드디어…….’

명옥은 입술을 꽉 깨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밀어내려나? 아니면 도망을 가려나? 어느 쪽이든 다 좋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단상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의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아니…… 어떻게…….”

정자세로 선 태상은 의연한 표정으로 이 실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맞잡은 손이 허공에서 짧게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태상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빠르게 무대를 가로질렀다.

호흡이 조금 가팔라져 있었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심리적 고통을 억누르느라 생긴 변화였지만 멀리서 보기엔 그저 조금 긴장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태상은 무대 끝에 이르러 다급하게 뒤편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참았던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부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단상 바로 아래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김 비서가 득달같이 다가와 물었다.


“죄송합니다. 분명 실장 비서실 측에 연락을 했는…….”

“화장실 좀.”

태상이 상장을 김 비서의 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숨을 쉬기가 힘든지 그는 어느새 넥타이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태상은 가슴 언저리를 움켜쥔 채 정신없이 회장을 빠져나갔다.


“하…….”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 세찬 물줄기 소리 사이로 떨리는 호흡이 섞여들었다.

태상은 세면대에 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나 세게 누르고 있는지,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퍼런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정말 가능할 줄이야.

어떤 치료로도 나아지지 않아 불가능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 실장과 악수를 나누는 제 모습은 꽤 자연스러웠다.

처음 허공에 내밀어진 손을 봤을 땐 온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숨이 가빠졌고 등줄기에서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

머리가 아닌 몸이 거부를 하니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사만 하고 단상을 빠져나오려는데 순간, 보드라운 손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를 부축하며 잡아주었던 작은 손. 생에 최초로 느꼈던 따스함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했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자 딱딱하게 굳어진 몸이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졌다.

해볼 만하지 않을까.

다정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지금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태상은 사력을 다해 자신을 설득했다. 그때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분명 괜찮을 거라고.

그는 서서히 팔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지만 이제 와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지긋지긋한 공포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그런 생각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하, 하하.”

수십 명의 의사가 달라붙어도 해결되지 않던 게 작은 손 하나로 나아지다니. 태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문득, 손안이 너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상이 끝난 홀은 아직도 축하의 분위기로 물들어 있었다.

김 비서는 태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재빨리 차 회장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차 회장의 주변에는 눈도장을 찍기 위한 인사들이 한가득이었다. 겹겹이 쌓인 사람들을 해치며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는데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죄송하지요. 태상이가 오는 줄 알았으면 제가 시상을 했을 텐데.”

차 회장은 평소 관계가 돈독한 국토부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차 회장의 동생, 차영태 교수를 끔찍이도 따르는 제자였다.

은사님을 위한 일이라면 열 일 제쳐 놓고 달려오는 그는, 차 회장도 은사님과 똑같이 여기며 극진히 모셨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태상의 이름에 주변이 작게 술렁였다. 업계에서 태상의 입지가 다시 한번 다져지는 순간이었다.


“어, 김 비서. 태상이는 어디 있나?”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온 김 비서를 발견한 차 회장이 가벼운 투로 물었다.


“잠시 화장실에 갔습니다. 금방 다시 올 겁니다.”

“그래? 김 장관과 점심 식사나 할까 하는데 태상이 오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일정 비어 있습니다.”

김 비서가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사실 회의며 내부 미팅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지만 차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때, 대화에 끼어들 틈을 보던 명옥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 근처에 아버님 좋아하시는 전복장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제가 안내할까요?”

“음. 아니다. 명옥이 너는 바로 회사로 들어가 보려무나.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하도록 하고.”

“예, 예?”

“윤 실장, 적당한 곳으로 예약해서 태상이도 그리로 오라고 해.”

“…….”

명옥은 테이블 아래로 치맛단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 악을 쓰며 올라왔건만. 아직도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분해 견딜 수 없었다.

차 회장은 여전히 허허 웃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명옥은 아무도 없는 단상 위를 차갑게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나아진 건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뿌리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태상의 모습은 의외로 담담했다.


‘무슨 행운이 어떻게 따라준 건진 모르지만…….’

처음부터 다 가지고 태어난 태상이 매번 이렇게 승승장구하는 건 역시 불공평하다.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그룹을 대표하는 얼굴로 홀로 우뚝 서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명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홀을 빠져나오며 전화를 거는데 핸드폰을 통해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여보세…….」

“기사 준비는 잘 되어가요?”

그녀가 말허리를 대뜸 자르며 날카롭게 말했다.


「윤 본부장님?」

“다음 기사, 준비 다 됐냐고요.”

「아니, 기사는 무슨 기삽니까.」

“뭐라고요?”

「오늘 뭐 대단한 거 터진다면서요. 데스크한테 메인 자리 비워 놓으라고 큰소리 떵떵 쳤는데 이게 뭡니까?」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하지만 내가 주는 소스만으로도 충분히…….”

「본부장님, 그 소스라는 게요…… 증거도 좀 있고, 사진도 빵빵하고 뭐, 이렇게 사람들을 홀릴 만한 게 있어야 좋은 소스인 거죠. 그냥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그런 거로 기사 못 씁니다.」

“하. 무슨 얘긴 줄 알겠어요. 수고비는 지난번 두 배로 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명옥이 눈썹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아니, 지금 사람 말을 뭐로 듣고……. 안 그래도 지난번에 쓴 기사 때문에 저 욕 엄청 먹고 있다고요. 근거 없는 뜬소문 그대로 옮기는 게 딱 가십 전문 기레기라고.」

“근거 없지 않다니까요? 게다가 다른 신문사들도 하나둘 따라서 기사 올릴 거니까……!”

「됐습니다.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했더니만……. 먼저 올라간 기사는 곧 내릴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아니, 김 기자, 잠시만요. 여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명옥은 뚜뚜 울리는 통화 종료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입을 벙긋거렸다.


“하, 이젠 하다, 하다 별 거지같은 게 다…….”

핸드폰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수빈이 들어오기 전 어떻게든 바닥을 탄탄하게 다져 놓으려 했건만. 차 회장과 태상이 일심동체가 된 듯 아들의 인생을 자갈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명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잔뜩 어려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억지스러운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수빈아. 엄마야. 우리 아들, 잘 있었어?”

 

 

***

김 장관과의 식사를 마치고 본사로 향하는 차 안, 태상은 차 회장과 한 차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한성 항공 인수 문제로 시끄러울 일이 많을 거다. 국교부 사람들과 안면 터 둬서 나쁠 거 없어.”

긴 침묵을 유지하던 차 회장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예.”

“회사 일이라는 게 결국 다 사람으로 하는 거다. 안이고 밖이고 주변을 잘 채워야 해.”

“노력하겠습니다.”

태상이 담백하게 말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다만…….”

“없습니다.”

“뭐야?”

“안, 채울 사람 없습니다.”

그의 대화 방식을 빤히 아는 태상이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온화하기만 하던 차 안 공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윤 실장은 백미러에 비친 뒷좌석을 힐끔 바라봤다. 어디 한번 해보자는 차 회장의 표정이 좁다란 거울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도망갈 곳도 없는 차 안, 그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떻게든 제 존재를 지워보려는데 차 회장의 눈을 피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윤 실장.”

“예. 회장님.”

“그거, 이리 내 봐.”

“예.”

뭘 말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뻔했다. 윤 실장은 빠른 동작으로 서류 가방 안에서 태블릿 PC를 꺼냈다.

화면에는 조금 전 식당을 나올 때 귀띔으로 전했던 신문 기사가 떠올라 있었다. 차 회장은 떫은 표정으로 화면을 빠르게 훑고 기기를 태상 앞으로 들이밀었다.


“봐라. 이게 지금 네 평판이다. 회사 안 소문으로도 부족해서 인터넷에서까지.”

 
‘경영인 A 씨, 여성에 대한 차별인가 기피인가.’

‘일류 기업 사위 자리를 마다한 재벌 3세, 그가 진짜 결혼하고 싶은 대상은 남자?’

자극적인 제목 밑으로 더 자극적인 루머가 한바탕 펼쳐져 있었다.

태상은 느릿한 눈동자로 기사를 읽고는 가볍게 화면을 덮었다. 그의 얼굴에는 화내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네가 지금 그게 할아비에게……!”

태상의 담담한 태도에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얼굴을 붉히기도 잠시, 차 회장은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여성을 멀리하는 태상이 아니다. 손주의 비밀스러운 밀회는 그가 변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크흠. 나는 이제 이런 꼴 같지 않은 기사 더는 못 본다. 잔말 말고 내달 말로 날 잡아. 현진 그룹 이 회장과 이미 얘기 끝내 놨어. 그 집 둘째, 이서현. 너도 잘 알지?”

“비서들이 고생이 많겠네요. 결혼식을 잡았다, 취소했다. 또 잡았다, 또 취소했다.”

“이번에도 훼방을 놓겠다 이 뜻이냐?”

“한 번 파투 낸 인간이 두 번이라고 못 내겠습니까.”

차 회장은 부글거리는 속내를 꾹 누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낼 테면 내 보거라. 태상이 네 앞으로 들어온 혼처만 서른 개가 넘으니까.”

“…….”

제대로 날린 강타가 먹혀들었는지 이번에야말로 태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서현이 다음은 일성 그룹 막내, 그다음은 김혁주 의원 고명딸. 그다음은…… 윤 실장, 다음이 누구였지?”

“예? 예…… 하, 한일 바이오 송명수 사장의…….”

윤 실장은 있지도 않은 손자며느리 리스트 만들기에 재빠르게 가담했다.


“어, 그래. 송 사장이 그러더구나. 첫째가 성격이 무덤덤해서 너랑 아주 잘 맞을 거라고.”

“할아버님.”

태상이 낮은 목소리로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차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드센 눈빛으로 응수했다.


“이번엔 나도 진심이다. 나 가고 나면 태상이 네가 어디 여자를 쳐다라도 보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할아비 뜻대로 해.”

“…….”

느닷없이 날아든 결정타에 태상이 말을 잇지 못했다.

태상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차 회장의 손에 길러졌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차 회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과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차 회장은 이번 딱 한 번만, 그런 태상의 마음을 이용하기로 했다.


“결혼은 내달 말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

대화의 빗장을 걸어 잠그듯, 차 회장이 몸을 완전히 돌려 정면을 보고 앉았다.

때마침, 신호 대기에 걸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좌우로 교차하는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설마 이번에도 실패인 건가. 김 비서의 정보는 그저 과장이었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찰나, 결의에 찬 태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할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는 눈썹 끝만 바싹 올린 채 힐끗 태상을 바라봤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태도를 놓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래. 그래야지.”

“대신…… 신부는 제가 데려갑니다.”

씨익, 차 회장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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