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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이 리틀 파트너 (27/89)


27. 마이 리틀 파트너
2023.01.01.



“나는…….”

초롱초롱하던 예슬의 눈망울이 어느새 의심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태상은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나는 예외.”

“왜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한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거니까 귀찮게 하는 게 아니야.”

“아…… 그렇구나.”

납득이 되었는지 예슬이 작은 고개를 잘랑잘랑 흔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아이를 설득하는 제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태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예슬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걱정 마요. 아저씨에 비하면 그 오빠들은 다 별로야.”

“왜 별로…….”

“뭐가? 뭐가 별론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열린 틈새로 다정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원장실 안으로 들어온 다정의 손에는 주먹밥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예슬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보육원 오는 오빠들 있잖아, 언니랑 친한 오빠들. 다 별로라고 얘기해주고 있었어.”

“뭐? 오빠들이 왜 별로야.”

“언니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래, 그래.”

다정은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짐작하지 못하고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건 뭡니까?”

태상이 다정에 손에 든 쟁반을 보고 물었다.


“아, 예슬이가 부엌에 재료를 이것저것 다 벌려놨더라고요. 버리기 아까워서 몇 개 더 만들었어요.”

다정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한입에 들어갈 크기로 만들어진 주먹밥은 깨까지 솔솔 뿌려진 게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이런 음식이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태상이 가볍게 답하며 함께 준비된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주먹밥을 하나 콕 찍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예슬에게 건네주었다.
예슬은 두 손을 포크를 받아 들더니 주먹밥을 크게 베어 물었다.

다정은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는 걸 숨죽여 지켜봤다. 넣은 거라고는 멸치 조각 몇 개밖에 없는 부실한 주먹밥. 인상을 찌푸린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태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밥 하나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는 음식물을 깨끗이 씹어 넘기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맛있군요.”

“정말요?”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합니다.”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빤히 들여다보는 눈동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다정은 배시시 웃으며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안에 넣자 평범하면서 그리운 맛이 잔잔히 퍼졌다.


“맛있진 않지만 먹을 만은 하네요.”

“맛있습니다.”

“맛있어!”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와 나란히 앉아 있는 태상.

태상과 예슬이 합창이라도 하듯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그새 꽤 친해지기라도 한 건지. 호흡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을 보며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슬아, 아저씨랑 많이 친해졌어?”

“응. 그럼. 내가 아저씨 허락도 해줬는걸.”

“허락?”

영문을 알 수 없는 예슬의 말에 다정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수다스러운 예슬이가 또 말을 늘어놓겠거니 싶어 가만히 쳐다보는데 태상이 빠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세 사람 점심을 이걸로 해결하기엔 좀 부족하겠군요.”

“네? 아…… 네. 남은 밥으로 급하게 만든 거라. 점심은 시켜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부엌이 엉망이라 지금은 요리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안 그래도 효성 식품에서 곧 배송이 올 거니까.”

“배송……이요?”

태상은 왼쪽 손목을 가볍게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곤 다정을 향해 차분한 시선을 던졌다.


“여기 희망원은 효성 재단에서 주도하는 사랑의 나눔 행사 대상 시설입니다. 앞으론 매달 효성 식품에서 생산되는 제품이 제공될 겁니다.”

“사, 사랑의 나눔 행사요? 저희 보육원이 언제 그 리스트에 들게 되었나요? 아빠한테 그런 말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

“어제.”

“네?”

“우연한 계기로 어제 리스트에 추가되었습니다.”

“…….”

그간 여기저기 사회 복지 재단에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괜한 일을 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희망원의 이야기는 많은 곳을 거쳐 효성 재단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역시 하늘도 무심하지는 않았다. 다정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빵, 좋아합니까?”

“네? ……아, 네. 그럼요. 좋아하죠.”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눈동자에 전에 없던 따스한 기색이 어렸다.


 

***

공기 중에 비 냄새가 촘촘히 밴 8월의 어느 날, 항공세미나가 열릴 예정인 라인 호텔의 그레이트홀은 평소보다 한층 북적거리는 모습이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물론 항공 업계 주요 인사가 총출동하는 자리.

이곳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그리고 알든 모르든 일단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 어지러이 뒤섞인 곳이었다.

에어 코리아의 관계자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한 명옥은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만 정확히 골라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넓은 홀 가득 기자들이 차고 넘치도록 많다.

태상이 추락하는 순간을 누가 가장 멋지게 담아낼지. 기대감에 가슴이 다 벅차올랐다.


-예정대로 오늘 후속 기사 나갈 겁니다.

명옥은 김 기자로부터 온 문자를 빠르게 읽었다. 첫 번째로 쓴 기사도 단어 표현이 제법 마음에 들어 오늘도 잘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난번 기사 잘 봤어요. 이번에도 잘 부탁.

거기까지 메시지를 입력한 순간 회장이 술렁거렸다. 작은 웅성거림에 이끌려 고개를 따라 들자 예상외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회장님, 여긴 어쩐 일로 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왜긴. 손주 팔불출이라고 내가 내 입으로 꼭 말을 해야겠나?”

차 회장은 허허 웃음을 흘리며 정치계 인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차 회장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그다지 흔치 않았다. 그는 회사 내 굵직굵직한 행사에만 얼굴을 비췄고 그마저도 축사 한마디를 하고 자리를 뜨기가 일쑤였다.

손주 해바라기네.

명옥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그런 속삭임이 들렸다.

게다가.

손주가 하나 더 있다는데? 글쎄. 그쪽은 영…….

들릴 듯 말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귓가를 때렸다. 명옥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작성해 놓은 문자를 싹 지웠다.


-소스 몇 개 더 던져줄 테니까 이번엔 좀 제대로 써 봐요.

차 회장은 윤 실장의 안내를 받아 맨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시상대를 보기 가장 좋은 위치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하다 가끔씩 문을 힐끔거렸다.

또 그놈의 차태상을 기다리는 거겠지. 명옥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차 회장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어머, 아버님. 오신다면 오신다고 말씀이나 해 주시죠. 그럼 같이 왔을 텐데.”

명옥이 차 회장의 옆자리를 꿰차며 말했다.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뭐 하러.”

“태상이 보러 오셨구나?”

“그럼. 별 대단한 상은 아니더라도 보는 재미가 있지.”

“그럼요. 부모 마음은 다 같죠. 우리 수빈이도 한국에만 있었으면 오늘 같이 왔을 텐데. 그렇죠?”

눈을 빤히 맞추며 답을 강요하는데 홀이 다시 한번 술렁거렸다. 명옥은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그의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문가에는 밝은 조명을 혼자 다 받은 듯 반짝이는 태상이 서 있었다.

진주처럼 광택이 나는 검은 슈트에 조금 화려한 감이 있는 타이. 평소보다 꾸민 듯한 그의 모습은 커다란 연회장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태상은 관계자들에게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바로 차 회장이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오셨습니까.”

뭘 굳이 왔냐는 듯.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였다. 하지만 그에 응수하는 차 회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 앉거라.”

손주 해바라기는 아무래도 손주가 없는 곳에서만 피어나는 독특한 꽃인 듯했다. 태상은 명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차 회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점점 차분해지자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랐다.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 지금부터 제13회 항공세미나를 시작하겠습니다.”

초반 1시간은 항공 업계가 당면한 과제,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한 연설이 대부분이었다.

뜻깊은 자리이기는 했으나 일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자리이기도 했다.

한두 명씩 힐끔힐끔 시간을 확인할 즈음, 모든 연설이 끝나고 시상 순서가 이어졌다. 이 시간을 특히나 더 기다린 명옥은 입꼬리를 연신 씰룩였다.

시상은 개인 부문부터 시작되었다.

관제탑과 행정 인력 그리고 공항공사 직원들까지. 수상자들은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패와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명옥은 즐거운 듯한 눈빛으로 무대 위를 바라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상자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그녀의 시선은 시상자, 이상은 실장에게 향해 있었다.

손을 잡지 못하고 벌벌 떨겠지. 망신을 당하고 도망칠 태상의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태상아, 네가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감사합니다.”

태상이 틀에 박힌 대답을 간단히 내놓는데 김 비서가 태상의 옆에 와 단정히 섰다.


“부사장님, 올라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태상은 차 회장에게 단정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단상으로 향했다.

그는 무대 끝자락에 서서 제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태상의 수상은 시상식의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네. 그럼 마지막으로 대형 항공사 부문, 안전 항공사 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시상의 영애는 지난 한 해 무사고 운항을 기록한 에어 코리아에 돌아갔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석에서 커다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태상은 너른 발걸음으로 단상 위를 가로질러 시상자 앞에 섰다. 시상자로 나선 이상은 실장이 화사한 미소를 띤 채 태상을 맞이했다. 그녀의 옆에는 상장을 든 진행 요원이 함께 서 있었다.


“안전 항공사 상. 에어 코리아 부사장, 차태상.”

태상이 자리를 잡고 서자 사회자가 기다렸다는 듯 상장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태상은 반듯한 자세로 서 공손하게 시선을 내렸다.


“귀하는 안전한 항공 여객 문화를 선도한 데 기여한 바가 커 이에 표창합니다.”

사회자의 낭송이 끝나자 이 실장이 들고 있던 상장을 태상을 향해 건넸다. 태상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상장을 받아들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커다란 박수 소리를 배경으로 이 실장이 가볍게 태상의 공을 치하했다. 그녀는 자연스레 손을 들어 태상의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단정하던 태상의 얼굴이 조각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게 적잖이 당황한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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