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 함부로 또 함부로 (26/89)


26. 함부로 또 함부로
2022.12.29.



“부사장님……께요?”

그가 짙은 눈동자로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보채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눈빛에서 왠지 모를 자상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다정은 망설임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사정이 어떤지 들으셨나요?”

태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망원은 별다른 도움 없이 원장 아빠 혼자 꾸려나가는 곳이었어요. 부지는 후원자님이 무상으로 쓸 수 있게 해주셨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후원자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거기까지 얘기하는데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쳤다. 보육원을 도와달라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을 원장 아빠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다정은 목을 가다듬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아빠는 저한테 보육원이 철거될 거라는 걸 숨기셨어요. 그래놓고 혼자 아등바등하다 결국엔 응급실에 실려가셨고요.”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려오더니 결국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죄송해요.”

다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하도 울어 이제는 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난다는 게 신기했다.


“문지르지 말고.”

태상은 재킷 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젖어 있는 다정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아…….”

섬세한 손길이었다. 살짝살짝 누르는 게 마치 고양이가 뺨을 핥아주는 것만 같은.

멍하니 그 손길을 받아들이는데 그가 문득 시선을 맞춰왔다.


“이제부턴 다 나한테 얘기하면 됩니다. 이곳은 내 소관이니까.”

“저희…… 정말 안 나가도 돼요?”

다정이 젖은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했다.


“안 나가도 됩니다.”

“임대료도 안 올리실 거예요?”

“그런 거 안 받아도 되니까 눈물이나 그쳐요.”

눈매를 굳히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다정은 울다 말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큰돈을 그런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사장님밖에 없을 거예요.”

“나한테 그냥 그런 거입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자만하게 들렸을 말이었다. 하지만 담담한 그의 말투 탓에 몇 억이라는 돈이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다정은 코를 몇 번 훌쩍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전래동화도 아니고 이런 말 좀 뭐하긴 하지만…… 도와주신 거 잊지 않을게요.”

“까치라도 될 셈입니까?”

“그럼요, 까치가 아니라 더한 것도 하죠.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뭐든 다 해드릴게요.”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닌데.”

태상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함부로 그런 약속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다분했다.

하지만 태상에게 빚진 마음이 있는 다정은 그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함부로 아니에요. 아빠가 이 일을 알면 얼마나 좋아하실 건데요. 우리 애들도 그렇고. 저 진짜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진심이었다.

부모님을 잃고 오갈 데 없던 남매에게 희망원은 따뜻한 집이 되어 주었다. 집과 가족을 지켜준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마른 다정의 눈동자엔 명료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태상이 다시금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여는데 원장실 문이 느닷없이 열렸다.


 


“언니! 내가 주먹밥 만들었어.”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슬이었다. 예슬은 커다란 주먹밥을 휘휘 흔들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


“주먹……밥?”

“응! 언니 밥 안 먹었다 그래서 내가 만들었어.”

예슬은 상기된 표정으로 다정을 향해 바쁘게 뛰어왔다. 작은 손에 들린 주먹밥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자. 먹어.”

“아, 응……. 고마워.”

다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예슬표 주먹밥을 받아들었다.

겉면에 김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안에는 뭐가 들었는지 차마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아저씨는 밥 먹었어요?”

다정의 옆에 꼭 붙어 선 예슬이 이번엔 태상을 향해 물었다. 안 먹었으면 너도 하나 만들어 주겠다, 그런 속마음이 그대로 읽혔다.


“먹었어.”

“그래? 그럼 언니만 먹으면 되겠네.”

예슬은 얼른 먹으라는 듯 다정을 재촉했다.

다정은 하는 수 없이 주먹밥을 한입 베어 물었다.

간도 안 된 맨밥이 밍밍하게 씹혔다. 어떻게든 미소를 지어보려는데 밥알이 잔뜩 붙은 예슬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아이의 모습을 살피자 원피스 앞섶이 꽤 얼룩덜룩했다.

다정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옷이 이 정도가 되었으면 부엌 상태는 안 봐도 뻔했다.


“예슬아, 언니 부엌에 좀 갔다 와야겠다.”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왜? 이거 맛없어?”

“아니, 같이 마실 물이 없어서. 언니 금방 갔다올게. 잠깐만 있어. 알겠지?”

“응. 알겠어.”

예슬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그대로 펄쩍 뛰어올라 다정이 앉아 있던 소파에 앉았다.


“부사장님, 저 잠깐 부엌에 갔다 올게요.”

“……빨리 오는 게 좋을 겁니다.”

바짝 모인 눈썹이며 뻣뻣하게 긴장된 뺨. 놀랍게도 태상은 긴장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멀쩡하던 그가 긴장이라니. 다정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슬이가 다 알아서 할 거예요. 예슬아, 아저씨랑 친구 해줄 수 있지?”

“응. 그럼.”

예슬이 환하게 웃자 듬성듬성 빠진 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금방 갔다 올게요.”

다정은 그렇게 말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태상이 입을 떼는 게 보였지만 짐짓 모른 척을 했다.

-달칵.

다정은 굳게 닫힌 원장실 문에 기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둘이 나 없이 무슨 얘길 하려나……?’

사실 부엌 정리쯤이야 언제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상에게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욕심인 줄은 알지만, 그가 그저 땅 주인이 아닌 정말 보육원을 아끼는 식구가 되어 주었으면 했다.

다정은 최대한 느릿한 걸음으로 부엌을 향해 걸었다.

***

꿀꺽.

고요한 원장실 안 태상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태상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본 일이 없었다.

사촌 동생들은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랐고, 생활 반경에 아이들이라고는 없다. 그런 그에게 지금 상황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저씨.”

고요한 정적을 깬 건 똘망똘망한 목소리였다. 예슬은 굳어 있는 태상이 신기했는지 그의 앞을 기웃거렸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차태상.”

태상이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름이 뭐냐도 아니고 대뜸 누구냐니.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은 들어본 적도 없다.


“어디서 왔어요?”

“……서울.”

“서울에서 여기까지 왜 왔어요?”

“…….”

느리긴 했지만 대답을 잘 내놓던 태상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둔 여자를 위해 관심도 없는 재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런 깊은 사연을 어린아이에게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때, 예슬이 아주 쉽게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아저씨 우리 언니 좋아해요?”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태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예슬이 배시시 웃으며 태상의 옆에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래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야 움직이는 거랬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애들이 다 그래요.”

예슬이 다리를 통통 튀기며 말했다. 신발 뒤축이 소파에 부딪힐 때마다 시트 위로 옅은 흔들림이 느껴졌다.

태상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이내 시선을 떨궈 예슬을 바라봤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쵸? 그래서 말인데요…….”

예슬이 목소리를 낮추며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머지 한 손으로 파닥파닥 손짓을 하는 게 얼른 가까이 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태상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완전히 굽혔다. 그러자 옹알거리는 아이의 말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아저씨는 내가 특별히 허락해 줄게요.”

“……허락?”

태상은 제가 처한 상황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의 허락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있던가. 존재 자체만으로 허락 따위는 필요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슬이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요,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내가 그동안 못 오게 했어요.”

어수선한 아이의 말을 정리하자면 다정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가 많다는 뜻인 것 같았다.

태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


“누구. 누가 언니 근처에 있었지.”

“음…… 같이 살던 원생 오빠들도 그렇고, 자원봉사하러 오는 오빠들도 그렇고…….”

“오빠.”

태상의 목소리가 반 톤 넘게 뚝 떨어졌다.


“응. 오빠들.”

“들?”

이번엔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한 명도 아니고 ‘들’이라니. 태상은 울렁거리는 목울대를 꾹 누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예슬아.”

“네?”

“언니는 회사 일이 굉장히 바쁜 사람이야.”

“알아요. 언니는 비행기 승무원 하거든요.”

“그래. 그러니까 바쁜 언니를 귀찮게 하면 어떻게 될까?”

태상은 김 비서의 말투를 흉내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둔 김 비서는 가끔 태상의 옆에서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별생각 없이 흘려듣던 것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테상은 최대한 눈에 힘을 풀고 예슬을 바라봤다. 아이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음…… 안 될 것 같아요.”

“안 될 것 같은 게 아니라 안 돼.”

“그럼 아저씨는요?”

“무슨 뜻이지?”

“아저씨도 언니 귀찮게 하는 거 아니에요?”

“…….”

아이들은 생각보다 예리한 존재인 건지. 정곡을 찌르는 예슬의 말에 태상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