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무려 땅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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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무려 땅주인
2022.12.25.
“우리 언니 괴롭히지 마!”
다정은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예슬이 철거팀 남자의 다리를 작은 주먹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예슬아!”
“이건 또 뭐야.”
남자는 귀찮다는 듯 아이를 그냥 지나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슬이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허벅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아!”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남자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거칠게 다리를 흔들었다.
예슬은 그 격한 움직임에 앞뒤로 휘청거리다 뒤로 휙 하고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본 다정이 허둥지둥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무릎으로 땅을 짚으며 급하게 일어서는데 예슬은 이미 바닥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슬아!”
비명처럼 이름을 외친 그때.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철거팀 직원들 사이로 불쑥 튀어 나왔다. 검정 슈트 차림의 남자는 빠르게 두 팔을 뻗어 예슬을 받아냈다.
“괜찮아?”
남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묵직하면서도 귀에 착 감기는 게 꼭 태상의 목소리 같았다.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보는데 딱딱히 굳은 태상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예슬과 눈높이를 맞췄다.
“…….”
예슬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태상을 들여다봤다. 낯선 사람을 보고 놀랐다기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예슬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저씨는 누구예요?”
“이 보육원 주인.”
태상의 짧은 한 마디에 주위가 빠르게 술렁였다. 다정은 물론이고 철거팀 직원들까지 모두의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예슬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내놓았다.
“주인? 주인은 우리 원장 아빤데……? 아저씨 아빠 친구예요?”
“그런 셈이야.”
그렇게 말한 태상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예슬을 향해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 후 아이를 밀친 남자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가 애를 때립니까.”
조금 전까지 보이던 부드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예슬을 밀친 남자는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태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때리긴 뭘 때려. 쪼그만 게 달라붙으니까 귀찮아서 떼어낸 거지.”
“말이…… 짧네?”
“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남자는 비아냥거리듯 이죽거리며 태상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었다.
태상의 반도 안 되는 체격, 호리호리한 팔목. 누가 봐도 태상의 상대가 되지 않는 남자였지만 뒤에 잔뜩 거느린 동료들을 믿고 호기를 부리는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남자의 도발을 참고 있기를 잠시, 태상은 커다란 손으로 순식간에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독수리가 물고기를 잡아채듯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틀었다. 태상이 잡은 건 팔목뿐인데 너무 아픈 나머지 온몸이 다 배배 꼬이는 듯싶었다.
“놔, 놔, 놔! 아, 아파!”
“아픈 게 뭔지는 아는 모양이지?”
“당연히 알지, 이 미친놈아!”
“아는데 그래?”
태상이 꽉 쥔 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굵은 손가락은 이미 뼛속까지 파고들 기세였다.
“아악! 야, 이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남자가 악악거리며 도움을 요청하자 머뭇거리던 철거팀 직원들이 태상의 주위를 둘러쌌다. 건장한 남성들이 어깨에 힘을 주며 동그란 원을 만들자 분위기가 금세 험악해졌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신고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손에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였다.
“잠시만요. 선생님, 잠시 말씀 좀 나눕시다.”
그때, 시종일관 리더 행세를 하던 남자가 원 밖에서 입을 열었다. 그는 나란히 붙어선 남자들 몇 명을 밀어내더니 태상의 앞에 가 섰다.
“조금 전에 이 보육원 주인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파하는 직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태상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태상의 당당한 태도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듯했다.
“아, 씨, 반장님!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이 자식 좀 떼어내 봐요. 아파 죽겠네!”
얼굴마저 하얗게 질려버린 남자가 악을 쓰며 말했다. 기회를 보던 다정은 원을 뚫고 들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이제 그만하세요. 예슬이도 안 다쳤고 별일 없었잖아요.”
“…….”
태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착 가라앉은 게 아무래도 쉽게 그를 놓아줄 것 같지는 않았다.
“부사장님.”
다정이 애원하듯 그를 불렀다.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던 태상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그는 쓰레기라도 버리는 듯한 동작으로 남자의 팔을 허공에 내던졌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남자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다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닥에서 몇 번 허우적거린 그는 바닥을 짚고 겨우겨우 일어났다.
“쪼그만 게 달라붙길래 귀찮아서.”
태상은 서늘한 목소리로 남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는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태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도망치듯 무리 사이로 섞여들어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작업반장은 태상 앞에 슬쩍 끼어들 듯 섰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물결치는 게 어느새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실례지만 어느 사의 부사장님이실까요?”
“그건 알 거 없고 이제부터 제가 이 재개발 사업의 총괄 담당자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초, 총괄……?”
벙찐 남자의 입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위잉.
그때, 그의 재킷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인이 적잖은 윗선이었는지, 핸드폰을 꺼낸 남자의 얼굴에 긴장하는 기색이 어렸다.
“예. 이사님.”
그는 급히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며 주변 직원들을 향해 빠르게 시선을 던졌다. 한번 쓱 훑어보고 차를 향해 고갯짓을 하는 게 다시 들어가라는 신호인 것 같았다.
눈치만 보고 서 있던 남자들은 이내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작업반장은 그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동시에 극진한 자세로 통화를 이어 나갔다.
새우처럼 굽힌 등이며 전화를 받든 두 손이 공손하다 못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지금 작업 나온 참입니다. 희망원이라고 부지 끝자락에 고아원 하나 있지 않습니까. 거기가 내일 철거 예정이라…… 네? 네.”
그는 핸드폰을 귓가에 바싹 가져다 대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지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였다.
“아…… 차태상 부사장님이요.”
남자가 태상을 밑에서부터 위로 쓱 올려다보며 읊조렸다. 견적을 내는 듯 움직이던 눈동자는 태상의 얼굴에 이르러 다시 공손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 그럼요. 먼지 한 톨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하하.”
굽신굽신 전화를 이어가던 그는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반듯한 자세로 선 남자의 얼굴엔 어느새 느글느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이고, 차 부사장님,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귀하신 투자자님을 이렇게 세워 두고 제가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자,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
다정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보육원이 제집도 아니고 어디서 차를 대접한다는 건지.
조금 전까지 물건들을 내다 버리겠다고 협박했던 사람이 맞나 싶어 헛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차는 됐고 이 물건들을 안으로 들여놓는 것 좀 도와주십시오. 여기 희망원은 철거 예정 지역이 아닙니다.”
태상이 제 옆에 붙어 서려는 남자를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예, 그럼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말투가 일류 영업 사원 저리가라였다. 그는 차에 있던 직원들을 불러내 물건을 옮길 것을 지시했다.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직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작업반장의 성화에 하나, 둘 부지런히 상자를 나르기 시작했다.
다정은 말끔히 정리되는 물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정말 부사장님께서 이곳 부지를 매입하신 거예요?”
“네.”
“왜…… 아니 어떻게요?”
의아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태상은 발치에 있던 상자 하나를 주워들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건설사에 투자를 했다가 이곳 사정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두고 볼 수 없어서 조금 손을 댄 거고요.”
“조, 조금…….”
재개발 구역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는 하나 희망원은 부지 규모가 꽤 컸다.
이곳을 개발에서 제외하도록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다정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때, 작업반장이 두 손을 탁탁 털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부사장님, 정리 다 마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너저분하던 운동장은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다정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름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잠시 후, 남자들을 태운 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보육원을 빠져나갔다.
“들어가죠.”
태상이 생활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안내라도 하듯 앞서 걷는 그의 뒷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
호기심 어린 아이들의 시선을 물리치고 들어온 원장실 안.
텅 빈 수납장을 바라보는 다정의 시선에 곤란한 기색이 서렸다.
‘분명 이 서랍이 맞는데…….’
원장실에서 차와 커피를 즐겨 마시는 철중은 맨 위 서랍에 티백이며 믹스 커피를 넣어두곤 했다.
커피라도 타드리겠다며 먼저 나섰건만. 텅 빈 서랍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하네요…… 분명 여기가 맞는데.”
“안 마셔도 괜찮습니다.”
기다란 소파 끝에 앉은 태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낡은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검은 소파는 태상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믹스커피나 일회용 티백도 마찬가지였지만.
“죄송해요. 짐을 빼면서 다 치웠나 봐요.”
다정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대각선 방향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자 태상의 시선이 자연스레 얼굴 한쪽에 와 닿았다.
보이지 않는 전류가 볼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나지 않는데 태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잠…… 못 잤습니까?”
“네? 아, 네.”
다정이 저도 모르게 뺨을 쓸며 말했다.
병원에서 밤을 지새운 데다 씻지도 못했으니 지금쯤 몰골이 말이 아닐 거다. 하도 울어 눈도 붕어처럼 부어 있을 게 뻔하고.
엉망일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고맙게도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자연스레 가려주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잠을 못 잤어요.”
“이젠 나한테 얘기해도 되지 않나? 그 이런저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