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건드릴 걸 건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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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건드릴 걸 건드려라
2022.12.22.
수술은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만약 잘못되면 어쩌나, 이대로 영영 못 보는 건 아닐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지는 느낌이었다.
다정은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복도를 이리저리 서성이는데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거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하세요.”
그렇게 불평한 건 철중의 큰아들, 진섭이었다.
그는 수술이 진행되는 내내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다. 돌아올 때마다 진한 담배 냄새가 나는 게 어디서 줄담배라도 피우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초췌한 남자의 얼굴 위로 초조함이 잔뜩 묻어났다. 다정은 고개를 푹 숙이며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휴, 그러니까 그 애들 키우는 일 좀 그만하시라니까.”
다정의 파리한 얼굴에 죄책감이 들었는지 진섭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괜한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는 명절이나 철중의 생일 같은 굵직굵직한 날만 보육원을 방문했었다. 방문했다고 해도 그저 얼굴 한번 내비치고 가는 정도였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보육원 탓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철중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한번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입술을 꾹 깨물며 바닥을 노려보는데 그가 한숨 섞인 말을 작게 내뱉었다.
“없어져서 차라리 잘됐지.”
그의 말투는 꽤 확신에 차 있었다.
원장 아빠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걸까. 다정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시에서 부지를 사들여서 이젠 괜찮아요. 보육원 안 없어져요.”
“…….”
순간, 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표정에 힘을 풀더니 눈동자를 힘없이 떨궜다.
툭 던진 시선에는 씁쓸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아버지가 그래요? 시에서 보육원 어떻게 해준다고? 에휴…… 그렇게 말하고 다니셨나보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말하고 다니다니?”
“거짓말하신 거죠. 떠난 원생들 마음 안 아프게 하려고.”
“그, 그럴 리가…….”
다정은 황망히 떨리는 시선으로 바삐 은혜를 찾았다. 그렇지 않다고, 뭘 잘못 알고 계신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은혜는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정 씨, 원장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다정 씨가 포기를 안 할 테니까.”
“아빠…….”
보육원은 이제 꼼짝없이 철거되게 생겼고, 철중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대되던 오늘이 어째서 끔찍한 악몽이 되어 찾아오는 건지.
다정은 잘 참아왔던 눈물을 끝내 터뜨리고야 말았다.
***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마친 철중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다행히 결과는 양호했고 며칠간의 회복 기간을 거친 후 퇴원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다정은 병원 의자에서 쪽잠을 청한 후 면회 시간이 되자마자 병실에 들어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저 편안히 잠이 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철중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았다. 다정은 은혜에게 그를 부탁하고 바삐 보육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철거는 당장 내일모레였다.
조급한 마음에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어제부터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걸음에 달려간 희망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운동장 여기저기 정신없이 나와 있는 물건들이며 군데군데 펼쳐진 텐트. 흡사 난민촌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오면서 다잡았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 다정이 언니.”
넋을 놓고 멍하니 멈춰 있는데 귓가에 이슬처럼 맑은 목소리가 어렸다. 퍼뜩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다정은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올해로 8살이 된 예슬이는 다정을 유난히 잘 따르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예슬이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손에는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목욕탕에 갈 때나 쓸 법한 바구니 안에는 손전등 하나와 자잘한 간식거리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 이거 우리 비상식량.”
“비상…… 식량?”
“응. 우리 내일부터 캠핑 놀이한대. 텐트 치고 그 안에서 무서운 얘기도 하고 과자도 먹고. 그래서 미리 챙겨놓는 거야.”
“…….”
해맑은 아이의 미소 앞에 다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데 가슴 안쪽이 쿡쿡 쑤셨다.
은혜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보육원 앞에 텐트를 치고 생활할 예정이다.
관리되지 않은 잡초만 무성하게 나 있는 공터.
보육원이 꽤 외진 곳에 있어 정문 양옆으로 제법 공간이 있기는 했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다정은 입술 안쪽을 아프게 깨물었다.
“예슬아, 언니가 미안해.”
“언니가 왜?”
“캠핑…… 좋은 데로 못 보내줘서. 원래 캠핑은 되게 좋은 데서 하는 거거든. 나무도 있고 바다도 있고 그런 데서.”
“언니, 우리 보육원 앞에도 나무 많아! 여기도 캠핑하는 데야.”
예슬이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대답에 다정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프다. 예슬아, 우리 일단 들어갈까?”
“왜 안 먹었어. 그럼 안 돼.”
예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정의 손을 꼭 잡았다. 작은 손이 그렇게 따스할 수가 없었다. 다정은 좁은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본 적 없는 회색 스타렉스 한 대가 보육원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다정은 경계 어린 눈으로 차 문을 주시했다.
거칠게 열린 문 뒤로 보이는 건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빠른 동작으로 차에서 우르르 내렸다.
셋, 넷, 다섯……. 천천히 수를 헤아리던 다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이들만 가득한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보육원 생활관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노골적인 적대감이 어려 있었다.
다정은 예슬을 바라보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예슬아, 언니는 손님들이랑 얘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손님?”
“응. 손님.”
어린아이의 눈에도 그들은 손님처럼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예슬은 불안한 눈동자로 다정과 남자들을 번갈아 봤다. 작은 손에 살짝 힘도 들어간 것 같았다.
다정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며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곤 정체불명의 손님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정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사이, 조수석에서 내린 남자가 무리의 맨 앞으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여기 관리인 되십니까?”
양복 차림의 남자가 손끝으로 보육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턱을 한껏 치켜들며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작은 키 때문에 위엄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본인은 꽤 당당한 포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SN 건설 철거 관리팀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했지 사설 철거 용역이라는 뜻이다. 다정은 허리에 어깨를 반듯이 펴고 섰다. 철중이 없는 지금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건 저뿐이었다.
“아직 철거 예정일이 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요.”
“네. 저희도 압니다. 아직은 아니죠. 그런데…….”
남자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운동장 중앙으로 향했다. 영 마뜩잖은 시선이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물건들 위로 향했다.
“하루 만에 짐 다 빼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 살고 있는 애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괜한 걱정이십니다.”
“아, 괜한 걱정이긴요, 여기 부지 땅값이 얼만데. 철거 늦어지면 저희도 손해배상 만만치 않게 해야 한다고요.”
“…….”
요컨대 너희들이 제때 방을 뺄 것 같지 않으니까 등을 떠밀러 왔다는 건가.
다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 뭐 하는 곳인지 아시죠?”
“참…… 그렇게 나오시면 저희가 너무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까. 저희도 그냥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인데.”
남자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과장되게 눈썹을 꺾는 게 안타까운 심정을 알아달라고 호소라도 하는 것 같았다.
“여기 다 갈 곳 없는 아이들 사는 곳이에요. 내일까지 어떻게든 비워드릴 테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어떻게요. 어떻게 갈 곳을 찾으실 건데?”
남자가 고개를 홱 돌리며 송곳 같은 목소리를 냈다.
“어, 어떻…….”
“설마 어떻게든, 이라든가 그런 무책임한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리고 또, 저기 저 텐트. 설마 여기 대충 눌러앉겠다, 이런 생각하시는 것도 아니시겠고요?”
“…….”
“선생님, 이래서 저희가 미리미리 시찰을 나오는 겁니다. 가만 내버려 두면 세월아, 네월아 걸려서 절대 제날짜에 작업 시작 못 하거든요.”
남자가 발치에 걸리는 박스 하나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며 잔뜩 찌푸린 얼굴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경찰을 불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 피신이라도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그가 뒤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야, 얘들아. 저 텐트부터 다 갖다 버려라. 쟤들 여기 눌러앉으면 골치 아프다.”
“네.”
“자, 잠시 만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말 시간도 없었다. 다정은 우르르 몰려드는 남자들을 몸으로 막아섰다.
“눌러앉겠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아이들 물건에 손대지 말아 주세요.”
“아가씨, 우리 바빠요. 여기 말고도 갈 데 많다고. 얼른 나와요.”
“겨, 경찰 부를 거예요! 아직 철거일도 아닌데 이러면 무단침입이라고요!”
다정이 남자를 노려보며 매섭게 외쳤다. 나름 비장의 카드라고 꺼내든 건데 남자는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애초에 경찰들과의 시비가 일상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다정의 어깨를 툭 치며 걸음을 옮겼다. 둔탁한 충격에 몇 걸음 뒤로 밀려난 다정은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