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연락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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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연락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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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연락하지 마
2022.12.18.
“뭐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습니까.”
우 팀장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는 보는 듯 마는 듯 서류를 대충 한번 훑고 옆자리에 던지듯 올려두었다.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겠지만 이 영상이 퍼져나가면 항공사 이미지에도 타격이 상당할 겁니다. 만약 징계를 철회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영상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고요.”
다정은 ‘이용’라는 모호한 말로 중립적인 입장을 지켰다.
“아니, 그…… 징계라는 게 이 자리에서 바로 확정이 나는 건 아니니까 그런 성급한 말씀을 하실 건 없고…….”
“그런가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다정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과처럼 동그랗게 튀어나온 광대며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졌다.
“크, 크흠…….”
직접 가라고 말하는 건 자존심에 내키지 않았는지, 우 팀장이 옆자리를 향해 슬쩍 눈치를 줬다. 그러자 송 대리가 움찔하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 그, 그러세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과는 따로 연락 갈 거예요.”
“네. 수고하세요.”
다정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고고한 자세를 잃지 않는 게 영락없는 승자의 모습이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내내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후우…….”
문을 닫자마자 가둬두었던 한숨이 명주실처럼 길게 뽑혀 나왔다.
다정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벽에 가만히 기댔다. 평소 안 하던 기싸움을 하니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편안히 시선을 떨구고 바닥을 바라보던 그때,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어렸다.
“아…….”
목 뒤가 바싹 꺾일 만큼 고개를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눈동자의 주인은 담담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분명 징계위 때문에 왔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도 석연치 않았다.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영 이상하다. 다정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여긴 왜 오셨어요?”
“징계위 파투내려고 왔습니다.”
“파, 파투요?”
자극적인 단어 선택에 다정이 토끼 눈을 떴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까만 눈동자를 천천히 내렸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 안에 제가 잘못이 없다는 걸 입증할 자료가 들어있는 듯했다.
“혼자서도 너무 잘해서 끼어들 틈이 없더군요.”
“그냥 어찌어찌 잘 끝났어요.”
다정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싱긋 웃었다. 함께 웃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바짝 올라갔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를 바라보는데 태상이 되레 묵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난번엔 연락 잘 하더니, 이번엔 왜 안 했습니까.”
“아…… 걱정하셨어요?”
“아뇨. 신경 쓰였습니다.”
두 가지 말이 같은 뜻이라는 걸 모르는지 남자가 꽤 어수룩한 대답을 내놓았다. 다정은 피식하는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일은 다 잘 끝났어요.”
“……한다정 씨.”
태상이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허리에 바짝 힘을 주고 섰다.
“네?”
“생각해 봤는데 앞으로는 나한테 연락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갑작스레 휘몰아친 차가운 말에 다정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나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냉정하기만 한 그의 태도가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찔렀다. 다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흐릿한 목소리를 흘렸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어차피 이젠 연락 드릴 일도 없는 걸요.”
“그게 아니라 앞으론 내가 연락할 겁니다. 그러니까 한다정 씨는 안 해도 돼요.”
“네……?”
“며칠 기다리다 깨달았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걸.”
태상이 골이 단단히 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지난 며칠은 고문이 따로 없었다. 멋대로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고문.
고통에 몸이 닳아 없어지는 것만 같은데 전화는 끝내 울릴 줄을 몰랐다.
신사다운 척은 이제 끝이다. 동이 터오는 아침, 태상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설마 엘리베이터에서 했던 그 말 때문에 그래요? 그, 그건 그냥 장난이었잖아요. 징계위가 있으니 나서서 좀 어떻게 해달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잠시 눈을 굴리던 다정이 화들짝 놀라 말을 쏟아냈다.
“그럼…… 역시 답은 하나군요.”
“뭐요?”
“앞으로 연락은 내가 합니다.”
황당한 결론에 다정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기, 기다리게 해드린 건 죄송해요. 설마 징계위 날짜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벌인 일인데 아는 게 당연합니다.”
책임감이 강한 건지 아니면 그냥 고집이 센 건지. 그는 여전히 문제의 시작을 본인에게서 찾고 있었다.
분명 그 어떤 것도 태상의 탓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정은 굳이 그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치라고나 할까. 그의 고집을 꺾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다정은 잘못을 따지기보다 공을 치하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저……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밥 먹으러 가실래요? 도와주신 마음을 생각해서 제가 살게요. 물론 구내식당에서.”
징계위가 열린 본사 건물은 이제 막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사옥이었다.
직원들이 바글바글한 기존 본사 빌딩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제안이지만, 이곳이라면 별다른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구내……식당?”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 없는 단어인지 그의 입술이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네. 제가 뭐 돈 아끼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회사 식당은 직원 복지의 첫걸음이잖아요. 사원들이 매일 어떤 밥을 먹는지 경험해보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약간의 과장이 섞이자 짠한 주머니 사정이 훌륭한 대의로 다시 태어났다. 다정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태상을 바라봤다.
그는 서늘한 눈매에 힘을 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 안에 반짝이는 기색이 스쳤다.
기뻐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정은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갈까요?”
호기롭게 앞장서는데 가방 안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다정은 ‘잠시만요.’라고 읊조리며 빠르게 가방을 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철중이었다. 액정을 바라보는 다정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저 전화 한 통만 할게요.”
빠르게 말한 다정은 몇 걸음 떨어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빠?”
「다정 씨, 저예요. 희망원 은혜.」
“아…… 네. 선생님.”
화면에 뜬 발신인은 분명 철중이었다. 다정은 의아한 듯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왜 아빠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느냐 묻자 은혜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정 씨 지금 어디예요?」
“서울 본사에 잠깐 왔는데 왜요?”
「그게 실은 지금…….」
설명이 이어지기를 잠시, 다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네? 원장 아빠가요? 아, 알겠어요. 제가 지금 갈게요!”
다정은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 던지다시피 넣고 다짜고짜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구두 굽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
정신없이 뛰다 말고 다정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제야 태상의 존재가 생각났는지 돌아본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지금…….”
“가 봐요.”
말을 다 마칠 것도 없었다. 태상이 짧게 끊어 말하며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때마침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열리며 사람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1층에 차 대기시켜 놓을 테니까 타고 가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 멈칫하던 다정이 빠르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장 아빠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금, 한가하게 괜찮다는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병원 앞에 멈춰 섰다. 다정은 감사의 인사도 잊은 채 차에서 뛰어내렸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로비. 다정은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다.
‘아빠…… 아빠…….’
역시 한번은 내려와 봤어야 했는데.
징계위가 결정되고 난 후, 비행 짬짬이 증거 자료를 준비하느라 원장 아빠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보육원 문제가 잘 풀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혼자 무리하고 있을 게 뻔한데. 알면서도 찾아가보지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다정은 철중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다정 씨, 여기예요!”
기다란 복도 중앙에 서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데 뒤쪽에서 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개처럼 몸을 돌리자 근심에 찬 은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헐레벌떡 뛰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
“급성심근경색이래요. 응급 수술 벌써 들어갔고요.”
“그, 급성심근경색이면…… 시, 심장 수술…….”
“네. 심장 안에 있는 혈관이 막혀서 다른 혈관을 떼다가 연결해야 한대요. 수술은 방금 막 들어갔고 6시간 정도 걸린다니까…….”
“…….”
은혜의 입이 계속해서 움직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정은 파리해진 얼굴로 간신히 눈만 깜빡거렸다. 뱃속이 싸했고 손바닥에서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어머, 안 되겠다. 다정 씨, 일단 여기 좀 앉아요.”
한참 말을 잇던 은혜가 다정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는 몸을 받치듯 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은 다정은 힘없이 고개를 툭 떨궜다.
견딜 수 없는 무력감과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또…… 또 잃고 싶지 않아.’
또다시 부모를 잃을지도 모른다. 한 번으로도 끔찍했던 경험이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다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캄캄한 어둠 위로 철중의 웃는 모습이 아스라이 새겨졌다.
“걱정 말아요. 원장님 강한 분인 거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네. 괜찮을 거예요.”
대답은 씩씩하게 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정은 손등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철중이 힘든 수술을 이겨내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괜찮을 거야. 분명 다 잘될 거야.’
다정은 두 손을 꼭 모아쥐고 마음속으로 최면을 걸었다. 하염없이 같은 말을 되뇌는데 입구 위의 ‘수술 중’ 표시는 꺼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