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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런 한 방은 어때? (22/89)


22. 이런 한 방은 어때?
2022.12.15.


고집이 세다니 누가 누구더러 할 소리인데.

태상은 김 비서를 통해 다정의 스케줄을 예의주시하라 일러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징계위가 잡히더니 조사관 자리에 김 상무와 동문인 인사과 팀장이 내정되었다.

이번만큼은 다르겠지. 집에 잘 들어갔다는 형식적인 메시지가 아닌 좀 더 중요한 내용을 담아서 연락을 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기를 며칠이었다. 하지만 다정은 이번에도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

깊은 한숨이 와인잔 안에 고였다. 그는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상이 향하는 곳은 오늘도 거실이었다.

거실에서라면 오늘도 달콤한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에어 코리아 신사옥 회의실 안.

다정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면을 응시했다. 아직 징계위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결백함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책상 너머에는 두 명의 조사관이 앉아 있었다.

마주 보는 곳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 남성이, 그리고 그 옆자리에는 자신을 송 대리라 소개한 젊은 여자 직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징계위 진행 순서를 알려주며 친절한 태도로 다정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저는 주로 말씀하시는 내용을 타이핑 할 거고요, 질문은 여기 계신 팀장님께서 해주실 겁니다.”

“반갑습니다. 인사과 우 팀장입니다. 한다정 승무원, 오늘 어떤 사항으로 오신지는 이미 알고 계시죠?”

우 팀장이 테가 얇은 안경을 바싹 밀어 올리며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다정의 간결한 대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징계위가 시작되었다.

우 팀장은 불만이 접수된 해당 편명, 날짜 등을 언급한 후 본격적으로 불만 레터를 읽어나갔다.


“다른 클래스에 실리는 와인은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냥 좀 물어본 것뿐인데 승무원이 대놓고 무시를 했다, 상위 클래스 손님이 아니면 마실 수 없다며 많은 사람 앞에서 면박을 줬다. ……이렇게 응대하신 게 사실입니까?”

소설에 가까운 불만 편지는 인트라넷 시스템을 통해 이미 읽어본 터였다.

다정은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손님의 경제적 여건을 비하하는 발언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손님께서는 처음부터 퍼스트 클래스 와인을 가져오라고 당당히 요구하셨고요.”

“네. 그래요.”

우 팀장은 다정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선이 곱지 못하다고 느꼈는데 역시 착각이 아니었던 듯싶었다.

다정은 옆자리에 앉은 송 대리를 슬며시 바라봤다. 최소한 중립적인 의견을 내주기를 바랐는데 그녀는 타이핑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클래스 물품을 반입할 수 없다는 내부 규정은 설명해 드렸나요?”

“네. 물론입니다.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결국엔 퍼스트 클래스 와인을 서빙하셨죠?”

다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 팀장이 꼬리를 잡았다.


“아뇨. 실제 와인은 아니고 직접 고르실 수 있도록 리스트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왜 규정을 어겼습니까?”

가늘게 뜬 그의 눈에서 가벼운 힐난이 느껴졌다.

다정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 왜 규정을 어겼느냐며 질책, 안 들어주면 고객 만족도를 떨어뜨렸다고 또 질책. 모르는 사이에 핀볼 기계 위에 놓인 공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다정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님께서 비즈니스 클래스 와인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주변 승객분들께 방해가 되어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수밖에 없었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이유가 참 잘 준비되어 있으시네요.”

“준비된 이유가 아니라 그저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어찌 되었든 미흡한 응대로 프리미엄 멤버인 고객님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건 어떤 변명으로도 비껴가지 못해요.”

마치 원래부터 그런 결론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는 듯, 그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다정은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는 우 팀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데 우 팀장이 노트북 옆에 놓여 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A4 용지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앞으로 내밀었다.


“읽어보고 사인하세요.”

“…….”

맨 위에 적혀 있는 제목을 읽은 다정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직급 변동 동의서’

아주 우아한 말로 표현된 한 장의 서류를 요약하자면 일반석 승무원으로의 직급 강등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입사 후 지난 3년, 승진의 사다리를 열심히 밟은 다정은 얼마 전부터 상위 클래스 승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몇 년 더 열심히 일해 부사무장으로 진급하기를 꿈꿔왔건만 갑자기 강등이라니. 그렇게 되면 승진은 영영 물 건너가는 것이거니와 봉급 삭감도 피할 수 없었다.

다정은 참담한 심정으로 우 팀장을 바라봤다.


“보통 징계 결과는 내부 회의가 진행된 후에 통지되는 거로 아는데요.”

“보통은 그렇긴 한데……. 서로 바쁜데 뭐 하러 시간 낭비합니까. 사안이 너무 명백해서 그냥 미리 준비했어요. 자, 빨리 인정하고 끝냅시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이 자리에 들어온 게 분명했다.

단순한 지시였을까, 아니면 대가성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학연이나 지연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다정은 책상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애초부터 이 자리에 희망 따위는 없었던 거다.


“사인…… 못 하겠는데요?”

“뭐, 뭐요?”

 

 
순둥한 얼굴에서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 튀어나온 탓일까. 우 팀장이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다정을 바라봤다.


“사실이 아니라서 인정할 게 없고, 잘못한 게 없으니 강등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정은 조용히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쭉 밀려난 서류는 우 팀장 앞에 멈췄다.

그는 서류와 다정을 번갈아 보다 이내 기가 막힌다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하.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자꾸 우기면 우리도 징계 수위를 높일 수밖에 없다고요.”

“우기는 건 제가 아니라 불만을 접수하신 승객입니다.”

“한다정 승무원,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저희는 한다정 씨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는 증언을 이미 확보된 상태입니다. 그날 같이 일한 동료 승무원들로부터요.”

“그런가요?”

다정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증언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그들의 편의에 맞춰 짜깁기된 보고서일 게 뻔했다.

다정은 차분한 얼굴로 옆자리에 놓여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럼 저도 증거 하나 보여드려도 될까요?”

“증……거?”

“네.”

가벼운 목소리로 답한 다정은 가방 안에서 태블릿 PC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우 팀장은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다정의 물건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느새 징계위의 주도권은 완전히 다정에게 넘어와 있었다.


“이걸 좀 봐주시죠.”

다정은 태블릿 PC 화면을 두드려 동영상 하나를 불러왔다. 세로 모드로 촬영된 1분 남짓의 영상에는 방금 막 준비된 기내식이 화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긴박한 목소리가 먼저 새어 나왔다.


「야, 대박, 대박. 찍고 있어?」

「응. 진짜 장난 아니다. 말로만 듣던 진상. 진짜 장난 아니네.」

대화 소리와 함께 점점 카메라 영상에 줌인이 들어갔다. 태블릿 PC에 가득 찬 건 다리를 척 꼬고 앉은 김 상무의 모습이었다.

그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허공으로 종이 한 장을 던졌다. 와인 종류가 적힌 리스트는 앞에 서 있는 다정의 무릎에 맞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와인 한 잔이 아쉬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화면 속 다정은 공손한 태도로 남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진심 어린 사과에도 그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릎 꿇어.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안 그럼 내가 어떻게 아나.」

「소, 손님, 아무리 그래도 무릎이라뇨…….」

울먹이는 다정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났다. 다정은 담담한 얼굴로 화면을 덮었다.


“…….”

누가 봐도 명백한 증거 앞에 두 명의 조사관은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후, 우 팀장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크, 크흠…… 그래요. 뭐, 태도가 불량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군요.”

“다른 부분 역시 전부 다 사실이 아닙니다.”

다정이 정확히 선을 긋자 그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우 팀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턱짓으로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이건 어디서 난 겁니까?”

“손님들께서 SNS에 포스팅한 걸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우연히요?”

“네. 아주 우연히.”

다정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사실 사력을 다해 찾아낸 자료였지만 이렇게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얄미울 것 같았다.

징계위 회부가 통보되던 날, 다정은 바로 선배들에게 연락을 했다.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지 조언을 구하자 모두 하나같이 증거의 중요성에 대해 입을 모았다.

사진이나 영상, 아니면 그 현장을 목격한 승객 혹은 동료 승무원의 진술서. 어떤 것이든 좋으니 반드시 준비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마친 다정은 고민에 빠졌다.

증거를 찾겠다고 승객 명부를 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그날 비행기에 탔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찾은 해결책이 SNS였다. 혹시 그날의 사진이나 영상이 올라와 있다면 무엇보다 훌륭한 증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2시간이 넘는 폭풍 검색 후 포기하려던 찰나, 다정의 눈을 사로잡은 건 ‘요즘 비행기 진상 승객 클래스’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영상은 몇천 단위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다정은 계정 주인에게 빠르게 연락을 취했다.


“이건 해당 동영상을 촬영하신 승객께서 직접 작성해 주신 목격담입니다. 읽어보시면 더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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