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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계략의 계략 (21/89)


21. 계략의 계략
2022.12.11.


태상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미소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김 비서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며 차 회장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옆집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온화하기 그지없는 얼굴인데 어쩐지 그게 더 무서웠다.


“요새 일하는 데 힘든 건 없고?”

“없습니다.”

“그래. 결혼식 준비가 일정에서 송두리째 날아갔으니 일하기는 편할 거야.”

“…….”

김 비서는 차마 긍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예물은 물론이고 신혼집 장만에 식 올릴 날짜를 잡는 일까지. 사실 그동안 결혼과 관련된 태상의 일정은 모두 김 비서가 나서서 처리해왔다.

이러다 신랑 입장도 내가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까지 했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김 비서는 불량한 속내를 감추며 애써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근심이 늘어 걱정입니다.”

차 회장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떠보는 듯한 말을 던졌다.


“오늘 회의는 어찌 된 일인가? 일정도 한가할 텐데 지각이라니.”

“면목 없습니다.”

“뭐 때문에 늦은 거지?”

“부사장님이 늦잠을…… 잤습니다.”

“그 녀석이?”

“예. 합병 추진과 관련해 업무량이 늘다 보니 아무래도 피곤이 쌓인 듯합니다.”

김 비서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밤을 함께 지새운 남녀의 모습은 회사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하지만 태상의 사생활을 고해바치는 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었다. 비서로서의 신념이 그랬고 태상을 아끼는 마음이 또 그랬다.

유일한 목격자인 저만 입을 다물면 될 일이다. 김 비서는 차분한 얼굴을 하고 공손히 시선을 내렸다.


“흠, 그래? 그거 이상하군.”

“뭐가…… 말씀이십니까?”

“태상이 말로는 사적인 이유라고 하던데.”

“예? 부사장님이 그, 그런 말을 했습니까?”

차 회장이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비서는 놀라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런 폭탄 같은 발언을 했으면 했다고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어야지. 가운데서 고생하는 제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몰라주었다.


“누군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거지?”

차 회장이 조금 더 은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모른다……?”

인자한 얼굴을 고수하던 차 회장이 갑자기 냉랭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본모습을 마주한 김 비서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회장님, 제가 하루 종일 부사장님과 함께 있는 건 맞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또 안다고 해도 부사장님의 동의가 있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고요. 죄송합니다.”

“그래?”

“네.”

차 회장의 싸늘한 눈빛이 피부 위로 스몄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렇지……. 비서라는 사람이 함부로 상사의 일을 떠들면 그거야말로 실격이지.”

“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이만 나가 봐.”

“예?”

김 비서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차 회장은 원하는 것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오늘따라 자주 목격하는 그의 낯선 모습에 영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어서 나가보래도.”

“예…….”

김 비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어정쩡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아, 그런데 말이지.”

“예. 회장님.”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김 비서가 금세 차렷 자세를 취했다.


“자네 둘째가 얼마 전에 돌을 지났다고 했나?”

“지난달이었습니다.”

“그래. 축하하네. 그런데 어쩌나…… 한창 귀여울 때 해외를 나가게 돼서.”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줄곧 태상이를 미국 지사로 보내고 싶었다네. 그런데 믿고 함께 보낼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

집무실 안 공기가 갑자기 더워진 걸까. 아니면 넥타이가 갑자기 목을 조이는 걸까. 분명 둘 중 하나인데 뭐가 답인지 알 수 없었다.


“김 비서가 이리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니 내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주게.”

“회, 회장님 그건…….”

“설마 싫다는 건 아니겠지?”

차 회장이 눈썹 끝을 가파르게 올렸다. 한일자로 굳게 닫힌 입에서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 비서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싫을 리가요. 물론 아닙니다. 다만…… 한성 항공 합병 문제도 그렇고 부사장님께서 아직 에어 코리아 내에서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한 것뿐입니다.”

“그까짓 소소한 일감은 다른 치들에게 주어버리면 그만이야. 태상이는 더 늦기 전에 큰 시장에서 경험을 쌓아야지. 결혼도 물렀겠다, 한국에 꼭 붙들어 놓아야 할 이유는 없네.”

“…….”

영혼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태상의 비밀을 토해내거나, 아니면 꼼짝없이 미국으로 가거나. 눈앞에 길은 두 갈래였지만 어느 쪽으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낯빛이 파리하게 변해가는데 차 회장이 마지막 한 수를 두었다.


“자리 잡고, 경험 쌓고…… 한 5년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알고 김 비서는 그만 나가 봐.”

“회, 회장님……!”

김 비서는 눈썹을 잔뜩 모은 채 고개를 들었다. 죄책감이 가득 들어찬 얼굴에서 이미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있습니다. 부사장이 꼭 한국에 있어야 할, 그런 사적인 이유가.”

 

 

***

고요함이 감도는 집무실 안, 차 회장이 국화차를 들이켜며 달게 웃었다.


‘어떤 여성분과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회의에 늦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게 누군가.’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믿어주십시오.’

 
차 회장은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뻣뻣하기만 한 손주 녀석이 뭐라 하며 제 짝을 소개해줄지.

그 진귀한 모습을 온전히 즐기려면 지금 당장 치미는 궁금증은 잠깐 참아야 했다. 차 회장은 기대감에 찬 얼굴로 조용히 허공을 바라봤다.

이대로 무사히 결혼만 해준다면 죽어서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그가 깊은 사념에 빠져 있는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윤 실장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음, 그래. 보고할 일이 있다고?”

“예.”

윤 실장은 고개를 짧게 숙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경직된 표정에서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 회장이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서서히 거둬들였다.


“어디야.”

그는 익숙하게 문제의 진원지부터 파악했다.


“에어 코리아, 차태상 부사장 쪽입니다.”

“…….”

차 회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윤 실장이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 PC를 향해 손을 뻗쳤다. 윤 실장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기기를 차 회장에게 넘겼다.

화면에는 인터넷 신문 기사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재벌 3세의 은밀한 비밀’

[얼마 전 일방적으로 결혼을 취소한 경영인 A 씨.

그는 평소 능력 여하와 관계없이 실무진들을 무조건 남성으로만 채우며 여성의 승진 기회를 대거 박탈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자극적인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뒤로 갈수록 날조의 정도가 심해졌다. 게다가 A 씨가 태상임을 알리는 힌트를 의도적으로 심어놓기까지 하였고.

차 회장은 노기 어린 표정으로 화면을 껐다.


“출처는.”

“트루 코리아라는 인터넷 신문사입니다.”

효성을 대놓고 거스르는 무모함이며 근거 따윈 제시하지 못하는 기사 수준. 예상대로 공신력 없는 매체였다.

그냥 무시해도 될 정도의 소소한 잡음이다. 하지만 작은 신문사를 시작으로 말이 나돌면 그땐 대형 언론사도 보도에 편승하기 마련이었다.

차 회장의 얼굴에 고뇌하는 듯한 기색이 어렸다. 이윽고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로 둬.”

“예?”

“내버려 두라고.”

차 회장이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며 말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짓눌린 소파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내 죽기 전에 증손주를 볼 것 같거든.”

차 회장의 얼굴에는 어느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


 
별다른 취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서재. 창밖에 내려앉은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류가 또 한 장 넘어갔다.

태상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나열된 숫자를 훑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움직이던 검은 눈동자가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짧게 멈칫하는 모습이 마치 잘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 같았다.


“…….”

그는 단정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잠금을 해제하자 김 비서와 주고받던 메신저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재무제표 다시 보고 올리라고 해주십시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태상이 급히 손끝을 물렸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새벽 3시를 넘어간 시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태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메시지를 지웠다.

산더미 같은 서류 옆에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는데 김 비서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날짜 변경된 사항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징계위는 예정대로 내일 정오에 열릴 예정입니다.」
 


“…….”

태상의 고운 이맛살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그는 한동안 화면을 들여다보다 책상 끄트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잡아끄는 건 짙은 향을 풍기는 레드와인이었다.

잔허리를 쥐고 가볍게 돌리자 붉은 액체가 빙그르르 돌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는 손목을 살짝 꺾으며 잔을 기울였다. 곧, 조각 같은 입술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하.”

목울대가 한번 움직이더니 그의 입에서 기가 찬다는 듯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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