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말이 안 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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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말이 안 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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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말이 안 되는 사이
2022.12.08.
다정의 하이브리드 패션을 뒤늦게 알아차린 영미가 놀란 듯 목소리를 키웠다. 그녀는 커다란 안경을 위로 쭉 올리며 다정을 빠르게 훑었다.
“어? 이게 그러니까…….”
다정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카락 끝만 만지작거렸다.
어젯밤에 집에 왔는데 네가 남자친구와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어서 들어오지 못했고, 그 결과 부사장님의 집에서 잤다.
그런 이야기는 차마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한다 한들 믿기지도 않을 것이다.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가방 속에서 청량한 알림음이 들렸다. 태상이 보낸 답장일까.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는데 눈치 없는 눈동자가 슬슬 옆으로 움직였다.
“비행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잠깐만.”
다정은 빠르게 읊조리고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퍼를 여는 손에 다급함이 잔뜩 묻어났다.
「잘했네.」
“치, 뭐야…….”
메시지를 확인한 다정의 입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상의 답변은 누가 봐도 그가 보낸 답장이었다.
저도 회의 참석 잘했습니다.
혹은.
그럼 잘 쉬세요.
그런 성의 있는 답변을 기대한 제가 어리석었던 걸까. 무심한 답변에 아랫입술이 비죽이 나왔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게 또 그 남자다운 답장인 것 같기도 했다.
다정은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짧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문자가 꽤 정감 있게 느껴졌다.
“어, 뭐야? 너 지금 그거 뭐야.”
가만히 다정을 지켜보던 영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응? 뭐가 뭐야?”
“지금 그거, 딱 봐도 멜로눈깔인데!”
영미는 젓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170cm가 넘는 큰 기에 왕방울만 한 눈동자가 더해지자 다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야! 멜로는 무슨. 그냥…… 그냥 웃겨서 웃은 거야.”
“웃기고 있네. 야, 얼른 앉아.”
영미가 젓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정은 찍소리도 못하고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불같은 성격의 영미는 흥미가 올랐을 때 뭐든지 끝을 봐야 하는 타입이었다. 이럴 땐 조용히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상책이다.
천천히 의자를 끌어당기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영미가 질문을 던졌다.
“남자지.”
“응.”
“썸?”
“아니.”
“그럼? 간 보는 중?”
“아니야. 썸도 아니고 간도 아니고 그냥…… 그냥 신세 진 사람.”
영미는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머리띠를 다시 한번 고쳐 쓰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런 미소, 그런 눈빛. 그냥 신세 진 사람한테 나오는 거 아니다.”
“그, 그런 게 어딨어. 우린 진짜 별 사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 아예 말이 안 되는 사이야.”
“말이 안 되는 사이는 또 뭐야.”
영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니까, 그게……. 암튼, 그런 건 다 말이 안 돼. 말이 안 되는 사이라고.”
다정이 손을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그의 세상에 하룻밤 발을 들여놓았다고 해서 그 속에 사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착각에 빠질 만큼 순수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다정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영미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생각하는데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다정은 물을 한 컵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안에 자꾸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야, 말이 되는 사이, 안 되는 사이 그렇게 나누면 연애는 언제 할래? 응?”
“때가 되면 하겠지…….”
또 시작된 격렬한 걱정에 다정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동생 챙기랴, 보육원 들락날락하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정에게 연애란 먼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영미는 그런 친구의 사정이 안타까우면서 못마땅했다. 주는 사랑 말고 받는 사랑도 좀 했으면. 그게 친구이자 동기인 그녀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때가 안 오면 내가 만들어 줘? 문자 보낸 남자 진짜 별 사이 아니면 소개팅 시켜줄게. 도훈 씨 회사에 너 소개시켜달라는 사람 줄 섰어.”
“아니야. 난 괜찮아.”
“왜 괜찮은데.”
“바빠. 보육원 일 때문에…….”
보육원 이야기가 나오자 다정의 낯빛이 흐릿해졌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보육원 식구들이 길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이번 주말에 나도 같이 갈까? 요샌 봉사 활동 하러 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잖아.”
“아, 아니야. 괜찮아. 대학생들 많이 와.”
“진짜야?”
“응. 그럼. 진짜지.”
안 그래도 후원이다, 봉사 활동이다 도움을 많이 준 그녀에게 철거 문제로까지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다정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른 밥 먹어. 다 식겠다.”
식어가는 밥은 이야기를 돌리기에 가장 적당한 핑곗거리였다.
***
하늘이 어둑해질 즈음, 다정이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머릿속이 맑고 몸이 가뿐한 게 오래간만에 아주 푹 잔 느낌이었다.
핸드폰을 더듬거려 시간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한나절이 훌떡 지나 있었다.
다정은 눈을 비비며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잠들기 전 텅 비어 있던 화면에는 어느새 각종 메시지며 알람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다정은 철중으로 온 문자부터 확인했다.
「요새 바쁘니? 이거 보면 연락 좀 줘라.」
“…….”
짤막한 글 한 줄을 읽는 다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깨 통증이 또 도진 걸까. 아니면 재개발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걸까.
걱정이 앞서다 보니 생각이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다정은 자리에 바로 앉아 철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에 반가운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어, 다정아.」
“아빠, 보육원에 무슨 일 있어요?”
「녀석아, 전화하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그게 뭐야.」
“네? 아, 그게…….”
보육원이 철거될 위기라는 건 어디까지나 원장 아빠와 몇몇 선생님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저는 모르는 거로 되어 있는 이야기이건만 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본심을 흘려버렸다. 다정은 재빨리 자연스러운 변명거리를 찾았다.
“요새 선생님들 부족해서 일이 많잖아요. 아빠 어깨도 안 좋고.”
「걱정 말아.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충분하긴요. 아빠도 이제 할아버지 소리 들을 나이인 거 잊었어요?”
「그건 그렇지.」
동의하는 듯한 가벼운 웃음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 후로도 다정은 장난 섞인 안부를 몇 마디 던졌다. 철중은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며 가볍게 대꾸를 했는데 어쩐 일인지 점점 말 사이에 간격이 길어졌다.
이윽고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정아.」
“네…….”
「너 요새 퇴소생 친구들한테 연락하고 다닌다며?」
“네? ……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요.”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 보육원 철거된다는 얘기, 들은 거지?」
“…….”
비밀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누구를 통해 이야기를 들은 건지. 다정은 친구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며 속으로 원망의 말을 던졌다.
“죄송해요. 걱정하실까 봐 말 안 했어요.”
「죄송하긴. 네가 이럴 줄 뻔히 알면서 가만히 있었던 내 잘못이지. 내가 미안해.」
“아빠…….”
「이제 보육원 일은 이제 걱정 안 해도 된다. 그 말 하려고 전화하라고 한 거야. 얼마 전에…….」
“아빠!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다들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지금 연락 주겠다는 복지 재단도 있고, 인터넷 모금 카페도 만든 참이니까 조금만 기다려보면…….”
「어이쿠, 얘가 오늘따라 뭐가 이렇게 급해.」
“네?”
「얼마 전에 시에서 우리 부지를 매입하기로 결정을 했어. 그러니까 이제 걱정 안 해도 된다.」
“정말요? 어, 어떻게 그렇게 됐어요?”
「부지 주인이 끝까지 마음을 안 바꾸는 걸 복지과 분들이 나서서 설득해 주셨단다. 다행히 적당한 가격에 권리를 포기해 주셨어.」
“아…… 진짜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다정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원장 아빠와 보육원 걱정에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길 수 없었던 며칠이었다. 도움을 주겠다는 데가 없어 막막하던 차였는데 희소식도 이런 희소식이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마음 놓고 있어라. 알겠지? 아빠 끊는다.」
“네. 그럴게요. 근데, 아빠!”
「응, 왜.」
“어깨는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아이고…….」
기다란 한숨을 시작으로 철중이 한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매번 듣는 소리이건만 지겹지도 않은지 다정이 헤실헤실 웃으며 찰진 대답을 내놓았다.
다정은 곧 내려가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맛있는 거 시켜 먹어야지.’
가슴을 누르던 답답한 돌덩이가 사라지자 입맛부터 돌았다. 다정은 콧노래를 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이 나서 배달 어플을 켜는데 핸드폰이 손안에서 부르르 떨렸다.
짧은 진동을 선사한 건 회사에서 온 신규 이메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메일함을 여는데 화면 가득 들어찬 단어들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잠시 후, 다정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지, 징계위? 이 인간들 미친 거 아니야?”
메일의 내용인즉슨, 불성실한 업무 태도로 승객의 불만이 접수되었으니 징계위원회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사건이 있었던 날짜와 편명, 제기된 문제 사항. 세부 내용이 적힌 보고서가 함께 첨부되어 있었지만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누가 접수한 불만 사항인지는 안 봐도 뻔했으니까.
“하.”
기막힌 한숨이 툭 터져 나오는데 억울해서 손까지 다 떨렸다. 억지 불만을 제기한 남자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징계위를 여는 회사도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사실상 징계위는 그저 형식에 불과했다. ‘을’에게도 소명의 기회를 주는 하나의 겉치레.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끝나고 나면 온갖 불이익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인사 고과 하락, 감봉, 혹은 직급 강등. 어떤 처분 하나도 그냥 쉽게 넘길 만한 게 없었다.
다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징계위는 모레 정오. 그때까지 도움을 청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다정은 눈에 힘을 주고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
어둑한 밤하늘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
차 회장은 음미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응접 테이블 위에 올려진 차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고, 방 안의 분위기는 한없이 여유로웠다.
김 비서는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얀 공기가 일렁일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녹는 것 같았다.
“내 너무 늦은 시간에 불렀지.”
차 회장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밖에 둔 채였다.
“아닙니다.”
경직된 목소리가 넓은 회장실에 딱딱하게 울렸다. 차 회장은 가볍게 웃으며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에는 빙그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인자한 미소에 김 비서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저를 따로 부르는 이유는 으레 둘 중의 하나였다.
태상의 약혼 문제이거나 아니면 태상의 결혼 문제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