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19/89)
19.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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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2022.12.04.
명옥이 두 손을 무릎 위에 단정히 포개며 말했다. 그녀는 절박함을 숨긴 채 태연한 척을 했다.
두 사람은 난처한 듯 턱을 쓸며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수빈 팀장은 효성 그룹의 일명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영업팀에서 자리를 잡나 했더니, 면세 사업부로. 면세 사업부에서 어느새 또 마케팅 팀으로.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던 그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황당하게도 전업 사진작가라는 예술가의 길이었다.
“수빈이가 회사 일에 재미를 못 붙여서 그렇지, 마음만 잡으면 실적 내는 아이인 거 다들 잘 아시잖아요.”
“크흠…… 그야 그렇지만…….”
명옥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곤란한 듯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모든 일에는 시기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죠.”
“지금이 뭐 어때서요? 허 상무님, 시기는 만들기 나름이에요.”
“회장님이 저렇게 장손만 싸고도는데 무슨 수로요.”
남자가 여전히 회의적인 투로 말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 이사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혹시…… 뭔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있죠.”
명옥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는 화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가 곧 있을 항공 안전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매해 국토교통부에서 개최하는 항공 안전 세미나는 항공 업계의 최근 이슈와 과제에 대해 논하며 관계자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에어 코리아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매해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고, 올해는 무려 두 부문에서 수상을 할 예정이었다.
“올해의 안전 항공사 상은 차태상 부사장이 수상을 하게 될 겁니다. 시상은 이분께서 나서주실 거고요.”
명옥이 핸드폰 화면을 돌리며 말했다.
화면에는 포털 사이트의 인물 검색 결과가 띄워져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 여성의 사진 아래에는 ‘국토해양부 항공정책실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개를 쭉 빼고 화면을 확인한 두 남자는 의문스럽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아직 그녀의 의중이 파악되지 않은 듯했다.
명옥은 소파 앞쪽으로 몸을 숙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께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차태상 부사장은 병적으로 여자를 싫어해요. 근처에 있는 건 물론이고 몸이 닿는 건 상상도 못 할 만큼요.”
“그건 그냥 직원들이 부풀린 소문이지 않습니까. 차 부사장이 워낙 일밖에 모르다 보니.”
윤 이사가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명옥이 단호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뇨. 헛소문이라는 소문으로 진실을 가린 거예요. 전부 다 사실입니다.”
“…….”
고고해 보이기만 한 태상에게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두 사람은 벙찐 얼굴로 명옥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 정보가 제게 어떻게 득이 될지 생각하느라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 모습에 명옥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녀는 뱀처럼 미끈하게 다리를 꼬며 설명을 이었다.
“부사장 비서실에서는 시상식 전에 메일을 한 통 보낼 겁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 단상에서 악수 말고 목례로 인사를 대신해 달라고.”
“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중요한 회의, 계약, 미팅. 항상 그래왔습니다. 물론, 극비였고요.”
“그랬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당연하죠. 철저하게 가려진 약점이니까. ……하지만.”
명옥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두 남자를 번갈아 봤다.
“이번 메일은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비서실에 제가 손을 좀 써 뒀거든요.”
“…….”
두 사람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정부 관계자와 기자들은 물론이고 회사 내 중요 인사들이 전부 모인 자리. 그런 자리에서 부사장이 악수를 거절하고 뒷걸음질을 친다면……. 분명,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확실히 타격이 있긴 하겠네요. 하지만 그 정도로 차태상 부사장의 입지를 흔들어 놓을 수는 없을 텐데요? 그저 별난 취향 혹은 한 번의 실수 정도로 취급되겠죠.”
윤 이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겠죠. 시상식은 그냥 하나의 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쇼.”
“그럼 본체는 뭡니까.”
“차태상 부사장이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한다는 증권가 소문, 그를 뒤따르는 언론 보도. 그리고 주가 하락.”
“…….”
명옥이 이렇게까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줄은 몰랐던 두 사람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지으실 거 없어요. 제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두 분은 그냥 저를 좀 도와주기만 하면 돼요.”
“도움이라면 어떤……?”
“기사가 터지기 시작하면 이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주세요. 차태상 부사장, 아무래도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대주주들 만나서 정신과 진료받는다는 얘기도 슬쩍슬쩍 흘리시고요.”
“……이 일을 알게 되시면 회장님께서 가만히 있질 않을 텐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태상이다. 아끼는 손주를 언론에 먹잇감으로 던져준 게 들통나면 누구라도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윤 이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쭉 물렸다. 그러자 명옥이 이 말만은 꺼내기 싫었다는 듯,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아요. 어려운 선택인 거 압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들도 김기주 상무님 꼴 나는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 상무가 심약한 강아지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어머, 아직 말씀 못 들으셨어요? 의견 충돌 몇 번 있었다고 여객부 김기주 상무님을 해고처리 한다고 하네요. 차태상 부사장님께서, 친히.”
명옥이 충격이라는 듯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그녀의 말은 반토막짜리 진실이었다. 태상과 김 상무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당연히 의견 충돌도 없었다.
하지만 동생이 비행기에서 납품 업체 선정에 대해서 나불나불 잘도 불어댔으니, 늦든 빠르든 그는 어차피 해고가 될 운명이었다.
편의에 의한 날조와 적당한 사실. 두 가지가 적절히 섞이자 아주 훌륭한 거짓말이 탄생하였다. 명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다들 아시겠죠?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가만히 있으면 우리 다 같이 죽는 거라고요. 이사님들도 저도, 우리 수빈이도.”
“…….”
벌써 태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두 사람의 낯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허 상무는 눈에 힘을 바짝 주며 명옥을 바라봤다.
“아, 알겠습니다. 주주들은 저한테 맡기세요.”
“이사회에는 제가 힘을 좀 써보겠습니다.”
“…….”
됐다.
명옥은 간사한 미소를 손바닥으로 가린 채 최대한 감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도움은 잊지 않을 거예요.”
때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그녀의 말은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
어제 한 번 왔던 곳인지라 운전기사는 어려움 없이 다정의 집을 찾았다. 그는 오래된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트롤리를 내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정이 손잡이를 잡으며 부드럽게 허리를 굽혔다.
임무 수행을 마친 기사는 딱 적당한 깊이만큼 고개를 숙이고 훌쩍 차에 올라탔다.
다정은 커다란 세단이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낡고 허름한 건물들 사이를 헤치고 나서는 고급 승용차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법에서 풀린 신데렐라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왠지 모를 허탈함이 밀려왔고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썰렁했다.
아무래도 제게 닿았던 순간순간 남자의 체온이 너무 높았던 탓이리라. 다정은 허한 마음을 태상의 탓으로 돌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빌라 유리문에는 어디서 붙였는지 알 수 없는 전단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다고 알려야 할까. 그 정도 연락은 하는 게 맞는 걸까. 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다정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당치않은 생각을 털어냈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집요하게 엉겨 붙었다.
‘또 연락 안 할 겁니까.’
그냥도 아니고 또. 또 안 할 거냐니. 고집스러운 한 마디가 머릿속을 다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다정은 끙 하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옆에 있지도 않은데 왜…….’
곁에 있지도 않은 남자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그냥 모른 척하려고 해도 고집스러운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결국, 두 손이 가방으로 향했다. 다정은 트롤리 윗주머니에서 지갑과 핸드폰을 꺼냈다.
카드 수납공간 가장 안쪽을 더듬거리자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만져졌다. 태상의 명함이었다.
다정은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찌릿 노려보다 이내 결심한 듯 메신저 창을 열었다.
「저 한다정인데…….」
토독토독. 일단 쓰긴 했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
「오늘 정말 감사했…….」
「회의는 잘하셨나…….」
“아악! 진짜!”
다정은 방금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강아지처럼 머리를 푸드덕 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액정을 노려보기를 한참, 다정은 결심한 듯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억울한 일도 없었고, 누가 괴롭힌 것도 아니긴 한데요……. 딴 데 안 새고 집에 잘 왔다고요.」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누른 다정은 그대로 핸드폰을 가방에 던져 넣고 지퍼까지 야무지게 닫았다. 뭐라 답장이 오든, 아니, 아예 안 오든 상관없었다.
다정은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머릿속에서 떠도는 남자의 잔상을 지워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숨이 꽤 가쁘게 차오를 때 즈음,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다정은 힘을 주어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띠리릭.
“왔어?”
문을 열자 머리를 대충 말아 올린 채 밥을 먹고 있는 영미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식탁과 매일 보는 반찬통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다정은 익숙한 집 냄새를 들이마시며 거실로 올라섰다.
“응. 도훈 씨는?”
“오빠는 벌써 출근했지.”
“아……. 그치.”
다정은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걸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근데 너 왜 벌써 와?”
“응? 내가 뭘?”
“너 랜딩 내일이잖아. 파리에서 오늘 오후에 출발해서…… 잠깐만, 너 옷이랑 머리가 그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