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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손주의 비밀을 찾아서 (18/89)


18. 손주의 비밀을 찾아서
2022.12.01.


다정은 느릿한 그 움직임을 홀린 듯 바라봤다.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데 순간, 태상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 비서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온 것 같은데 아무도 내리질 않아서…….”

그는 잠시 당황한 듯 태상과 다정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비슷한 상황을 한 번 겪어보아서인지 이번에는 대처가 빨랐다.


“괜찮습니다.”

태상은 느릿하게 말하며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넘실거리던 붉은 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다정이 먼저 내릴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밖으로 나오자 김 비서 옆에 서 있던 젊은 남성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제 차 안에서 언뜻 보았던 운전기사인 것 같았다.


“아까는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김 비서가 다정을 향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 보이는 사람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자 다정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제가 더 죄송하죠.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당황하셨을 텐데.”

“아닙니다. 눈 뜨자마자 낯선 사람을 마주치면 그럴 수도 있죠.”

김 비서가 온화한 투로 대답했다. 태상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 사이를 갈라놓듯 섰다.


“한 기사님, 저는 오늘 제 차로 갈 테니 이분을 좀 데려다주십시오.”

“네?”

김 비서와 다정의 입에서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직 한 기사만 돌아가는 상황을 몰라 눈동자를 바삐 굴릴 뿐이었다.

김 비서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한다정 씨는 제가 따로 택시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일단 이동하시죠.”

“네. 저는 제가 알아서 갈게요.”

다정이 말을 보태며 다급한 눈빛을 보냈다.

옆에 멀뚱히 서 있던 한 기사까지 동참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세 명이 합심해 태상을 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태상은 두 사람의 시선을 가뿐히 무시한 채 다정을 향해 몸을 돌렸다.


“또 딴 데로 새지 말고.”

“…….”

“이번엔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가 제법 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만히 쳐다보는 게 대답을 듣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 듯싶었다.

다정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안 새요. 집으로 갈 거예요.”

태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몸을 돌렸다. 끝인사도 없는 그의 담담한 행동이 당혹스러웠다. 다정은 다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저, 부사장님. 안녕히 가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순간, 태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뭐가 그리 어색한지 그는 곧 눈썹을 찡그리며 입꼬리를 끌어 내렸다.

잠시 후, 태상이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다정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마치 이런 말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는 듯. 그의 태도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태상은 김 비서를 향해 눈짓을 하더니 훌쩍 자리를 떠났다. 김 비서는 고개를 짧게 숙이더니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건 기사와 다정 둘뿐이었다.

다정은 태상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고집으로는 그가 할아버지를 이길 것이라 확신하면서.



***

임원 회의를 앞둔 에어 코리아 본사 회의실 안.

모두 안 보는 척하며 차 회장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이번 회의를 이끌어갈 주체인 태상이 회의 시작 십 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회사 중역들 앞에서 역정을 낼지, 아니면 두둔을 할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 회의실 안에 한가득이었다.

그런 가운데 단 한 사람, 명옥만은 홀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꾸만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 지각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태상이 아주 제때 사고를 쳐 주었다.

이대로 아예 안 와주면 더 좋으련만. 남몰래 그런 기대를 품어보는데 묵직한 회의실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문을 닫고 들어온 태상이 반듯한 자세로 서서 모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룹 내 최대 실세인 것 치고는 반듯한 사과였다. 다들 나서서 비난을 할 용기는 없어 슬슬 차 회장의 눈치만 보는데 명옥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즘 맡은 업무가 많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안 하던 지각을 다 하시고.”

“회사 업무는 관계없습니다.”

“없기는요. 차태상 부사장님이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는 거 여기 모르는 사람 있나요? 안 그래요?”

명옥이 살살 웃으며 눈치를 주자 그녀를 따르는 무리가 허허, 웃음을 흘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능력이 출중한 건 알지만 저희가 부사장님을 너무 혹사시킨 것 같네요.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일을 좀 줄여 드려야 할 듯싶은데…….”

명옥은 입가를 가리며 자연스레 차 회장을 바라봤다. 잔뜩 모은 눈썹이며 안타까워하는 눈빛이 배우 못지않은 연기 실력이었다.

차 회장은 묵직한 시선으로 태상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네 입으로 말해 봐라. 뭐 때문에 이제 오는 게냐.”

“사적인 일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 사적인……?”

순간, 차 회장의 입이 빠르게 굳어졌다.

사적인 일. 손주의 입에서 평생 나온 적 없고, 앞으로도 나올 일 없다 생각했던 말이다.

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를 바짝 일으켜 세웠다. 마음 같아서는 임원 회의고 뭐고 당장 중지시키고 태상의 ‘사적인 일’에 대해 캐묻고 싶었다.

그러자 그 열띤 눈빛을 읽었는지 태상이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래. 그래야지. 크흠.”

차 회장은 멋쩍은 헛기침을 흘리며 다시 근엄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하지만 반짝이는 두 눈이며 태상을 향해 쭉 뺀 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태상이 자리에 앉자 진행자가 한쪽 끝에 준비된 단상 앞에 가 섰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지금부터 한성 항공 인수 합병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전략기획팀에서 준비한 간단한 브리핑을 보시겠습니다.”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에 빛이 밝게 들어왔다.

태상은 화면에 시선을 맞춘 채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잘 보이는 곳에 휴대폰을 올려둔 그는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짬짬이 시선을 한 번씩 아래로 떨궜다.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분명했다. 차 회장의 입이 또다시 끝을 모르고 벌어졌다.

회사 일 이외에 다른 일에 관심을 둔 적 없던 녀석이 도대체 뭘, 아니 누구를 기다린단 말인지.

입맛까지 다시며 작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새까맣던 화면이 밝게 빛났다. 태상의 시선이 빠르게 액정 위로 떨어졌다.


‘아니, 저 녀석이…….’

차 회장은 제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화면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 것이다. 녹아내리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피식하는 가벼운 웃음이나, 싸늘한 냉소밖에 모르는 태상이다. 그런 녀석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끓어오르는 호기심에 합병에 관한 발표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차 회장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쑥 빼고 앉았다.

태상은 어느새 액정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톡, 톡톡. 짧은 움직임은 단 몇 번으로 끝났다. 한 문장, 아니 한 단어나 될까 말까.

그렇게 애가 타게 기다려놓고 저 짧은 대꾸는 또 뭔지. 별일 아니라는 듯한 무심한 태도에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아리송한 속내를 도통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으로 최고 재무 책임자이자 이번 인수 위원장을 맡으신 차태상 부사장의 인수 계획안 발표가 있겠습니다.”

무게를 더해가는 차 회장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행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다음 순서를 알렸다.

태상은 슈트 단추를 꼼꼼히 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에 자료 하나 들지 않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모든 것은 이미 머릿속에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어설픈 커닝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인수안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묵직하면서 담담한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꽉 들어찼다.

태상은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방식을 통한 자금조달 계획을 차분하게 발표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어렸다. 천문학적인 숫자도, 복잡하기만 한 인수 전략도 그저 하나의 즐길 거리인 듯싶었다.

태상은 사소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파고들며 차근히 결론으로 향했다.


 


“이상입니다.”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발표가 끝을 맺었다. 태상은 좌중을 쓱 한번 훑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견도, 질문도 없는 적막한 회의실.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선가 역시 차태상이라는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 즈음, 차 회장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입으로 모였다.


“잘했구나. 흠잡을 데 없어.”

“감사합니다.”

“계속 진행해.”

차 회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러자 테이블 맨 앞자리를 시작으로 전 직원이 물결치듯 일어났다.

그는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을 한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윤 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벌써 나오셨습니까.”

아예 참석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차 회장이 회의 중간에 자리를 뜨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바삐 집어넣고 반듯한 자세로 섰다. 그러자 차 회장이 묘한 미소를 띤 채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네. 회장님.”

“윤 실장, 긴히 누굴 좀 불러와야겠어.”

“누구…… 말씀이십니까?”

“글쎄…… 누굴까. 태상이가 오늘 왜 늦었는지 아는 사람이.”

작게 어려 있던 미소는 어느새 얼굴 전체로 번져 있었다.

***

회의를 마친 후, 명옥은 이사진 두 명을 조심스레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진즉부터 태상의 눈 밖에 나, 이대로 있다간 한직으로 물러나게 될 게 뻔한 사람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임의 목적이 너무 분명했다. 상무 이사로 재직 중인 두 사람은 눈인사만 간단히 나눈 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차가 준비되기도 전, 명옥이 불쑥 본론을 꺼냈다.


“우리 수빈이 곧 한국 들어와요.”

“예?”

“이제 곧 회사로 돌아온다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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