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함께 맞는 아침
(17/89)
17. 함께 맞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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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함께 맞는 아침
2022.11.27.
태상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다정을 먼저 확인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모습은 꽤 허술했다.
커다란 바짓단이 어느새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와 있었고, 헐렁한 목둘레는 삐딱하게 내려가 한쪽 쇄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
잠결이었지만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태상은 다정의 앞을 떡하니 가리고 섰다. 이제 김 비서 쪽에서 보이는 거라곤 소파 바깥으로 비죽이 튀어나온 한쪽 다리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조용히 무릎이 접히더니 가느다란 다리가 태상의 뒤로 숨듯이 옮겨 갔다.
“부, 부사장님……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김 비서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이를 꽉 물고 말하는지 태상의 발음이 평소보다 뭉개져 있었다. 김 비서는 괜히 한번 시계를 확인하며 바삐 입을 열었다.
“크흠, 그러시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
-띠리릭.
청명한 도어락 소리가 상황의 종료를 알렸다. 다정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움츠렸던 고개를 살며시 빼 들었다.
“누, 누구세요? 방금 그분?”
“제 비서입니다. 어제 함께 있었던.”
“어제……?”
다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읊조렸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터라 한번 짧게 본 얼굴을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잠시 후, 가느다란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아! 어제 그분이시구나. 어머, 죄송해서 어떻게 해요. 부사장님 데리러 오신 것 같은데 제가 놀라서 내쫓아 버렸네요…….”
다정은 변태 취급을 했다는 과정을 생략한 채 결론만 말했다. 어색하게 말아 쥔 손가락이 입술을 조용히 눌렀다.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불편해서 나가라고 한 것뿐이니까.”
“부사장님께서요? 왜요……? 불편하실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 게 있습니다.”
태상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성난 기색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다정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봤다.
그는 왼쪽 손목을 들어 올리다 말고 이내 다시 팔을 내렸다. 곧, 태상의 시선이 허공을 가로질러 거실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로 향했다.
“…….”
“부사장님……?”
그의 눈동자는 의아한 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썹도 살짝 일그러진 게 마치 제가 보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했고.
힐끔 올려다본 시간은 여덟 시 반이었다. 지금 출발해 봐야 너무 늦은 걸까. 다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밤, 거실에서 까무룩 잠이 든 그를 깨우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간밤에 태상은 보호대까지 꼼꼼히 다 감아주고 난 후에야 발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와인이 반쯤 남은 잔을 들고 다시 적당히 떨어진 바닥에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간간이 대화를 이어가는데 어느 순간, 그의 고개가 제 무릎 위로 떨어졌다.
잠깐 졸다 일어나시겠지.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어 언제 눈을 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정은 후회로 물든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벽과 태상 사이에 끼어들 듯 서자 까만 눈동자가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많이 늦으셨어요?”
“아뇨.”
“그럼…… 왜.”
“그냥 좀 이상해서.”
“뭐가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태상이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길게 자 본 게 오랜만이라.”
“……네 시간 정도밖에 못 잤는데요?”
“나한텐 긴 겁니다.”
긴 세월 질기게 따라붙은 죄책감이 가장 기승을 부리는 건 늦은 밤, 그것도 잠이 들었을 때였다.
고작 와인 두 잔으로 잠에 들었을 리 없는데. 그렇다면 역시 원인은 하나다.
태상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무해한 눈동자를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
게스트룸 문을 열자 맞은편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이 제일 먼저 다정을 반겨주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럭저럭 합격이었다.
눈가가 조금 부은 듯했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고, 잠자리를 설친 것 치고는 얼굴색도 괜찮았다.
서둘러 욕실로 향하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악몽을 꾸고 난 이후에 다시 잠에 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한다 한들 가위에 눌려 지쳐 깨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제는 기절한 듯 조용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구부정하게 웅크린 자세였던 데다가 누가 무릎까지 베고 있었는데.
‘……요 근래 너무 피곤하긴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정은 대충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준비를 서둘렀다.
시원한 물이 피부에 닿자 남아 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세수를 마친 다정은 태상의 옷을 깔끔하게 개어 놓고 유니폼 치마에 다리를 꿰어 넣었다.
오늘도 유니폼과 사복의 하이브리드 패션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정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는 깔끔하게 변신을 마친 태상이 서 있었다.
그는 짙은 남색 계열의 재킷을 입고 와인색 타이를 매고 있었다. 검은 슈트가 피부처럼 잘 어울리는 남자였지만 색감이 들어간 정장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묵직한 파란빛이 태상의 짙은 이목구비에 화려한 멋을 더해주었다.
그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단단히 팔짱까지 끼고 있는 게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부사장님, 어서 나가요.”
“아침, 뭐 먹습니까?”
“네? 아침이요? 지금 그런 한가한 말씀 하고 계실 때가 아니잖아요. 나중에 드세요.”
“난 원래 안 먹습니다.”
“저도 원래 안 먹어요.”
안 그래도 늦은 태상을 더 늦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정은 시계를 흘끗 보고 그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른 나가요.”
그렇게 말한 다정이 태상의 팔을 턱 하고 붙잡았다. 하룻밤 동고동락을 해서 그런지 저도 모르는 친밀감이 그럭저럭 싹터 있었다.
야무지게 팔을 감싸 쥐고 당기는데 태상이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그는 눈썹 앞머리를 미세하게 좁힌 채 작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언뜻 보면 불쾌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 하지만 눈매에까지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다정은 그가 화를 내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며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남자가 자석처럼 딸려와 주었다.
한 손으로 태상을, 나머지 한 손으로 트롤리 손잡이를 잡고 씩씩하게 걷는데 얼마 안 가 양손이 모두 가벼워졌다. 태상이 가방을 들고 앞서 걷기 시작한 것이다.
다정은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걷는 그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작은 공간 안에는 조용한 정적뿐이었다. 다정은 불이 반짝 들어온 1층 버튼을 바라보다 이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 부사장님.”
돌이켜보면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어설픈 모습만 보인 것 같다. 하다못해 끝인사는 단정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허리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어제, 오늘 감사했습니다. 회의 잘하시고 오늘은 일찍 들어와서 푹 쉬세요.”
“…….”
무덤덤한 투로 답을 해줄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태상은 그저 비스듬히 고개를 내리며 천천히 눈을 맞출 뿐이었다.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살짝 벌어지던 문이 다시 빠르게 닫혔다.
다정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또 연락 안 할 겁니까?”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건 분명 그가 어제 제게 던졌던 질문이다.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태상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은 질문을 던졌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서 꼭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다정은 얄미운 마음을 잔뜩 담아 그를 전력으로 노려봤다. 안 그래도 어제 한 번 참았건만, 현장 일에 개입하지 않게 해주려는 마음을 몰라줘도 너무 몰라줬다.
‘열림’ 버튼을 누르고 그냥 확 내려 버릴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치는데 태상이 얼른 대답하라는 듯 눈썹 끝을 들어 올렸다.
그 표정을 보자 더욱 억울해진 다정이 못 참고 말을 다다다 쏟아냈다.
“해요, 해요. 한다고요. 억울해도 하고 누가 괴롭혀도 하고, 다 일러바칠 테니까 전화기 맨날 꼭 붙들고 계세요! 나중에 직원들이 불평해도 전 몰라요.”
“…….”
“부사장님 정말 끈질긴 성격인 거 아세요?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아마 할아버님이랑 완전 붕어빵…….”
줄줄이 말을 쏟아내다 말고 다정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조금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그는 여전히 제 상사였다. 서슴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는 아닌데. 아무래도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니 그를 너무 편하게 생각해버린 듯싶었다.
다정은 쏟아 버린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입술만 잘게 깨물었다.
“한다정 씨.”
“네……?”
다정이 잔뜩 기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계속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듣고 싶으니까.”
“……다 했어요. 그게 다예요.”
다정은 고개를 움츠리며 보이지 않는 꼬리를 내렸다.
“계속 듣고 싶은데 말 참 안 듣습니다.”
태상은 ‘열림’ 버튼에서 손을 떼고 다정을 마주보고 섰다.
저를 서슴없이 대하는 모습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물리적 거리까지 좁혀버렸다. 그러자 다정이 흠짓 놀라며 바삐 입을 열었다.
“부, 부사장님은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세요?”
“글쎄요.”
또다. 어젯밤 보여준 도망가기 직전의 표정이 또다시 다정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어색하게 접힌 눈썹 앞머리며 불안한 듯 치켜뜬 눈동자. 귀엽기 그지없어 계속 감상하고 싶었지만 이번엔 물러나 줄 마음이 없었다.
태상은 고개를 천천히 내리며 입을 열었다. 순간, 검은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으로 일렁였다.
“난 궁금한 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데요?”
“난…….”
조각 같은 그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