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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신 나간 남자 (16/89)


16. 정신 나간 남자
2022.11.24.



“아픕니까?”

그가 여전히 발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뇨. 시원하고 좋아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태상이 묵묵히 얼음찜질을 계속해 나갔다.

은은한 와인 향이 가득한 거실 안, 잘그락거리는 얼음 소리가 두 사람의 말소리를 대신했다.

다정은 뻣뻣하던 등줄기에 힘을 풀고 소파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걱정과 달리 태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했고, 딱 제가 겁내지 않을 정도로만 경계를 넘었다.


“집에는 왜 못 들어간 겁니까.”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태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아…… 그게, 같이 사는 친구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거든요. 둘이 오붓하게 생일 파티하는데 방해할 수가 없어서 나왔어요.”

안 그래도 해명을 하고 싶었던 부분인지라 다정은 냉큼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엄청 좋은 룸메이트예요.”

태상의 미간에 선명한 실금이 잡히자 다정이 펄쩍 뛰며 친구를 변호했다. 굳이 따지자면 똑 부러지는 성격인 영미가 저를 챙겨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다정은 썰렁한 거실을 눈으로 한번 훑으며 어색하게 뜬 대화의 틈을 메웠다.


“부사장님은 여기 혼자 사시는 거죠?”

“네.”

“혼자 쓰기에는 좀…… 넓네요.”

사실 넓다기보다 휑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집 안에는 최소한의 가구만이 놓여 있었고, 생활감 있는 잡동사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텅 비워 놓을 거면 애초에 큰 집에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다정은 치미는 궁금증을 꾹 누른 채 담담한 감상만 내놓았다.


“혼자 살기 위한 집이 아닙니다.”

“그럼요?”

“신혼집.”

“네?”

느닷없이 날아든 그의 말에 다정이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상체가 크게 움직이자 쿠션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던 다리가 덩달아 흔들렸다.

태상은 미끄러지는 발목을 빠르게 감싸 쥐고 쿠션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물론, 묵직한 눈빛으로 다정을 올려다보며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시선에 움찔한 다정이 재빨리 상체를 원위치시켰다.


“부사장님 결혼하세요? 여기가 신혼집인 거예요?”

다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세상 어떤 정신 나간 남자가 신부도 없는 신혼집에 여자 손님을 데려온단 말인가. 커다란 눈망울이 경악스럽다는 듯 커졌다.


“안 합니다, 결혼.”

“……결혼을 안 하는데 신혼집이 왜 필요해요?”

“할아버지께서 멋대로 구해놓은 집입니다. 제 짐을 몰래 옮겨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거고요.”

“아…….”

그러고 보니 대단한 그룹의 딸과 결혼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다. 그 결혼이 깨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다정은 그의 결혼이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강요당하는 건 어떤 기분일지. 평범하게 나고 자란 다정으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정은 조심스러운 눈동자로 태상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담담하고 무감각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인상을 구기고 있으면 보기 좀 나았을까. 별거 아니라는 듯한 그 모습이 괜히 더 안쓰러웠다.

다정은 입고 있던 그의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달랬다. 이제는 그저 제 온기이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따스한 체온이 함께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면 좋겠네요…….”

다정이 옷자락을 손에 꼭 쥐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왜요?”

“고집 하나만큼은 세상 제일이니까.”

“세상 제일…….”

그의 말을 작게 따라 읊조리던 다정이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어깨가 잔잔히 떨리더니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풉.”

“……?”

“아, 죄, 죄송해…… 흡, 하하.”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시작으로 다정의 입에서 맑은 웃음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

태상은 얼음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결치는 눈꼬리며 발그레한 두 뺨. 탐스러운 복숭아 같은 그녀의 얼굴이 두 눈에 가득 담겼다. 베어물고 싶은 그 모습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갈증이었다. 목 안이 타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숨통을 바싹 조이는 것 같기도 한.

당혹스러운 감각에 태상의 이맛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아,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구겨진 미간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다정이 얼른 사과의 말을 뱉었다.


“뭐가……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아니, 부사장님께서 누구 고집이 어떻고 말씀하실 입장은 아니잖아요.”

“……왜죠.”

“그게…… 그러니까…….”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한 남자의 얼굴 때문에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결국, 수습하기를 포기한 다정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그러자 태상이 소파 앞으로 바싹 다가오며 시트에 팔을 얹었다. 천천히 턱을 괴며 시선을 올리는 게 마치 그림이라도 감상하는 것 같았다.


 


“가리지 말고.”

“네……?”

“웃는 게 훨씬 잘 어울리니까.”

“…….”

“가리지 말죠.”

나른하면서 묵직한 목소리였다. 편안하게 힘을 뺀 부드러운 눈빛이었고. 다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스르륵 내렸다.

그러자 태상의 미간에 다시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손과 함께 미소도 사라진 게 영 불만인 모양이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 많이 보셨잖아요, 웃는 거…….”

“언제.”

그가 눈썹을 움찔하며 가볍게 의문을 표했다.


“저번에 비행기에서요. ……맨날 웃는 게 제 일인 거 잊으셨어요?”

“그건 손님에게 웃은 겁니다.”

태상이 느슨해진 경계를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 그는 아주 쉽게 둘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더 이상 공적이지 못한 관계로, 아주 조금 선을 넘은 사이로.

다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숨 쉬는 것도, 침을 삼키는 것도 전부 다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훌쩍 가까워진 남자를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약봉지, 책상 위에 뒀습니까?”

긴장된 분위기 속, 그가 자리를 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네? 네…….”

다정은 멍한 소리를 흘리며 태상을 올려다봤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얼굴을 바라보느라 허리가 자동으로 소파에 푹 잠겼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게스트룸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봄바람이 산들거리듯 부드러운 표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한 지하 주차장.

지난밤, 태상이 타고 온 검은 세단 옆에 한 남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몇 번째 반복되는 건지 알 수 없는 통화 대기음에 김 비서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이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태상은 늦잠 같은 걸 자는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잠이라는 걸 제대로 자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그가 본사 임원 회의를 앞두고 연락 두절이라니.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 비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혹시 몰라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띵.

승강기 문이 열리고 그는 망설임 없이 태상의 집으로 향했다. 일 중독인 그를 따라 집에 함께 온 적이 있어 도어락 해제도 문제없었다.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부사장님?”

고요한 집 안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김 비서는 조심스레 구두를 벗고 복도 위로 올라왔다.

몇 걸음 옮겼을까. 거실 바닥에 늘어진 기다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안경을 추켜올리며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게 사람의 다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부사장님!”

김 비서는 다급히 소리치며 거실로 향했다.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를 양말만 신고 뛰자 몇 번이고 몸이 기우뚱했다.

거실 벽과 충돌하기 전 겨우 멈춰 서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철저히 예상 밖이었다. 그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졌다.

소파 위에는 헐렁한 티셔츠 차림의 여자가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시트에 붙인 채 상체만 옆으로 뉘여 ‘ㄱ’자 모양을 하고 자고 있었다.

이 집에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태상이었다.

태상은 소파 밑동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살짝 옆으로 꺾인 고개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자의 무릎에 닿아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 집에 여자가 있다는 것도, 태상이 여자와 몸을 맞댄 채 자고 있다는 것도. 김 비서는 무엇 하나 믿을 수 없었다.

순간, 모든 기적을 가능하게 한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는 태상의 긴 다리를 돌아 소파 끝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굴 쪽으로 다가갈수록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어제 그……!”

얼굴을 확인한 김 비서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 여자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신이 드는지 그녀는 허리 언저리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 허리…….”

툭툭, 하는 짧은 두드림이 끝나기도 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한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김 비서는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 마냥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여자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이는 게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기 직전인 것 같았고.

김 비서는 저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며 바삐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꺅!”

“아닙니다! 저, 저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도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주어를 댕강 빼먹은 채 그저 ‘아닙니다’만을 연발했다.

하지만 고슴도치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여자 앞에서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건 괜히 더 수상쩍기만 했다. 김 비서는 붉어진 얼굴로 허둥대며 연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구원의 목소리가 닿았다.


“뭡니까…….”

잠에서 덜 깬 태상은 마치 으르렁거리는 맹수 같았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그게, 부사장님 핸드폰이 꺼져 있는데 회의가…….”

김 비서는 목까지 붉어져 횡설수설했다. 여간해선 당황하지 않는다 자부해 왔는데. 태상의 회초리 같은 눈빛에 머릿속까지 하얘져 버렸다.

마치, 신혼부부의 침실을 엿보다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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