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깊고 깊은 밤
(15/89)
15. 깊고 깊은 밤
(15/89)
15. 깊고 깊은 밤
2022.11.20.
“이거면 될 겁니다.”
태상이 흰색 면 티셔츠와 연한 회색 반바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두 손으로 옷을 받아든 다정은 바지를 팔에 걸어둔 채, 티셔츠를 어깨 위에 대보았다. 헐렁한 반팔 티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 커다랬다.
고르고 골라 가장 작은 거로 가져온 건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가냘픈 어깨를 보고 태상이 곤란한 듯 옅은 신음을 흘렸다.
“더 작은 걸 찾아보죠.”
“아, 아뇨! 저 원래 잘 때는 크게 입는 거 좋아해요.”
태상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다정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말로 묻는 게 아니라 자꾸만 행동이나 표정에서 기색을 읽어내려 하는 게 마치 본능에 충실한 야생동물 같았다.
다정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크면 편하고 좋죠.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들어가 쉬세요.”
살짝 찌푸려진 이맛살에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기색이 서려 있었지만, 태상은 이내 의심의 시선을 거뒀다.
“난 아침 일찍 회의가 있습니다.”
“회의요……?”
“일어나면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 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듣는 밤 인사는 귀가 녹을 정도로 달콤했다.
달칵 닫히는 가벼운 문소리, 타박타박 끌리는 슬리퍼 소리. 그가 나간 후, 많은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지만 귓가에 감도는 짙은 여운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
눈꺼풀 위로 새까만 어둠이 번져 있는 깊은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온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다정은 무의식 속에서 희미하게 눈을 떴다.
주위는 온통 시뻘건 불길이었다. 일렁이는 붉은 기운은 마치 정체 모를 짐승의 그림자 같기도 했고, 춤을 추는 나비 같기도 했다.
다정은 가쁜 숨을 흘리며 손끝만 겨우 바르작거렸다. 비명을 질러보려 해도 목이 콱 막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온몸은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새빨간 그림자는 몸집을 키우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왈칵 온몸이 집어 삼켜지는 순간, 다정은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아, 하아……!”
눈앞에 보이는 건 낯선 천장과 새까만 어둠이 전부였다. 가쁘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는데 축축한 땀이 잔뜩 배어 나왔다. 아직도 시뻘건 불길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다정은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베개 깊숙이 머리를 묻었다. 이제는 흐릿해질 법도 하건만 지난날의 악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생해졌다.
‘괜찮아. 내 손 잡아.’
귓가에 가파른 숨소리만 가득한데,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낮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악몽을 꾸고 나면 언제나 생각나는 그리운 음성.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 손을 꼭 잡아주던 오빠가 생각나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참 신기했다. 이제는 얼굴조차 흐릿한 그 소년에게 아직도 위로를 받는다는 게. 다정은 가슴 한쪽을 소중히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탁에 놓인 전자시계 화면에는 네 시 삼십 분이 표시되어 있었다.
다정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불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헐렁한 회색 바지가 나풀거리며 함께 딸려 나왔다.
순간, 진지하기만 한 남자의 표정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큰 걸 나름 맞을 거라고 가져온 게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났다.
다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는 듯한 갈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끼이익.
조심조심 문을 여느라 오히려 더 듣기 싫은 소리가 나 버렸다. 다정은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접질린 발목에서 찌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왜 불이……?’
캄캄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거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태상이 끄는 걸 잊고 방에 들어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통과하는데 잘그락거리는 유리 소리가 들렸다.
다정은 마른침을 집어삼키며 거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기다란 소파 끝에 앉아 혼자 와인을 마시는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부사장님?”
그가 거실에 있을 거라 생각도 하지 못한 다정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굳어졌다.
“왜 나왔습니까?”
“목이 말라서 물 좀 마시려고요.”
다정이 손끝으로 어색하게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함부로 돌아다니느냐고 따져 묻는 것도 아닌데 괜히 변명을 하는 말투가 되었다.
일종의 허락을 기다리며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태상이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났다. 그는 큼직한 걸음을 몇 번 옮겨 부엌으로 들어섰다.
선반으로 향하는 게 아무래도 물을 떠주려는 것 같았다.
“아, 제가 할게요.”
다정은 뒤늦게 그를 따라잡으려 바삐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제 두 배는 되는 그의 다리 길이를 따라잡기란 역부족이었다.
태상은 부엌 중앙에 있는 선반 하나를 열었다. 집주인의 키에 맞춰 설계되었는지 널찍한 단이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투명한 유리잔 하나를 꺼내 뒤따라온 다정에게 건넸다. 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컵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잠이 잘 안 옵니까?”
“아뇨, 잘 잤는데…… 뒤척이다 깼어요.”
굳이 안 좋은 꿈을 꿨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정은 잠시 어물거리다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를 덧붙였다.
“이리 줘요.”
대답하느라 컵을 들고만 서 있자 태상이 유리잔을 다시 가져갔다. 그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과 찬물을 번갈아 틀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이 시원하게 적셔지는 것 같았다. 다정은 냉큼 물잔을 받아들고 미지근한 물을 꼴깍꼴깍 달게 마셨다.
“하아…….”
한 잔을 깨끗하게 비우자 퍽퍽했던 입안에 그제야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다정은 물컵을 끌어안듯 가슴에 대고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얼른 자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태상이 조리대에 비스듬히 기대서며 말했다.
이마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가 신경 쓰이는지, 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머리칼 사이로 넣어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다정은 그제야 남자가 지극히 편한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짙은 회색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흐르는 듯한 소재는 굴곡진 몸의 윤곽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차림새의 태상은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백팩 하나만 던져주면 훈남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다정은 그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검은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봤다.
“…….”
“잠자리가 불편합니까?”
한동안 말이 없자 태상이 대뜸 걱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생긴 것과 달리 매사 신경 쓰는 게 참 많기도 한 남자였다. 다정은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집어 삼켰다.
“아뇨. 하나도 안 불편해요. 그보다 부사장님이야말로 빨리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회의 있어서 일찍 나가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원래 좀 늦게 잡니다.”
“좀 늦게…….”
한밤중을 지나도 한참 지난 시간인데 ‘좀’이라니.
다정은 의아한 기색을 최대한 죽인 채 거실에 놓인 와인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줏빛 액체가 고여 있는 게 레드 와인인 것 같았다.
이 시간까지 잠을 못 자고 술을 마시고 있다. 게다가 표정이며 말투에서 졸린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어쩐지 생각의 끝에 안타까운 결론이 있을 것 같았다.
“와인, 좋아합니까?”
한동안 와인잔을 바라보고 있자 태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아뇨…… 술은 별로. 저는 물이나 한 잔 더 마실게요.”
다정은 멋쩍게 고개를 젓다 정수기를 향해 다리를 옮겼다.
“아!”
가만히 서서 대화를 하는 동안 다친 발목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다정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괜찮습니까?”
“네. 다친 걸 깜빡했어요.”
다정이 다친 강아지처럼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목이 허공에서 연약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태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붕대며 밴드,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자기 전에 치료를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역시 그냥 재우는 게 아니었는데. 때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파스는.”
“아, 그게…… 샤워 하고 나서 붙이려고 꺼내놨거든요?”
이제는 그의 대화 방식에 완벽히 적응한 다정이었다. 그는 왜 파스를 붙이지 않았느냐며 탓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다정은 아픈 발을 뒤로 보내며 허둥허둥 말을 이었다.
“근데 머리 말리다가 그대로 까먹어서…….”
“…….”
굳게 한일자로 닫힌 입에서 남자가 화를 내고 있음이 느껴졌다.
봉지가 넘치도록 붕대며 파스를 잔뜩 사 줬는데 아무런 처지도 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다정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묵직한 시선이 발목으로 떨어졌다.
“얼음찜질하게 소파 가서 앉아요.”
“얼음찜질이요……?”
“그새 더 부었습니다.”
말을 마친 태상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부엌 끝에 있는 수납장을 연 그는 작고 동그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얼른.”
태상이 제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괜찮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성의를 무시한 죄가 있어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다정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혹시나 또 아픈 소리를 낼까 걱정이 들어 절로 깽깽이걸음이 되었다.
자리에 앉자 기다란 가죽 소파에서 ‘뿌드득’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정 두 사람이 눕고도 남을 만큼 넓은 소파에서 다정은 홀로 뻘쭘히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아래로 축 처진 얼음주머니를 들고 태상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소파 앞에 멈춰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마치 직접 얼음을 대줄 것 같은 모습에 다정이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할게요.”
“뒤로 쭉 기대요.”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접질렸을 땐 다친 곳을 위로 올리는 겁니다.”
태상은 제법 엄한 눈빛으로 시선을 한번 맞추고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쿠션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쿠션도 가볍게 집어 들어 바닥에 높다란 산을 쌓았다.
다정은 제 발이 조심스레 들려 그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장 별 볼 일 없는 신체 부위라 여겼던 곳이 이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차가울 겁니다.”
제멋대로 굴 때는 언제고 태상이 또 신사같이 말끔한 태도를 취했다. 다정은 벙찐 표정으로 태상을 내려다봤다. 온도를 확확 바꾸는 그의 모습에 때때론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아!”
순간, 발목에 퍼진 차가운 감촉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단숨에 앗아갔다. 다정은 어깨를 짧게 움찔하며 시선을 떨궜다.
내려다본 풍경은 역시 기묘했다.
서늘하게 아름다운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 발목을 보살피고 있다. 그것도 얼음 모서리가 거슬리기라도 할까 주머니를 허공에 가볍게 띄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