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지 말아요
(14/89)
14. 가지 말아요
(14/89)
14. 가지 말아요
2022.11.17.
“어차피 내일 비행도 없는 날이니까 늦게까지 쉬다 가요.”
“어떻게 그래요. 적당히 있다가 나갈게요.”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냉장고 안에 있는 거 꺼내 먹어도 되고.”
“네.”
“필요한 물건 있으면 꺼내서 써도 됩니다.”
“네…….”
종일 보호자처럼 군 남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일까. 작별을 고하는 듯한 그의 말에 가슴이 서서히 조여들었다.
다정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함께 있는 게 불편하고 어색한 줄 알았는데 그가 떠난다는 게 왜 이렇게 걱정스러운 건지.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얼른 자요.”
그 간결한 한마디가 다였다. 하다못해 옷이라도 갈아입고 나갈 줄 알았는데 남자는 그럴 생각도 없는 듯싶었다.
“저, 저기……!”
태상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 다정은 저도 모르게 그의 재킷 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
고개를 돌려 무거워진 옷자락의 정체를 확인한 태상은 그 자리에 조용히 멈춰 섰다. 의아한 듯한 시선이 다정의 얼굴로 향했다.
다정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눈만 토끼처럼 크게 뜰 뿐이었다. 그대로 굳어져 눈만 깜빡거리자 태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습니까?”
“네? 아, 아뇨. 그게…….”
다정은 화들짝 놀라 그의 재킷을 놓았다. 그러곤 제 손을 단속이라도 하듯 등 뒤에서 꽉 움켜쥐었다. 목 안쪽이 타는 것처럼 말라왔다.
다정은 일단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로 했다. 제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기보단 그쪽이 훨씬 쉬워 보였다.
“저, 저 필요한 거 없어요. 약은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사 주셨고, 또…… 이 큰 집에 있는 것도 마음대로 쓰라는데 필요한 게 있을 리가 없죠.”
다정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울룩불룩한 봉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집으로 오는 길, 태상은 약국에 들러 약이며 붕대를 잔뜩 샀다. 가게 하나를 전부 털어왔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단 필요해 보이는 건 다 샀는데…… 빠진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사오셨어요?’
‘뭐가 좋은지 몰라서.’
‘그렇다고 다 사요? 구급키트도 이 정도로 잘 되어 있지는 않겠어요!’
다정은 저도 모르게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태상이 눈썹 앞머리에 힘을 주며 다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서 뒷말을 이으라는 듯, 검은 눈동자에 성마른 기색이 드러났다.
다정은 그 기세에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가서 주무실 건가 싶어서요. 옷은 또 어쩌려고 그냥 나가시는 건지…….”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태상은 드넓은 서울 땅 어디서든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와 한 공간에 머물면 신경 쓸 게 많아지는 건 저 자신이고. 어리석은 걱정을 주절주절 흘리던 다정은 음소거를 하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효성 호텔에 묵을 겁니다. 잠옷은 방에 준비되어 있을 거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세탁 서비스 맡겨 놓으면 됩니다.”
“아…….”
다정은 효성 그룹에서 호텔도 운영하고 있음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에게는 집과 같은 곳이니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네요. 거기 가시면 되겠다. ……근데 이 시간에 다시 운전하려면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원래 길게 자지 않는 편이라.”
“아, 예약. 이렇게 갑자기 예약을 할 수 있을까요? 방이 하나도 없진 않겠지만 고급 객실들은 항상 인기가 많다던데…….”
“아무 객실이나 상관없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병아리처럼 종알종알 말을 늘어놓던 다정이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넓은 공간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정은 서서히 고개를 떨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안녕히…….”
“내가 안 갔으면 좋겠습니까?”
태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눈동자며 입안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분홍빛 입술. 초조함에 물든 표정은 분명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 옷 끝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그대로 움켜쥐고 싶다. 순간,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아뇨!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죄송해서 그렇죠, 죄송해서. 주인을 내쫓는 게 영 마음에 걸리고…… 또 이 밤에 다시 나가는 게 귀찮겠다 싶고…….”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주절주절 늘어놓는 와중에 비로소 제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태상을 붙잡은 건 죄책감이라는 감정이었다. 모든 걸 짊어지고 홀연히 떠나는 사람을 향한 불편한 감정.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깔끔하게 생각이 정리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정은 태상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 부사장님만 괜찮으시면…… 오늘 안 나가셔도 될 것 같아요.”
“…….”
“제가 뭐 된다, 안 된다 허락을 하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원래 부사장님 집이니까…… 그냥 편하게 계셨으면 해서요.”
태상은 신중한 표정으로 다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말간 눈동자가 속이 다 들여다보일 듯 투명했다. 덕분에 못 이긴 척, 모르는 척 그렇게 곁에 머무르고 싶은 새카만 제 마음이 그대로 다 비춰 보였다.
그는 도망가듯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집이 지나치게 넓습니다.”
“……?”
“게스트룸에 딸린 화장실도 있고.”
“그런……데요?”
“그러니까 한집에 있어도 불편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네.”
다정은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아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실망하는 태도도 곤란했다. 담백한 반응을 꺼내 보이는데 태상이 신발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뭘 하려는 건가 싶어 다정은 목만 쭉 빼고 태상을 바라봤다. 그는 오도카니 남겨진 트롤리를 들고 곧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태상은 따라오라는 듯, 가볍게 시선을 주고 기다란 복도를 가로질렀다. 다정은 아픈 발목을 조심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벽에는 좌우로 문이 하나씩 나 있었고 막다른 복도 끝에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 반대편으로도 통로가 나 있으니 이 집에는 못해도 방이 여섯 개쯤은 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크면 하룻밤이 아니라 일주일을 묵어도 서로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늘어선 방문을 힐끔거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게스트룸 앞에 다다랐다.
“가사 도우미분이 늘 정리해 놓으시니까 방 상태는 양호할 겁니다.”
태상이 문을 열며 말했다. 그가 불을 켜자 다정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방안을 훑어봤다.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흰색 이불로 덮인 침대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침대 양옆으로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아이보리색 협탁이 놓여 있었고.
다정은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단속하며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맞은편 벽에 난 기다란 창문에서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방 정말 예쁘네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태상이 트롤리 가방을 벽에 기대 놓으며 말을 이었다.
“깨끗은 할 겁니다.”
다소 무뚝뚝한 감상이었지만 이 집에 살고 있는 태상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는 맞은편에 있는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욕실 안에 필요한 물건도 다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감사합…….”
공손하게 인사하던 다정의 표정에 일순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씻고 난 후 가장 필요한 잠옷이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비행 중 휴식을 취하는 장거리 노선을 다녀왔다면 트롤리 안에 잠옷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늘 비행은 짧디 짧은 퀵턴 비행이었다.
그냥 유니폼을 입은 채로 잘까, 아니면 차라리 속옷 차림으로 잘까. 절망적인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태상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무슨 생각합니까.”
“아뇨, 별거 아니에요.”
집을 빌려 쓰는 마당에 옷까지 빌려 입고 싶지는 않았다. 다정은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짧은 표정 변화를 감지한 태상이 짙은 눈매에 조용히 힘을 실었다.
“약봉지 봐서 알겠지만.”
“……네.”
“하나만 짚어서 말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통째로 다 사 버립니다. 그게 편하니까.”
“……!”
그 말인즉슨 닥치는 대로 다 사면 이 중에 네가 필요한 게 하나쯤은 있겠지, 라는 뜻이었다.
다정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건조한 얼굴에서 농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쇼핑을 도와주실 만한 분에게 연락을 해봐야겠군요.”
“네? 이 시간에요?”
“연락받으면 좋아하실 겁니다.”
“왜요?”
“일이 없어서 해고될 위기니까.”
“…….”
기사에 비서까지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도, 운동장보다 넓은 집에서 혼자 살 때도.
놀랍긴 했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속해 있는 세계가 다르니 삶의 방식이 다른 건 당연하다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쇼핑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모자라 일은 시켜본 적도 없다니. 다정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간신히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그 침묵을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태상이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정은 빠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쏟아내듯 말을 뱉었다.
“옷이요! 저 갈아입을 옷이 없어요.”
“옷…….”
“네. 근데 진짜 괜찮아요. 대충…… 자면 돼요.”
다정은 차마 속옷 차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애매하게 말을 끝맺었다.
태상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은 채 다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동자가 천천히 발끝까지 내려가는 게 눈으로 옷 치수를 재는 것 같았다.
다정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태상을 집에 머무르게 한 건 그가 피곤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 그를 컨시어지 직원처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가방이라도 내가 옮길걸. 다정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애꿎은 트롤리를 노려봤다.
“잠시만 있어요.”
“아, 괜찮은…….”
태상은 뒷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휙 돌렸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는 게 맞는 옷을 머릿속으로 찾고 있는 듯했다.
다정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지었다.
이 많은 고마움을 다 갚으려면 태상이 알거지가 되어 저희 집에 얹혀 사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다음 생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손님들께 잘해서 회사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야지. 그런 답답하면서 순진한 결론을 내리는데 태상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