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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맞닿은 굴곡 (13/89)


13. 맞닿은 굴곡
2022.11.13.


태상은 폭탄 같은 말을 던져 놓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정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만 휘둥그레 떴다.

만난 지 두 번밖에 안 되는 남자의 집에, 그것도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애초에 순순히 따라가리라 생각했다는 거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오도카니 남겨진 다정은 발끝에 힘을 주며 바닥에 구두를 딱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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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가요. 안 갑니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따라나선다는 뜻으로 비칠 것만 같았다. 다정은 두 손을 꼭 모아쥔 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태상이 차 앞에 멈춰 서 이쪽을 바라봤다. 미세하게 틀어진 고개며 올려다보는 시선이 의문에 차 있었다.

다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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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감사하지만 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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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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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라뇨. 당연히 안 되죠…….”

태상의 표정이 하도 당당해 순간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반면 그는 이런 일이 일상이라도 되는 양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함께 집에 가는 게 별 대단한 일도 아닌 걸까. 아니면 제가 그냥 뭐든지 허락할 것처럼 쉽게 보였던 걸까.

1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의식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달려 나갔다. 다정은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떨궜다. 맞잡은 두 손이 허벅지 앞에서 꼬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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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나갈 겁니다.”

불안하게 얽히는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직하면서도 힘이 실린,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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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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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다정 씨 데려다주고 다시 나갈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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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집으로 가자는 말에 대뜸 엉뚱한 상상을 해 버렸다. 뒤늦게 태상의 의도를 이해한 다정이 멋쩍게 말을 이었다.


“그, 그럼 더더욱 못 가죠……. 뻔뻔하게 남의 집을 어떻게 뺏어요.”

“혼자 밤길 헤매겠다는 게 더 뻔뻔합니다. 그러니까 어서, 이리 와요.”

커다란 손을 펼쳐 가볍게 한번 까딱. 경계심 많은 작은 동물을 불러들이는 듯한 손짓이었다.

남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동작에 다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순간, 공기 중에 감돌던 긴장이 빠르게 흩어졌다.

다정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발을 뗐다. 고집스러운 남자를 설득하는 건 잠시 뒤로 미뤄두어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보면 길에서 고양이 데려가는 줄 알겠어요.”

“고양이가 차라리 낫겠습니다.”

“왜요?”

“거짓말도 안 하고 고집도 안 부리니까.”

“그, 그건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다정은 태상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한 칸, 한 칸을 발을 옮기는데 사위가 어두워 마지막 남은 계단 하나를 미처 보지 못했다.


“아!”

평평한 바닥이라 예상하며 발을 내디딘 곳이 아래로 꺼지자 몸이 한번에 뚝 떨어졌다. 다정은 반쯤 기울어진 채 거칠게 계단을 밟았다.

구두가 옆으로 확 꺾였고 다리는 밑동을 베인 나무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다정은 멀어지는 난간을 향해 애처롭게 손을 뻗었다.

순간, 태상이 어둠 속에서 들짐승처럼 튀어나왔다. 넘어질 위치를 가늠한 그는 두 팔을 벌려 가뿐하게 다정을 받아냈다.


“…….”

허리를 감싼 묵직한 팔, 탄탄한 굴곡이 그대로 느껴지는 가슴. 다정은 낯설고 단단한 품에 안겨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괜찮습니까?”

걱정에 찬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다정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네. 괜찮아요.”

“하…….”

커다란 숨소리가 터져 나오며 넓은 가슴이 크게 한번 들썩였다.

안도의 한숨이 분명했지만 태상은 감고 있는 팔을 더 세게 조였다. 이성이 아닌 무의식이 몸의 통제권을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저, 저 이제 괜찮아요.”

다정이 그의 품을 밀어내며 말했다.

태상은 꽉 감싸 안은 허리를 천천히 풀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허리를 놓아주기 못내 안타까워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그는 허공을 꽉 쥐며 말을 듣지 않는 제 손을 통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걱정스러운 시선이 발목을 향해 뚝 떨어졌다.


“접질린 것 같은데.”

“네. 조금요.”

다정은 삐끗한 발에 살짝 무게를 실어 보았다. 살짝 욱신거리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짧게 절룩거리며 걸음을 떼는데 태상이 손에 다급히 힘을 주었다.


“힘주지 말아요. 더 부으니까.”

“그치만 안 그러면 걸을 수가…….”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 태상이 옆에 와 나란히 섰다. 그는 팔을 둘러 다정의 어깨를 감싼 후, 그대로 제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힘 빼요.”

태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귓바퀴에 와닿은 그의 숨결이 간질간질했다.

솜털이 바짝 서는 느낌에 다정은 주춤거리며 거리를 띄워보려 했다. 하지만 작은 몸짓은 그에 의해 금방 저지당할 뿐이었다.


“지금 안 아프다고 계속 힘주면 정말 오랫동안 고생합니다.”

“…….”

얇은 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몸은 근육투성이였다. 각종 운동을 섭렵하면서 삐거나 다치는 일도 흔했던 걸까.

다정은 발목에 힘을 빼고 천천히 태상에게 몸을 기댔다. 그의 말처럼 오랫동안 고생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자 태상이 잘했다는 듯 어깨를 짧게 쓸어 주었다.

그는 다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구두가 천천히 땅을 밟았다.


“저…… 이제 그만 놔주셔도 돼요.”

“…….”

태상은 느릿하게 손을 떼며 앞에 와서 섰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고 언제라도 다시 팔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다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잠깐이지만 몸의 굴곡을 맞대고 있었다는 생각을 잊기가 힘들었다.

괜히 머리를 쓸어넘기며 시선을 돌리는데 앞좌석이 텅 빈 그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의아하다는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비서분하고 기사님은 가셨나 봐요?”

“자고 있을 때 보냈습니다.”

“아…….”

자고 있었던 장본인인 다정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저 때문에 두 분 가시는 길이 불편했겠어요.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죠.”

선선히 답을 마친 태상은 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더니 다정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서 타라는 의미가 너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다정은 선뜻 발을 뗄 수 없었다.

태상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다니는 회사에 소속된 임원이다. 동료 직원의 집을 가볍게 방문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머뭇거리며 눈을 피하자 태상이 제법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 다리를 하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겁니까?”

“저는 괜찮아요.”

“한다정 씨.”

태상이 열린 차 문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헤드라이트를 등진 채 걷는 그의 얼굴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워 괜히 더 긴장이 되었다.

조용히 숨을 집어삼키는데 태상이 한 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고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가 무섭습니까.”

“네? 그게 무슨…….”

“내가 무서운 겁니까, 아니면 다른 게 겁이 납니까.”

“…….”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다정은 할 말을 잃었다.

제가 무슨 걱정하고 있는지 알면 그가 뭐라고 생각할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느냐며 황당한 표정을 짓겠지. 다정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날까 봐요. 그럼 곤란하실 것 같아서.”

“그런 건 내가 걱정합니다. 그러니까 호의는 그냥 받아들여요.”

“…….”

“대답, 해 봐요.”

아무런 말이 없자 태상이 부드럽게 다정을 재촉했다. 겁내는 아이를 물에 데리고 들어가는 것 같은, 자상하면서 단호한 태도였다.

다정은 마른침을 한번 모아 삼키고 천천히 입을 뗐다.


“고, 고맙습니다. 오늘 신세 좀 질게요.”

“…….”

순간, 서늘하던 태상의 눈매가 스르르 풀어졌다. 그와 동시에 입꼬리가 살짝 들리자 날카롭던 얼굴이 놀랄 만큼 부드러워졌다.

다정은 소년 같은 그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무표정 안에 숨겨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미소였다.


“가죠.”

간결한 한 마디와 함께 커다란 손이 눈앞으로 불쑥 들이닥쳤다. 다정은 어느새 익숙해진 손을 잠시 바라보다 그 위에 작은 손을 얹었다.


 

***

-띵.

경쾌한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태상은 열림 버튼을 누르며 다정이 먼저 내리기를 기다렸다.

좁은 공간에서 나오자 형광등이 밝게 켜진 넓은 복도가 나왔다. 가방을 끌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데 매끈매끈한 대리석이 구두 바닥에 착 감겨 왔다.

다정은 커다란 갈색 문 옆에 어색하게 멈춰 섰다. 층 전체를 한 가구가 쓰도록 설계되어 있어 그의 안내를 받을 것도 없었다.

-띠리릭.

잠금 해제를 푼 태상이 또 다시 다정을 안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 머리 위에서 은은한 노란 불빛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와…….”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널찍한 신발장은 일반 가정집에서 보는 것보다 몇 배는 컸고, 신발장과 연결된 복도는 거실을 지나 테라스까지 막힘없이 이어져 있었다.

바깥이 캄캄하지만 않았다면 신발장에 선 채로 바깥 뷰를 내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거 신어요.”

어느새 문을 닫고 들어온 태상이 신발장에서 새 슬리퍼 하나를 꺼냈다. 다정은 무늬가 없는 깔끔한 베이지색 슬리퍼에 작은 발을 조심히 끼워 넣었다.

태상은 바닥에 놓여 있던 같은 색의 슬리퍼를 신고 먼저 거실로 향했다.


“들어와요.”

“시, 실례하겠습니다.”

태상은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는 다정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김 비서와 가사 도우미 이외에는 누구도 들인 적 없는 집이다. 요새처럼 견고한 공간에 발을 들이는 다정의 모습은 마치 제 발로 덫에 들어가는 작은 사슴 같았다.

다정은 거북이처럼 목을 뺀 채 집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탐색을 마친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집이 참 넓네요.”

정사각형 모양의 거실은 마치 빌딩의 로비에서나 볼 수 있는 크기였다.

다정은 커다란 거실을 눈으로 한번 훑고 끄트머리에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거의 다 안 쓰는 공간입니다.”

“네…….”

이 정도로 넓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간, 태상이 불쑥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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