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감히 어딜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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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감히 어딜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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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감히 어딜 혼자
2022.11.10.
그는 ‘이 밤에’라는 단어에 힘을 꽉 실어 말했다.
“그게…….”
제가 지금 어디를 가는지 저야말로 알고 싶었다. 잠깐 자다 깬 덕에 몸은 더 천근만근이었고, 고된 비행으로 피로는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
다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선택지를 빠르게 복기했다.
현실 가능성이 없는 친구 집, 내키지는 않지만 쉽게 갈 수 있는 모텔. 좌우로 흔들리는 진자처럼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짧은 침묵 후, 다정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뭐 좀 필요한 게 있어서 편의점에요.”
“굳이, 이 시간에.”
“급하게 필요해서요.”
“가방을 다시 들고?”
“아, 그게…… 현관문을 열었다 닫으면 도어락 소리가 나잖아요. 제가 룸메이트랑 같이 사는데 깨우면 안 되니까…….”
모텔로 가기로 마음을 먹은 다정은 바쁘게 말을 지어냈다. 데려다준 은혜를 거짓말로 갚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내부 규정을 어기겠다는 발칙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매서운 남자의 눈동자가 탐색하듯 다정을 훑었다. 바싹 긴장한 다정은 빠르게,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눈을 피했다.
“네. 그렇습니다.”
“편의점이 어딥니까? 차로 가죠.”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돼요!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세요.”
고분고분 편의점 위치를 대면 가게 앞은 물론이고 다시 돌아오는 길까지 보초를 설 남자다. 다정은 두 손을 쫙 편 채 허공에서 바쁘게 내저었다.
태상은 눈썹 앞머리를 모은 채 다정을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집에 얼른 들어가요.”
“……네.”
다정은 흐릿하게 대답을 내뱉고 등 뒤로 가만히 신경을 집중했다. 뚜벅뚜벅, 바닥에 찍히는 발소리가 작아지며 그의 기척이 점점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차 문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헤드라이트 불빛이 좁을 골목을 꽉 매웠다. 다정은 참았던 숨을 한 번에 쏟아냈다.
“후…….”
익숙하지 않은 거짓말에 진땀이 다 나는 것 같았다.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어깨를 편안히 내려놓는데 태상의 차가 유영하듯 부드럽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정은 쓰라린 양심을 추스르며 가로등 아래 가서 섰다. 거짓말의 대가로 천벌을 받는다고 해도 그건 어차피 나중 일이고 당장은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유니폼을 사복으로 변신시키는 일부터.
다정은 곱게 진 쪽머리를 내리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 그러곤 가방에서 품이 넉넉한 카디건을 꺼내 단추를 맨 위까지 채워 입었다.
항공사의 상징과도 같은 하늘색 블라우스가 가려지자 더 이상 승무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유니폼 치마는 그대로였지만 흰색에 가까운 H라인 스커트는 흔한 정장 치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벙크(비행기 안 승무원들 취침 공간)에서 추울 때 챙겨 입는 카디건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다정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훑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잘 곳을 찾는 것뿐이었다.
***
“이게……?”
지은 지 1년 반이라던 상세 정보는 거짓말이었던 건지. 모텔 앞에 멈춰 선 다정은 할 말을 잃었다.
바닥이 살짝 깨져 있는 지상 주차 공간, 꽤 조잡해 보이는 형광 분홍색 간판. 거기다 입구 위에 드리워진 허름한 커튼까지.
유지 보수는 물론이고 인테리어 센스까지 어느 것 하나 1년 반을 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정은 입술을 꾹 말아 문 채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래, 어차피 하룻밤인데…….’
겉모습이야 어떻든 지붕만 있으면 하룻밤 자고 가는데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발이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낡은 건물도, 그저 그런 외관 때문도 아니었다. 발을 떼지 못한 건 바로 건물이 주는 묘한 은밀함 때문이었다.
모텔 입구는 길을 걷다가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불투명한 유리문은 건물 안쪽으로 쑥 들어간 듯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문에 다다르기까지 대여섯 개 정도 되는 계단을 올라야 했다.
주변의 시야를 의식한 듯한 설계가 간신히 다잡은 마음을 빠르게 흔들어 놓았다.
“후…….”
다정은 깊게 숨을 내쉬고 가방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럴 때일수록 생각보다는 행동이 우선이다. 조금 더 망설였다간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게 뻔했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크게 걸음을 옮기는데 골목 끝에서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이 밀려들었다. 집어삼킬 듯 덮쳐오는 빛이 마치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정은 노란 불빛을 힐끔 한번 보고 계단을 올랐다. 끝이 제법 뭉뚝한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과 닿을 때마다 딱, 딱 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계단을 반쯤 올랐을 즈음, 익숙한 울림 사이로 낯선 소리가 섞여들었다.
서서히 멈추는 엔진 소리. 달칵, 하고 열리는 차 문소리.
차의 주인도 이 모텔에 묵으려는 걸까. 낯선 손님과 어색한 동반 체크인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다정은 빠른 걸음으로 마저 계단을 올랐다. 기다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앞으로 끌어당기는데 순간, 관자놀이 옆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탁!
눈앞을 막은 건 커다란 손이었다. 굵은 뼈마디며 퍼렇게 튀어나온 핏줄로 보아 남자의 것임이 분명했고. 별안간 나타난 커다란 손은 유리문을 거칠게 꾹 눌렀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등 뒤를 가로막기라도 하듯 묵직한 음성이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여기가 편의점입니까?”
“……!”
목소리로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다정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가 뒤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아닐 텐데.”
대답이 없자 남자가 스스로 답을 이었다.
다정은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몸을 틀었다.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게 마치 망가진 구체관절 인형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겨우겨우 고개를 다 돌리자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단단히 난 듯한 그의 표정에 간이 절로 쪼그라들었다.
“부, 부사장님, 그게요…… 여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태상이 말끝을 툭 내리며 말했다. 사실 그 깊은 사정이 어떤 것인지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방범창 하나 없는 이런 곳에 혼자 두고 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는 서늘한 눈매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그럼 가면서 듣죠.”
“어딜……요?”
“집.”
태상은 깔끔한 동작으로 문에서 손을 떼더니 옆에 놓여 있던 트롤리를 집어 들었다. 꽤 묵직한 가방이 가뿐하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집……?’
너무 당당한 태도에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저 숨결만 새어 나오는데 태상이 지체 없이 몸을 돌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왔다.
“어, 어어! 잠시만요, 안 돼요!”
다정은 태상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손안에 들어오는 느낌이 하도 돌덩이 같아 당길 엄두도 나지 않는데 다행히 그가 자리에 멈춰 서 주었다.
서늘한 남자의 얼굴 위로 어두운 음영이 아스라이 드리웠다.
거짓말을 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걸까. 태상을 바라보는 다정의 얼굴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어졌다.
“……집에는 못 들어가요. 사정이 좀 있어서.”
“못 들어가는 거로 치면 모텔도 마찬가지죠. 에어 코리아 승무원은 공항 내 상업 시설에 한해서만 유니폼을 입고 출입할 수 있으니까.”
“…….”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세세한 규정까지 다 외우고 있는 걸까. 다정은 죄 없는 그의 성실함을 탓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정말 죄송한데 한 번만 못 본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유니폼 입은 거 티도 안 나는데…….”
다정은 아이보리빛 스커트를 손바닥으로 쓸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특별한 무늬도 디자인도 없는 치마,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베이지색 골지 카디건. 목에 사원증만 없다 뿐이지 다정은 점심을 먹으러 나온 강남역 사무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차림새였다.
태상은 그런 다정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머리도 푼 겁니까?”
“네…….”
하루 종일 동그랗게 말려 있던 터라 긴 생머리에 굵직굵직한 웨이브가 들어가 있었다. 여러 방향으로 흩어진 모양새가 꽤 자연스러웠지만 지금 상황에는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다정은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어깨 앞으로 가지런히 내렸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반응이라도 하듯 태상의 눈동자가 머리칼을 따라 유려하게 움직였다.
“확실히 유니폼을 입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그, 그렇죠? 그럼 그냥 이대로…….”
“안 됩니다.”
“……유니폼처럼 안 보인다면서요?”
“그래도.”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타협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에 잠시 품었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정은 차마 더 어쩌지 못하고 입술만 말아 물었다.
이렇게 딱 자를 거면 허락할 것 같은 태도를 취하지나 말지. 약이 살살 오르는데 음색을 조금 달리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혼자는 못 둡니다.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
“…….”
그가 그저 칼같이 원칙을 고수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다정은 허를 찔린 듯 멍하니 굳어졌다.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너른 보폭을 일부러 좁혀서 걷는데 등 뒤로 따라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태상은 우뚝 멈춰 서 고개를 돌렸다.
“안 오고 뭐 해요.”
“그, 그게…….”
두 계단이나 더 아래 서 있었지만 남자의 눈높이는 여전히 더 높았다. 비스듬하게 내려오는 시선이 다정의 얼굴 위로 선명하게 꽂혔다.
“차가 막힐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는 데 꽤 걸릴 겁니다.”
“꽤 걸린다고요……?”
다소 과장된 듯한 단어 선택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렸으니 차로 간다면 오 분이면 될 텐데.
고개를 모로 기울인 다정이 의아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 집, 여기서 금방인데요?”
“내 집은 금방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