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만져도 괜찮아?
(11/89)
11. 만져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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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만져도 괜찮아?
2022.11.06.
당황을 너무 한 탓인지 뜬금없이 엄마를 찾고 말았다. 새된 소리를 내지른 다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시간은 열두 시 반. 자다 깨서 잘못 본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야속한 시곗바늘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열두 시 반 맞습니다.”
“…….”
그때, 옆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가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다정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덧셈, 뺄셈을 시작했다.
공항에서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어림잡아 한 시간. 김포에서 열 시 반쯤 출발했으니 지금은 열한 시 반이어야 한다. 하지만 시곗바늘이 열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는 건…….
남의 어깨를 한 시간이나 무단으로 점유했음을 깨달은 다정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고 목 언저리마저 뜨끈했다.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자는 게 사과할 일은 아니죠.”
“제가 어깨도 베고 잔 것 같은데…….”
말을 이으며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는데 당혹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미세하지만 확실히 남은 구김, 검은 원단에 찍힌 파우더 자국. 남자의 슈트 위에 자리 잡은 흔적에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죄, 죄송해요!”
다정은 어떻게든 자국을 털어내 보려 두 손을 바쁘게 파닥거렸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가볍게 차 안에 울리는데 순간, 그가 여자와의 신체 접촉을 꺼린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어깨를 조금 만졌다는 이유로 비서를 전근시켰다고 했다. 여자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고 했고. 지금 만진 정도는 ‘조금’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사색이 된 다정은 두 손을 허공에서 꼭 말아 쥐었다. 동그란 주먹과 크게 뜨인 눈이 모두 태상을 향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뭐라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입만 달싹거리는데 태상이 가볍게 재킷 밑단을 끌어당겼다.
힘을 주어 착 당기는 손놀림. 그 가벼운 동작은 옷매무새를 정리한다기보단 짧은 소동을 마무리 짓는 듯한 느낌이었다.
“괜찮습니다.”
“……네?”
“괜찮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여자라면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싫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한다정이라면 보는 것도, 닿는 것도 다 괜찮다. 아니, 가슴 안쪽이 뻐근한 게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태상은 파도처럼 술렁이는 마음을 꽉 누르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계속 그러고 있을 거 없습니다.”
“제가…… 뭘 어쩌고 있는데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시선을 가볍게 떨어뜨렸다. 쿡 찌르듯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눈을 뭉쳐놓은 것처럼 조그마한 다정의 주먹이 있었다.
“아.”
어색하게 두 손을 맞잡으며 끌어내리는데 태상이 던지듯 말을 보탰다.
“그런 표정 지을 것도 없고.”
“제…… 표정은 또 어떤데요?”
“…….”
적절한 표현을 찾는지 고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잠시 후, 결론을 내린 듯 태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고 친 강아지.”
“아.”
다정은 미간에 재빨리 손을 얹었다. 눈이 워낙 동그란 탓에 눈썹을 조금만 모아도 꽤 불쌍한 표정이 연출되곤 했는데 아마 지금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눈에 힘을 풀며 미간을 살살 문지르는데 문득, 의아한 생각이 스쳤다.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맨살에 닿은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꽤 직접적인 접촉이었다. 게다가 자는 내내 어깨에 기대있기까지 했고.
소문대로 여자와의 접촉을 꺼리는 사람이었다면 저는 벌써 차에서 내쫓기고도 남았다.
역시 헛소문이었구나. 그런 결론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정은 가뿐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깨 마음대로 써서 죄송했습니다. 데려다주신 건 정말 감사하고요.”
“잘 쉬어요.”
“네. 부사장님도 조심히 돌아가세요.”
다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 문을 열었다. 길 위로 빼꼼히 한쪽 다리를 내밀자 더운 공기가 피부를 빠르게 감쌌다.
차에서 내린 후, 반듯이 서서 치마를 정돈하는데 덜컥, 하는 트렁크 소리가 들렸다. 혼자 알아서 짐을 내리려 했던 다정은 바삐 차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 트롤리를 내리고 있는 태상이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듣기 지겨울 것 같아 이제는 입에 올리기도 겸연쩍었다. 목 언저리를 살짝 쓸며 적당한 말을 찾는데 그가 트롤리 손잡이를 쭉 잡아빼 제 쪽으로 돌렸다.
“스케줄은 다시 원래대로 바뀔 겁니다.”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지위가 높은 사람이 현장 일에 개입하면 그만큼 문제가 생기기 쉬운 법이다. 다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눈썹 앞머리에 힘을 주며 가볍게 미간을 모았다. 옅게 잡힌 실금에 담긴 감정은 가벼운 책망이었다.
“물론입니다. 잘못된 걸 바로잡는 것뿐이니까.”
“…….”
너무 당연하게 못을 박으니 더 이상 토를 달기도 뭐했다. 다정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그럴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천연덕스럽게 흔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태상이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천천히 시선을 얽었다.
“명함, 버렸습니까?”
“네? 무슨…… 아, 아뇨.”
도르륵 굴러가던 눈동자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둘 사이에 오고 간 명함이라면 그가 준 것 하나뿐이었다.
“또 이렇게 연락 안 할 겁니까?”
머리 하나는 더 큰 태상이 눈동자만 떨어뜨려 다정을 바라봤다. 미꾸라지처럼 자꾸 도망만 가려고 하니 저절로 엄한 표정이 지어졌다.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다정이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연락을 일부러 안 한 게 아니라요…….”
“회사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전화해요. 당하고 있지 말고.”
“…….”
회사 꼭대기에 앉아 있는 남자다. 그런 사람에게 도와달라는 전화 같은 걸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정은 한마디 시원하게 해 주려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숨을 가볍게 들이켜며 입을 여는데 순간, 입술이 빠르게 굳었다.
짙은 그의 두 눈이 어쩐지 무력해 보였던 것이다. 까만 눈동자 위로 흐릿하게 번진 감정은 일종의 걱정, 혹은 불안이었다.
다정은 하려던 말을 조용히 집어삼키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알겠…… 어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태상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겠습니다.”
다정은 허리를 반으로 꾸벅 접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또각또각, 걸음을 옮기는데 어쩐 일인지 그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고집스레 서 있는 그의 두 발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빌라로 들어가는 내내 등 뒤가 따끔거렸다.
***
엘리베이터가 없는 구축 빌라는 계단을 오르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매일같이 마음속으로 ‘이번 달에는 이사 가고 만다.’를 외치지만 언제나 말뿐인 다짐이었다.
“아이고…….”
다정은 곡소리를 흘리며 계단을 밟았다. 매일 드는 트롤리라 익숙한 무게이긴 하지만 체력이 바닥이 난 지금은 유난히 버겁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구두 소리가 시끄러울까, 까치발을 든 채 계단을 오르는데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후우…….”
층계를 돌고 돌아 집 앞에 도착한 다정은 옅은 한숨과 함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꺄하하. 아, 하지 말라니까!”
“……?”
도어락 위로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시원시원하고 높은 웃음소리는 룸메이트 영미의 것이 분명했다.
전화 통화라도 하는 걸까. 다시금 손을 움직이는데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알았어. 미안, 미안. 안 할 테니까 얼른 촛불 꺼.”
“…….”
순간, 잊고 있었던 대화 한 토막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다정아, 너, 내 생일날 스케줄 뭐야?’
‘잠깐만…… 나는…… 파리 가서 36시간. 너는?’
‘나는 오프 신청해서 받았지.’
‘잘됐네. 도훈 씨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으면 되겠다.’
‘응. 그러려고. 근데 오빠가 그날 출장 갔다가 늦게 돌아오거든.’
‘아, 그래?’
‘응. 그래서 말인데…… 저녁에 오빠 데리고 집으로 와도 돼? 파티까지는 아니고 그냥 둘이서 케이크나 자르려고.’
생일날 집은커녕 한국에 있지도 않을 예정이었다. 당연히 된다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오후에 밖에 나갔다가 고깔모자도 몇 개 사다 주었다.
진상 손님만 안 만났더라도, 그가 제 스케줄을 바꾸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제가 영미와의 대화를 기억하기만 했어도. 수많은 ‘했더라도’가 머릿속에서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다정은 고개를 가로로 휘휘 저으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은 이렇게 남 탓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30분 지각했지만 봐 줘! 생일 축하해!
메시지를 전송한 다정은 트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리 월세를 같이 낸다고는 하지만 야심한 밤, 깨를 쏟는 커플을 방해할 권리는 없었다.
다시 까치발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하룻밤 신세를 질 친구 집을 찾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만약 누가 받아준다 하여도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까지 다 깨우게 될 게 뻔하고.
그렇다고 유니폼을 입은 채 모텔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멍하니 생각을 하다 보니 내려가는 걸음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다. 어느새 1층에 도착한 다정은 막막한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하는 유리문 소리와 함께 길가로 나서는데 익숙한 차가 눈에 들어왔다.
“……?”
저를 이곳까지 데려다주고 그것도 모자라 한 시간이나 정차해 있었던 검은 세단. 태상의 차가 집으로 들어갈 때 보았던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있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차를 바라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왜 안 들어갑니까?”
“부, 부사장님……. 그건 제가 할 말인데요?”
다정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해서 안 가고 있었습니다.”
“뭐가요?”
“불.”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건물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개를 따라 돌리자 층마다 하나씩 나 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아, 하는 짧은 탄성을 터뜨리며 시선을 떨궜다.
현관에서 1층, 1층에서 또 2층으로. 그렇게 3층까지 도미노처럼 노란 불빛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3층에서만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 남자는 집 앞이 아니라 문 앞까지, 눈으로라도 바래다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싶었다.
고집스럽게 멈춰 있는 그의 까만 구두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뾰족한 앞코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갑니까? 이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