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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 남자의 본능 (10/89)


10. 그 남자의 본능
2022.11.03.



“…….”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망설임이라는 걸 모르던 남자였다. 말투는 확신에 찬 듯 짧고 분명했고 매사 행동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조용히 입을 다문다. 골몰하는 남자의 얼굴이 꽤 낯설었다.

혹시 그가 나를 신경 쓴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던 걸까. 처음 보는 태상의 표정에 차분하던 다정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다정은 재빨리 질문을 반으로 쪼갰다.


“신경…… 쓰시는 건 맞죠?”

“네. 신경 쓰입니다.”

남자의 대답은 의외로 선선했다.


“왜요?”

“…….”

또 다시 이어지는 침묵. 뭐가 그리 어려운지 그는 고운 이마에 주름까지 잡고 있었다.

답을 회피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기다려주는 게 맞겠지. 다정은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순간, 커다란 도베르만 앞에서 ‘손’을 기다리는 견주가 된 기분이었다.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꽉 들어찼다.


“본능.”

“본능……이요?”

“네.”

“저를 신경 쓰는 게 부사장님의 본능이라고요?”

그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당연하게 느껴지니까.”

“…….”

무언가 많이 생략된 듯한 그의 말에 다정이 눈썹을 가볍게 좁혔다.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감정, 경영인으로서의 책임. 그가 느끼는 당연함이란 그런 것일까.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답안을 추려내는데 남자의 짙은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그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조금 더 사적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눈동자마저 점점 크게 떠지는데 그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은 내가 책임지고 싶다는 뜻입니다.”

“아…….”

천만다행이었다. 그의 대답이 조금만 늦었어도 ‘혹시나’의 늪에 빠져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를 날렸을 테니까.

다정은 괜히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제를 일으킨 건 그때 그 손님이고 부사장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신 것뿐이니까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부드럽게 읊조리는데도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 도움 때문에 지금 더 곤란해진 것 같은데.”

“…….”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도 부사장님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제 눈이 과녁이라도 된 듯 시선을 맞춰왔다.

아주 잠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그래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무슨 고집을 이렇게 당당하고 차분하게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에 저절로 곤란한 기색이 어리는데 가방 속에서 진동음이 연달아 울렸다.

반갑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다정은 부재중 모드로 돌릴 생각으로 바삐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액정을 보는 순간 쉽사리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받아요.”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태상이 가볍게 말하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다정은 태상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전화라 받아야겠네요. 잠시만요.”

발신인은 보육원을 함께 퇴소한 친구 정희였다. 그간 비행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보육원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는데 그녀에게도 소식이 전해진 게 틀림없었다.

다정은 급히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어, 다정아. 나.」

평소보다 확연히 낮은 목소리였다. 덕분에 다정은 통화의 끝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미안한데…….’로 시작해 ‘다음에 한번 보자.’로 끝나는 어색한 대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짧은 안부 인사를 마친 그녀는 어렵사리 본론을 입에 올렸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누굴 도와주고 그럴 형편이 아니라…….」

“응…… 그래.”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서명운동은 참여했어.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

“아니야. 도움이 되지 왜 안 돼.”

밝은 목소리와 달리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원장 아빠 모시고 식사나 한번 하자.」

“응. 그래, 그러자. 내가 또 전화할게.”

다정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액정에서 발신인의 이름이 사라지자 텅 빈 대기 화면만 남았다. 다정은 공허한 눈으로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짧은 정적을 깬 건 나지막한 태상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뇨…….”

다정이 더듬거리며 입을 떼자 분홍빛 입술이 작게 오물거렸다.

태상은 그 말랑한 움직임에 가만히 초점을 맞췄다.

아니라는 말만 내뱉는 입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잇새로 흘러나오는 말들은 전부 다 미운 말뿐인데. 어쩐 일인지 분홍빛 입술에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있다고 하면 내가 그것까지 신경 쓸 것 같아서. 그래서 아니라고 합니까?”

“네. 그러고도 남으실 것 같아서요.”

“제대로 봤군요.”

“그럼 이것도 본능이라고 하실 건가요? 돕고는 못 배기는 본능?”

가볍게 끄덕. 태상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시면서요?”

“알 필요 없습니다.”

“…….”

황당하긴 했지만 그다운 대답이었다. 또 굉장히 혹할 만한 답이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효성의 후계자다. 그가 나선다면 보육원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귀가 녹을 것처럼 달콤한 제안에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차가 부드럽게 코너를 돌았다.

유연한 움직임에 맞춰 황금빛 가로등 불빛이 차 안에 일렁였다. 다정은 드리웠다 사라지는 노란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도움은 받을 수 없어요.”

“어째서……?”

“저는 부사장님이 곤란한 일을 겪어도 도와드릴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습니까.”

수긍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찌르는 듯한 눈동자는 억지로라도 제 손아귀에 ‘도움’을 밀어 넣을 기세였다.

따가운 시선에 눈꺼풀이 제멋대로 떨렸다. 다정은 흔들리는 눈동자에 간신히 힘을 주고 태상을 바라봤다.


“그, 그래도 아까 한 말은 진심이에요. ‘말씀은 감사하다.’라고 했던 거.”

“말은 그저 말일 뿐입니다.”

“아니에요, 그저 말일 뿐이라뇨.”

“…….”

무슨 뜻이냐는 듯 태상이 가만히 다정을 들여다봤다.


“그러니까…… 그게…… 요새 정말 일이 많았거든요……? 근데 먼저 물어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도와줄 건 없냐, 빈말이라도 좋았을 텐데.”

하지 마라, 미안하다 소리만 질리게 들었던 지난 며칠이었다. 심지어 왜 굳이 연락해서 마음 불편하게 하느냐는 얘기까지 들었고.

누구 하나 제가 괜찮은지 물어봐 주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제가 스스로 나선 일이니까, 보육원만 지킬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니까.

하지만 툭 던지는 듯한 남자의 한 마디가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괜찮지 않았다. 아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얄팍한 자기 최면이 깨지자 참았던 통증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씁쓸한 기운을 담고 간신히 웃어 보이는데 그가 지긋이 눈을 맞춰 왔다.


“많이 피곤했겠네요.”

“……네.”

다정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제도 네 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눈 좀 붙여요.”

“그래도 그건 좀…….”

“보는 사람 없습니다. 나도 안 볼 거고.”

“…….”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으음…….”

물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듯 몸이 무거웠다. 목 언저리가 뻐근하게 아파 고개를 움직거리는데 머리를 받치고 있는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뭐……지?’

쇳덩어리에서나 느껴질 법한 단단함.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베개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감긴 눈꺼풀 위로 감도는 불빛. 퉁퉁 부은 종아리며 발을 꽉 조이는 구두.

버스가 조금이라도 빨리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코끝에 은은한 우디 향이 스쳤다. 가볍고 드라이한 향이 왜인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디서 맡아봤는지, 누구 향인지. 흐릿한 의식 속에서 자꾸만 기억이 들쑤셔졌다. 순간, 방에 불을 켠 듯 의식이 번쩍하고 돌아왔다.

비척거리며 걸어 나온 공항,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검은 세단.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만난 차태상 부사장.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장면 중 마지막은 별로 졸리지 않다며 박박 우기던 제 모습이었다.


‘부사장님과 이야기 나누다 잠 다 깼습니다.’


‘지금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요.’

 
억지로 쥐어짜낸 거짓말이 무색할 정도로 완전히 골아떨어져 버렸다. 관자놀이 부근이 얼얼한 게 그의 어깨를 베고 잠이 든 것 같았고.


‘하.’

얼마나 피곤하면 이렇게 딱딱하고 뭉뚝한 뼈를 베고 잘 수 있는 건지.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와중에도 짧은 감상이 머리를 스쳤다.

다정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모든 것은 잠들기 전 그대로였다.

조용하게 분리된 뒷좌석, 약하게 흐르는 에어컨 바람. 딱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면 이상하겠지.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 다정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앞으로 한번 푹 숙였다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흡!’

놀란 다정은 숨을 확 집어 마시며 두 눈을 꽉 감았다. 눈을 감는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사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마 위로 따스한 느낌이 와 닿았다. 단단하면서 기다란 게 그의 손가락인 듯싶었다.

그는 손바닥을 쫙 펴 이마를 감싸다니 동시에 자기 어깨를 비스듬히 내렸다. 한없이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다정은 그의 어깨와 목 사이에 편안히 머리를 누일 수 있었다. 근육이 워낙 탄탄해 여전히 조금 아픈 느낌은 있었지만, 돌처럼 단단한 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러고 있으면…….’

키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다. 상체를 활처럼 구부리고 있으니 허리가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자는 내내 베고 있었으니 어깨도 많이 아플 거고.

다정은 괜히 ‘으음…….’ 소리를 내며 깨어나는 척을 했다. 고개를 움직이며 슬그머니 눈을 뜨는데 마침 손목시계가 눈에 딱 들어왔다.


“……?”

정신은 돌아온 지 오래고 시야도 맑기만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곗바늘이 이상했다. 제 손목을 가만히 노려보던 다정은 순간 스프링 튕기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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