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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왜 신경 쓰는 거예요 (9/89)


09. 왜 신경 쓰는 거예요
2022.10.30.


명옥은 벙찐 얼굴로 태상을 바라봤다. 그가 저를 딱히 엄마 취급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막 나간 적도 없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는데 태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는군요.”

「아, 그랬습니까? 별건 아니고 김 상무님이 객실승무부에 연락을 취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스케줄을 관리하는 운항팀 쪽이었다는데……. 비서들을 시켜 전화 건 거 보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태상이 눈썹 앞머리를 사납게 구기며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일그러진 눈매에 새까만 눈동자가 더해지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명옥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차 회장도 그렇고 타계한 남편도 그렇고, 차 씨 집안 남자들은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시선을 돌리는데 태상이 간결한 한마디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의 눈동자가 제게 향하자 명옥은 언제 그랬냐는 듯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이제야 내가 보이니?”

“아까부터 보였습니다.”

“그거 참 대단히 황송하구나.”

“별말씀을요.”

있는 힘껏 빈정대는 대도 돌아오는 건 단정한 무시뿐이었다.

명옥은 태상의 이런 점이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상대도 안 해주는 사람 앞에서 저 혼자 발을 동동 구르는 느낌이었고 그가 부리는 아랫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눈을 바짝 치켜뜨며 노려보는데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태상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명옥의 옆을 지나쳤다.


“행동 조심해. 너 하나 때문에 요새 우리 그룹이 얼마나 망신을 당하는 줄 아니?”

“잘됐군요.”

“뭐?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당신은 내가 그룹 망신시키고 다니는 거 좋아하니까 잘된 일 아닙니까? 아…….”

태상은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뒤따라오는 명옥을 쳐다도 보지 않고 열림 버튼을 눌렀다.


“정확히는 직접 나서서 제 얼굴에 먹칠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죠.”

“어머,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내가 무슨 먹칠을 했다고. 누가 들으면 내가 뒤에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내고 다니는 줄 알겠다.”

명옥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간신히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정신과 상담에 온갖 추문에…… 소문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너, 주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알기는 하니?”

“…….”

태상은 명옥의 시끄러운 지저귐을 깔끔히 무시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하층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도발적인 시선이 명옥에게 향했다.


“……뭐, 뭐니? 그 눈빛은?”

끝으로 갈수록 날렵함을 더하는 턱,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거기다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치켜뜬 두 눈까지.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느와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위압적이었다. 명옥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윽고 태상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많은 거로 치면 당신 아들이 나보다 더해.”

“뭐라고? 너, 너……!”

그때,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문이 스르르 닫혔다. 명옥이 뒤늦게 열림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지하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머릿속도 엉망인 주제에, 할아버지 뒷배만 믿고 설치는 게.

그녀는 온갖 표독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애꿎은 엘리베이터 버튼에 화풀이를 했다.


 

***

늦은 밤, 김포공항 도착 층. 힘들기로 유명한 퀵턴 비행을 이틀 연속으로 소화한 다정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체류하지 않고 바로 돌아오는 스케줄, 퀵턴.

잦은 이착륙과 살벌하게 긴 듀티 시간을 자랑하는 이 일정은 승무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비행 1순위였다.


“하아…….”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이었다. 보육원을 나설 때만 해도 그냥 핑계 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 뒤로 정말 스케줄이 미친 듯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정은 공항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버스 승차장으로 향했다.

-위잉.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가방 위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자 스케줄 공지 앱에서 온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스케줄이 변동되었습니다.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메시지를 확인한 다정은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엔 또 뭐가 어떻게 바뀐 건지. 불안한 마음으로 어플을 실행시키는데 아니나 다를까, 길고 힘든 비행들이 달력 가득 들어차 있었다.

순간, 의미심장했던 남자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능력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는 사람이니까, 김 상무라는 사람.’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설마’였다. 오늘은 ‘혹시 그럴지도’였고. 하지만 이렇게 확인 사살까지 당하고 나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상무씩이나 되는 사람이 치사하게 뒤에서 복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 하하…….”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차례 웃고 나니 몸에서 힘이 쭉 빠져 고개가 툭 떨어지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다정 승무원?”

“네? 누구……세요?”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눈동자를 최대한 부드럽게 굴리며 정체불명의 남자를 살폈다.

세련됐지만 결코 눈에 띄지 않는 정장, 말끔하게 넘긴 머리에 검은테 안경. 개성을 죽이려고 최대한 노력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는 차분하게 다정의 탐색을 받아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저를요?”

“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멀찍이 주차된 세단으로 시선을 던졌다. 느리지만 단호한 움직임. 자석에 이끌리듯 함께 차를 바라보던 다정은 이내 퍼뜩 눈을 돌렸다.


“누가 저를 기다린다는 말씀이세요?”

“차태상 부사장님입니다.”

“네? 부사장님이 저를 왜…….”

“잠시만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설명은 부사장님께서 하실 겁니다.”

“…….”

곁에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며 부탁과 명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말투까지.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 언저리가 다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정은 핑계를 대고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그러자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지루한 차림의 남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해가 될 일도 아니고요.”

“…….”

잠시 망설이던 다정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서 마주친 게 결코 우연일 리 없다. 그리고 그가 원한다면 이런 식의 만남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숙제를 해치운다 생각하자, 다정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차를 향해 걸었다.


“주시죠.”

뒷좌석 문 앞에 도착하자 남자가 자연스레 트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왜…….”

“주차를 오래 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타시면 일단 차를 출발시키겠습니다.”

“아…….”

도착편 비행기가 많은 시간인지라 승용차 정차 구역은 꽤 붐볐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다정은 남자에게 선선히 트롤리를 내어주었다. 차가 공항을 떠난다 해도 어차피 나중에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세워 달라 하면 그만이었다.

-달칵.

차 문을 열고 허리를 숙이자 늦은 밤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주 빠르게, 그날의 감각이 온몸에 덧씌워졌다.

집요한 시선에 따끔거리던 피부, 낮은 목소리가 주던 잔잔한 떨림. 기억에선 제법 흐릿해졌지만 몸은 아직도 남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정은 조심스레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안녕하세요.”

긴장한 탓인지 아기 염소 같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늦게 ‘큼, 큼’ 거리며 목을 푼 다정은 괜스레 치마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태상은 짙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뒷좌석. 나란히 마주보고 앉자 그와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는 느낌이었다.

늘 그렇듯 그는 본론으로 바로 뛰어들었다.


“왜 전화 안 했습니까?”

“네?”

기껏 목을 가다듬은 보람도 없이 발랑 뒤집어진 소리가 났다.

어째서 이 남자는 입을 열 때마다 스트레이트 훅을 날리는 걸까. 살짝 일그러진 눈썹에 어느새 원망의 기색까지 서렸다.


“필요한 일이 있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래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왜 전화 안 했냐고 물어보려고?”

“겸사겸사.”

“겸사겸사…… 뭐요?”

수수께끼 같은 남자의 대화법에 다정의 이맛살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말이 많지 않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오밤중에 불쑥 나타난 사람치고 설명이 너무 적었다.

빤히 들여다보며 눈만 깜빡이는데 조각 같은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데려다주려고 왔습니다. 출발해 주시죠.”

태상은 운전석을 향해 짧게 지시를 내렸다.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는 가죽으로 된 파티션으로 막혀 있었다. 가운데 부분만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기사가 콘솔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자 유리벽이 불투명하게 물들었다.


“피곤할 텐데 좀 자도 됩니다.”

“아니…….”

비행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공항에 와 있더니 사는 곳이 어디냐 묻지도 않고 차를 출발시킨다.

모든 것이 뜻하는 바가 명확해 눈매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다정은 눈을 제법 앙칼지게 뜨며 태상을 바라봤다.


“개인정보법 위반하셨네요. 이러라고 있는 사원 정보가 아닐 텐데요.”

“더한 것도 어겨 봤습니다.”

툭 던지는 말투인데 목소리가 낮아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눈을 내리깔아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 하지만 그러자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잠시 고민하던 다정은 슬며시 눈동자를 옆으로 흘렸다. 일단 그의 귀 언저리를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릴 계획이었다.

야금야금 티 안 나게 고개를 돌리는데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덕분에 도망가던 시선이 다시 그에게 끌려갔다.


“연락, 왜 안 했습니까. 곤란한 일 겪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 일 없는데요.”

당치도 않은 거짓말에 태상의 미간이 빠르게 좁혀졌다.

마음 같아서는 관련된 자들을 지금 당장 해고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다정의 마음을 다치게 할 것 같았다. 그런 희미한 예감이 태상을 인내하게 했다.

그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조급함을 꾹 누르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루에 이착륙만 네 번 하는 제주 노선 이틀 연속 투입. 고작 하루 쉬고 홍콩 퀵턴, 마카오 퀵턴. 그 뒤로도 한 달 내내 최소 휴무와 강도 높은 비행.”

“…….”

“이래도 아무 일이 없는 겁니까?”

“그, 그건…….”

분명 높낮이 없는 톤이었다. 언뜻 들으면 별 감정이 없이 말하는 것 같았고.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목울대를 누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났다.

이상한 예감에 남자의 얼굴을 살피자 힘이 잔뜩 들어간 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화를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스, 스케줄이 바뀌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에요.”

“아닐 텐데요.”

꿰뚫을 듯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만약 한 번 더 우기면 이번에는 운항팀 매뉴얼을 읊을 기세였다. 다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목 언저리에 걸려 있었던 말이었다.


“왜…… 왜 자꾸 저한테 신경 쓰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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