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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황소 VS 재규어 (8/89)


08. 황소 VS 재규어
2022.10.27.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니.”

“…….”

불러주지도 못할 거면서 이름 같은 걸 지어줘도 되는 걸까. 왠지 모를 죄책감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정은 복잡한 마음으로 가만히 아이를 들여다봤다.

복숭아처럼 발그스레한 두 볼, 제법 복슬복슬한 까만 머리털. 누구를 닮았는지 모를 아이는 천사처럼 예쁘기만 했다.


“왜? 어렵니?”

“네. 어떻게 짓는 건지 모르겠어요.”

“음…… 그럼 네 이름을 생각해 보렴.”

“제 이름이요?”

“그래. 엄마, 아빠가 왜 다정이라고 지었는지 얘기해준 적 없어?”

“…….”

세상에 다정한 사람이 많으면 좋으니까 다정이로 지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단순하게 짓는 게 어딨냐며, 애들이 얼마나 놀리는 줄 아느냐며 따져 물었었고.

누렇게 바랜 책장 같은 추억이었다. 다정은 피식 한번 웃고 다시 아이를 바라봤다. 작은 손이 옴짝거리는 게 마치 뭐라도 잡으려는 것 같았다.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 입이 스르르 열렸다.


“……희망이요. 차희망.”

“희망이? 이름 좋네. 어이쿠, 얘 봐라. 마음에 들었나 보다.”

철중은 오물거리는 아이 입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알아들었나 봐요.”

“그럼, 다 알아듣지.”

인자한 원장 아빠의 미소를 바라보는 다정의 마음이 살며시 단단해졌다.

지켜야 할 희망이 생긴 이상 손 놓고 철거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다정은 철중과 희망의 모습을 눈에 꾹 눌러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한데 저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

“더 있다가 간다더니 왜?”

“갑자기 스케줄이 바뀌었다고 연락이 왔지 뭐예요. 내일 새벽 비행이라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겠어요.”

“무슨 회사가 사람을 그렇게 밤낮없이 부린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아빠, 저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래. 영진이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네!”

원장실을 나서는 다정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렸다.
 


***

묵직한 햇살이 들이치는 오후, 고요하던 집무실에 고저 없는 음성이 단조롭게 울렸다.

억, 조 단위 숫자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보고. 간담이 서늘해질 법도 한데 말을 잇는 태상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이미 보고 받아서 아시겠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영업 이익이 7.2% 상승했습니다. 여객 부문에서 운송 수익률은 크게 차이가 없으나 화물에서…….”

속내를 숨기고 우아하게 이어지는 사교댄스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보고 받았음’을 짚으며 치고 들어오는 태상 탓에 차 회장은 더 이상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크흠…….”

그는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이미 다 아시는 보고, 더 해 드릴까요?”

“아직까지 성을 내고 있는 게냐?”

“실적 보고를 하는데 성을 낼 게 뭐가 있습니까.”

“…….”

다른 일 때문에 불렀다고 인정하는 순간 고집불통 손주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게 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위만 뱅뱅 돌며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는 일.

잠시 고민하던 차 회장은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전략을 택했다.


“그래. 말레이시아 항공과 제휴 건은 어떻게 되었고?”

“저희 쪽 요구 조건 다 수락했습니다. 보잉 드림라이너 3대는 내부 구조 변경 후 양도하기로 했고요.”

“네가 나서니 역시 일 처리가 빨라서 좋구나. 그런데…….”

차 회장은 국화차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켜며 본론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그 낌새를 읽은 태상이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 저는 회의가 있어서 이만.”

“잠깐 있어 보거라.”

“업무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아니라고 하면 나갈 게냐?”

“네.”

오뉴월 서리처럼 단호한 한 마디에 차 회장이 혀를 ‘쯧’ 하고 찼다.

태상은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한 손주였다. 크면 마음대로 주무르기가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야박해질 줄은 몰랐다.

예전 같으면 할아버지의 위엄을 내세우며 뭐라 한 마디 해줬을 텐데.

그간 맞선이네, 약혼이네 태상을 달달 볶은 죄가 있어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노란 찻물만 연신 들이켜던 차 회장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래. 업무 보고는 핑계다. 손주놈 한 번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니 내 이런 치졸한 수를 쓰는 수밖에.”

“하실 말씀 있으시면 김 비서 통해 전달하시면 됩니다.”

“비서들이 중간에서 무슨 죄라고.”

“그럼 사내 메신저로 말씀 남기시죠.”

이번에야말로 자리를 뜨려는 듯 태상이 재킷 단추를 끼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차 회장은 상체를 바싹 세우며 바삐 입을 열었다.


“미연이랑은 정말 안 될 것 같으냐?”

“다 끝난 얘기입니다.”

“미연이 입장은 생각 안 해?”

“그래서 제가 파혼당하는 거로 해두지 않았습니까.”

“그것 참, 퍽도 대단한 자랑거리로구나. 덕분에 어떤 소문이 도는지는 알고?”

“압니다.”

“…….”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손주의 태도에 차 회장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부사장은 여자에 관심이 없다.

태상이 회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사내에 나돌던 말이었다. 조건도, 외모도 모든 것이 완벽한

그의 곁에 여자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목격담이 늘더니 소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부사장은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여자를 기피하는 거다,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의심이 퍼져가는 가운데 오랜 친분이 있는 대성그룹과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경제, 사회 심지어 연애 면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약혼설은 뜬소문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얼마 후, 보란 듯이 약혼이 깨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태상이 원인이라고 하고.

덕분에 잠잠하던 소문에 다시 불이 붙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탕비실에서 구내식당으로, 식사 자리에서 다시 회식 자리로.

발 없는 말은 천리를 달려 회사 중역과 주주들에게까지 이르렀다. 그저 헛소문이라며 믿지 않는 사람도 많았지만 솔깃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차 회장은 자기 손으로 손주의 입지를 약화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차 회장은 참담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문이라는 게…… 결국엔 그 사람을 잡아먹는 게야.”

“나쁠 거 없죠.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니까.”

“…….”

담백한 그의 태도에 억장이 무너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계속 치료를 받았으니 이제는 좀 괜찮아질 법도 한데 그의 상처는 성격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그래도 그렇지 이 녀석아…… 파혼 당한 거로 할 건 또 뭐냐. 그냥 서로 합의하에 내린 결론이라고 하면 될 것을.”

“미연이 의견이었습니다. 아주 적극적이더군요.”

“뭐, 뭐? 미연이가?”

“네. 이 정도 분풀이는 하게 해줘야 없던 일로 쳐주겠답니다.”

“내 그 아이를 그렇게 안 봤는데…….”

“며칠 내로 기사 하나 더 나갈 겁니다. 제가 얼마나 구제불능 약혼자였는지에 대해서.”

“뭐야? 아니, 강 회장,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는 도대체 손녀딸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게야!”

40년 지기 친구가 ‘영감탱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차 회장은 씩씩거리며 가슴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태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착 감싸는 검은 슈트를 입은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늘씬한 재규어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눈빛을 달리하고 차 회장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 속 광채가 어리는 게 마치 보이지 않는 먹잇감을 노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조만간 이사진들과 마찰이 있을 겁니다. 신경 쓰시는 건 좋습니다만 막지는 마십시오.”

“…….”

차 회장은 잠시 멈칫하다 이내 태상을 올려다봤다. 덩달아 얼굴색을 달리한 그의 모습에서 친숙한 할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새 ‘재계의 황소’가 된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종류의 마찰을 말하는 게냐.”

“해고 같은 종류의 마찰입니다.”

“…….”

부사장으로 취임한 지 2년, 아직까지 중역들과 척을 진 적 없는 태상이었다.

하지만 피하고 돌아가기만 해서는 결코 끌고 나갈 수 없는 게 회사 일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차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막지 않으마. 네가 해야겠다면 해야 하는 거겠지.”

그는 팔걸이에 양손을 떡하니 올리며 말했다. 풍채 좋은 노인의 어깨가 커다란 가죽 소파에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떡하니 버티고 있는 듯한 모습은 무언의 지지였다. 태상은 노골적인 응원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응수했다.


“그래. 그런데 태상아.”

“네.”

회장실을 나서던 태상이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미연이랑은 정말 안 될 것…….”

-쿵.

태상은 목소리를 가둘 기세로 문을 잇는 힘껏 눌러 닫았다.


“하아…….”

홀로 남겨진 집무실 안, 차 회장은 기다란 한숨을 흘렸다.

태상이 이대로 독수공방이라도 한다면, 대가 끊기기라도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먼저 간 아들 내외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차갑게 식은 국화차를 들이켜다 도로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국화차가 너무 썼다.

***

시계를 한번 확인한 태상은 바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고라는 탈을 쓴 잔소리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통화음이 울린 지 두 번, 늘 그렇듯 김 비서가 단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다음 회의에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먼저 시작하라고 연락 넣어주시죠.”

「벌써…… 말씀 끝나신 겁니까?」

김 비서는 ‘회장님’라는 단어를 쏙 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안 끝났지만 제가 끝냈습니다.”

「……지금 바로 차 대기 시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간결한 답과 함께 전화를 끊으려는데 태상이 통화의 끝자락을 붙들었다.


“지난 번 부탁드린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 상무에 관련된 내용 말씀이십니까?」

“네.”

「…….」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5분일 텐데. 그 사이도 참지 못할 만큼 급한 사안이었던 걸까.

김 비서는 의아함을 누른 채 바삐 말을 이었다.


「최근 김 상무님은 구매팀, 자재부와 접촉이 많았습니다. 업무 관련된 미팅이라고 보기엔 장소가 너무 사적이었고요.」

“그 밖에는요?”

「얼마 전에 윤명옥 본부장님 사무실에 찾아갔다고 합니다. 머무른 시간이 길지는 않았는데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김 비서는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태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싸늘할 만큼 조용한 얼굴에 고여 있는 건 담담한 분노뿐이었다.

그때, 비음이 섞인 높은 목소리가 복도에 찐득하게 깔렸다.


“아버님 비위 맞추러 왔니?”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할 새도 없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태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굳이 챙겨온 두툼한 서류 뭉치, 화려하면서도 격식 있는 정장.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여자는 태상의 ‘엄마’, 명옥이었다.

명옥은 특별한 용무가 없어도 오늘처럼 회장실을 드나들며 세를 과시하곤 했다.

삐딱한 시선으로 태상을 바라보던 그녀는 팔짱을 척 끼며 입을 열었다.


“하긴, 그렇게 크게 사고를 쳤으니 눈치를 볼 만도 하지.”

“그 여자…… 잘 주시해주십시오.”

“뭐?”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명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미간을 바싹 좁힌 채 태상을 훑듯이 바라봤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발견한 명옥은 기가 찬다는 듯이 ‘하’ 소리를 내고 말을 이었다.


“어쩜 나이가 들수록 더 싸가지가 없어지나 몰라.”

“더 파악하신 사항 있으십니까?”

“이게 진짜…….”

태상은 눈을 빤히 마주치며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무시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그의 태도에 명옥의 얼굴이 점점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얘! 내가 너한테 말하잖아.”

“시끄러…….”

“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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