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숨겨진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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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숨겨진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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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숨겨진 사정
2022.10.23.
“진짜 괜찮은 거 맞냐고요.”
“괜찮아. 애들이 축구 하자고 하도 졸라서 같이 뛰다가 좀 다친 거야.”
“아빠 나이에 축구가 웬 말이에요.”
“아직은 할 만해.”
철중은 어깨를 한번 빙글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밝은 얼굴만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았다.
다정은 구석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아빠는 이제 깍두기나 하세요.”
“모양 빠지게 깍두기가 뭐냐.”
“알았어요. 그럼 심판.”
철중은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매번 묻는 뻔한 질문을 또 시작했다.
아픈 데는 없는지, 비행기 타는 일이 힘들지 않은지. 수천 번도 더 한 질문이건만 그는 지겹지도 않은 듯했다.
다정이 괜찮다 소리를 열 번 정도 했을 즈음, 그는 겨우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물론, 역시 지나치게 익숙한 질문이었다.
“영진이도 잘 지내지?”
“그럼요. 걔야 뭐, 늘 잘 지내죠.”
“그래. 다들 잘 지내면 됐어. 근데…… 다정이 넌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왜요?”
“근심이 가득하잖아.”
“…….”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표정에서 다 티가 났던 모양이다. 다정은 어색하게 올렸던 입꼬리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말, 그 불편한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아빠, 보육원에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그런 거 없다.”
“영진이한테 다 들었어요. 아빠가 무리하다 다쳤다고. 요새 보육원 사정, 안 좋은 거예요?”
“다정아.”
철중의 따뜻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주름진 눈가에 힘을 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인제 그만 네 인생 살아야지. 언제까지 여기 식구들 신경 쓸 거야.”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렇게 치면 아빠는 아빠 인생 살지 우리 왜 다 키웠는데요.”
섭섭한 마음에 말이 저절로 뾰족하게 나갔다. 하지만 철중은 부드럽게 웃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데 문 너머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복도를 꺾으면 걸음마도 못 뗀 아기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알려주세요. 저도 식구잖아요. 알아야죠.”
다정은 의자를 바싹 끌어당기며 철중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러자 철중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자체 지원이 많이 줄었어. 후원도 그렇고. 그래서 요새 살림이 좀 어렵단다.”
“또요? 도대체 줄일 게 뭐가 있다고……. 일단 이번 달 월급 나오는 대로 제가…….”
“다정이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어.”
철중이 입을 한일자로 딱딱하게 굳히며 엄하게 말했다. 평소 후원금을 보낼 땐 전화로 잔소리를 들어서 몰랐는데 눈앞에서 보는 그의 화난 표정은 꽤 무서웠다.
“너는 네가 보살펴야 하는 사람부터 잘 챙겨.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영진이요? 걔는 시베리아 벌판에 데려다 놔도 혼자 빈정거리면서 잘 클 애예요. 아시잖아요.”
“영진이 말고.”
“……?”
“너, 다정이 너 말이다. 남들한텐 한없이 다정하면서 왜 너한테는 안 그래? 지금까지 돈 벌어서 너한테 쓴 적이 있기나 해?”
“아빠…….”
걱정과 훈계가 섞여 있는 철중의 말이 가슴 한구석을 콕 찔렀다.
하지만 나를 먼저 생각하기엔 어린 동생의 누나이자 엄마로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길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듣는다 한들 뭘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그저 영진과 제게 울타리가 되어준 원장 아빠를 보살피는 게 자신을 아끼는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정은 다시 한번 고집을 부려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빠, 그래도…….”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원장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원장님, 아가방에 좀 와보셔야…… 아, 다정 씨, 왔어요?”
“은혜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정은 방 안으로 들어온 여자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작년부터 희망원의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보육 선생님이었다.
분유 자국이 군데군데 묻은 앞치마를 입은 그녀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바쁘시죠?”
“말해 뭐해요.”
“저 오늘 휴무니까 일 좀 도와드리다 갈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하여간 얘는 변하질 않아.”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철중이 한숨과 함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은혜가 퍼뜩 고개를 돌리며 바삐 입을 열었다.
“새로 온 애가 영 울음을 안 그치네요. 아무래도 계속 원장님을 찾는 것 같아요.”
“어린 게 낯선 품이 무서웠나 보네. 내가 가 봐야지.”
철중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금방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원장실을 나섰다.
“다정 씨, 그럼 이따 봐요.”
“선생님, 잠시만.”
“네?”
“저랑 잠깐 얘기 좀……,”
“아…… 그게,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 원장님 도와드리고 이따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눈치를 챈 은혜가 슬쩍 엉덩이를 빼며 도주를 시도했다. 다정은 잽싸게 팔짱을 껴 그녀를 결박하고 원장실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정은 은혜를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히고 팔걸이 위에 두 손을 척, 하고 얹었다.
“다, 다정 씨?”
“선생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뭘요……?”
“보육원에 무슨 일 있죠?”
“무슨 일이야 맨날 있죠. 일은 넘치고 애들은 사고치고.”
“……말씀 안 해주시면 저 휴무 때마다 내려와서 귀찮게 할 거예요. 전화도 맨날 할 거고.”
다정이 눈에 바싹 힘을 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차피 태생이 동그란 강아지 눈이라 별다른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진지하다는 걸 알려주기에는 충분했다.
“아휴……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눈에 힘 좀 빼요. 어차피 무섭지도 않아.”
어설픈 취조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녀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만하라는 표시를 했다.
괜스레 멋쩍어진 다정은 슬쩍 꼬리를 내리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은혜가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불편한 이야기의 서막을 올렸다.
“다정 씨, 원장님한테도 같은 얘기 들었겠지만, 보육원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요.”
“어떻게 그래요. 아빠 건강도 안 좋고, 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
“더 어려워질 거니까. 더, 더 어려워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정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커다란 눈만 연신 껌뻑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 보육원 없어지게 생겼어요. 아니, 없어져요.”
“네? 갑자기 왜요?”
“땅값이 갑자기 올랐으니까요.”
“땅…… 값?”
“네. 우리 보육원 부지,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써 왔던 거, 다정 씨도 알죠?”
“그럼요. 후원자님이 임대해 주신 거잖아요.”
희망원은 사유지 위에 건립된 보육원이었다. 부지는 자선 사업에 뜻이 있으신 한 후원자께서 내어주신 땅이었고, 지난 삽십 년간 매달 소정의 임대료를 내는 형태로 운영되어 왔다.
“그 후원자님께서 작년에 돌아가시면서 이곳 부지가 자식들에게 넘어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 뜻이니 그대로 잇겠다면서 임대료를 올리지 않으셨고요.”
“그럼 아무 문제 없는…… 아!”
바쁘게 말을 잇던 다정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는 길에 보았던 많은 화물 트럭, 여기저기 처져 있던 출입 금지 펜스.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은 한적한 동네에 무슨 공사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앞뒤가 맞는 느낌이었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리는데 은혜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동네 재개발 추진된대요. 여기 땅값도 천정부지로 올랐고.”
“그런…….”
“그러니까 나라도 나서서 도와야겠다, 이런 생각 하지도 말라고요. 다정 씨 전 재산, 아니, 우리 보육원 식구들 전 재산을 다 끌어모아도 안 되니까.”
“이, 임대료를 더 낸다고 하면요? 그럼 계속 있을 수 있게 해주지…….”
“매달 천만 원씩 달래요.”
“네? 천만 원이요?”
다정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릴 수나 있는 금액이었나. 돈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각이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다.
“그냥 나가라는 소리죠. 우리가 무슨 수로 그런 큰돈을 내요. 그것도 매달.”
“…….”
“그러니까 다정 씨도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말아요. 어차피…… 다음 달이면 우리 다 나가야 돼요. 보육 교사도 저밖에 안 남았고요.”
“은혜 선생님 혼자라고요? 그럼 그 많은 일은 누가 다 해요?”
“누구겠어요.”
은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가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어림잡아도 희망원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서른 명이 넘었다. 그 많은 아이들을 지금까지 혼자 보살펴 왔다니.
자신을 먼저 챙기라는 원장 아빠의 말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정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부지 소유자 되시는 분하고 제가 연락해 볼게요. 아무리 그래도 다음 달은 너무하잖아요.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 사정을 말씀드리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실 거예요.”
“소용없어요. 벌써 원장님께서 사정에, 설득에 안 해본 게 없으니까.”
“그럴 수가…….”
“요새 원장님, 혼자 운전에 돌봄 일에, 몸이 열 개라도 되는 사람처럼 일하고 계세요. 사람 안 부르고 혼자 해보겠다고 보일러 고치다가 어깨 다쳐서 병원 가신 거고.”
“…….”
고생했을 원장 아빠를 생각하니 목이 턱 하고 매어왔다.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며 아이들을 응원해준 철중이건만.
정작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궈낸 이곳은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저도 모르게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데 복도에서 희미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문가를 힐끔 본 은혜는 다정의 손을 잡고 바삐 입을 열었다.
“지금 얘기 원장님 앞에서는 절대 비밀이에요, 알겠죠? 다정 씨 알면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단 말이에요.”
“네…… 알겠어요.”
어차피 마음이 아파 입 밖에 내지도 못할 이야기였다. 다정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철중이 원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생후 8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얌전히 안겨 있었다. 축축한 침이 가슴팍을 적시고 있었지만, 철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가 잠투정은 없는데 사람 손을 가리네.”
“역시 원장님을 찾는 게 맞았네요.”
“내가 처음 며칠을 끼고 있었으니까.”
“나머지 애들은 제가 볼게요.”
은혜는 다정을 향해 찡긋 눈짓을 한번 하더니 바삐 자리를 떴다.
“얘…… 이름은 있어요?”
겨우 표정을 추스른 다정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없어. 뭐로 지을까 고민 중이거든. 그렇지, 다정이 네가 지어줄래?”
“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