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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감히 누굴 협박해 (6/89)


06. 감히 누굴 협박해
2022.10.20.


태상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회장실이 관여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 비서는 눈썹을 한껏 끌어모은 채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상은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내쉬다 이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차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김 비서가 환희에 찬 목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그는 재빨리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내일 오전 스케쥴 비워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습니다. 보고는 10분이면 충분하니까.”

“……네. 그럼 임원 회의 마치고 잠시 들른다고 연락 넣어두겠습니다.”

김 비서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하얀 거짓말을 자연스레 뱉었다.

차 회장의 호출은 분명 태상이 멋대로 깨버린 약혼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다시 이어질 가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든 설득을 하려는 것이다.

30분으로 끝날 리가 없지. 그렇게 확신한 김 비서는 슬며시 핸드폰을 꺼내 팀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오전, 부사장님 회장실 방문. 스케줄 비울 것.’

-위잉, 위잉.

회장실 비서들에게 탈곡기 털리듯 탈탈 털렸던 지난 시간 탓일까.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채팅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쨍한 한낮의 햇살이 들이치는 오후, 커다란 집무실 안에 있는 가구와 소품에 반지르르한 광이 어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이 나는 건 자개로 만들어진 검은 빛깔의 명패였다. 집무실 크기만큼 커다란 명패 중앙에는 ‘기판사업부 본부장 윤명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톡, 톡.

명패 뒤의 여자는 기다란 진주색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눈앞의 남자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러니까…… 집안 식구들 관리를 잘 하셨어야죠, 김 상무님. 갑질이 뭐예요, 요즘 세상에 창피하게.”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필이면 그 비행기에 부사장이 타는 바람에…….”

김 상무는 뒷말을 흐리며 휑하게 벗겨진 머리를 조아렸다. 부사장에게 꼬리를 밟힌 지금, 자존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에어 코리아는 기내에서 사용하는 식기류 및 소모품을 모두 새로 교체했다. 그 과정에서 업체 선정이 진행되었고, 김 상무는 동생의 사업체가 선정되도록 뒤에서 힘을 썼다.

사업체는 제수씨가 대표로 등록되어 있고, 규모가 그렇게 큰 계약도 아니다.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일이라 생각하며 마음 놓고 있었는데, 쓸데없이 말이 많은 동생이 사달을 내고야 말았다.


“차태상 부사장이 이 일을 물고 늘어질까요?”

“당연히 그러겠죠.”

“어떻게 말씀 좀 잘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본부장님께서 덮으라고 하시면…….”

“하, 하하! 내가 덮으라면 덮는다고요? 김 상무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놈이 내 말을 듣는다고?”

명옥은 아무렇지 않게 태상을 ‘놈’ 취급했다. 아무리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모자지간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적대감이 느껴졌다.


“그런 말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사실상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지…….”

“이보세요. 김기주 상무.”

명옥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말허리를 잘랐다. 선을 긋는 듯한 말투에서 서릿발이 날렸다.


“난 그냥 중간에서 말 좀 전하고, 다리 좀 놔 준 건데 그게 어떻게 한배를 탄 거예요? 내 동생이 떼돈 벌었어요?”

“죄,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해서 그만……. 표현이 적절치 못했습니다.”

“그 형에 그 동생이네.”

명옥은 혼잣말처럼 읊조리더니 태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서류상으로는 문제 될 거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김 상무님께서 직접 운영하는 업체도 아니잖아요.”

“조금만 파보면 제 이름 나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단, 구매팀장이라도 불러다가 미리 말을 맞춰 놓는 게…….”

“글쎄요. 구매팀장님이 워낙 성격이 대쪽 같은 분이라…….”

명옥이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이 마치 오후의 티타임이라도 즐기는 사람 같았다.

순간, 김 상무의 눈동자에 벌건 불꽃이 튀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제가 뭘요?”

“나눠 드릴 만큼 나눠드렸는데 인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하다 이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감히 나를?”

“네. 협박하는 겁니다, 대단하신 윤명옥 본부장님을요. 하, 사람들이 기적이네 뭐네 할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이런 식으로 올라온 거로군요?”

흙수저의 기적. 평사원으로 시작해 권력의 꼭대기까지 오른 명옥을 두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에어 코리아에 수석으로 입사에 최연소로 대리직을 달았다. 최초, 최고는 어느새 당연한 수식어가 되었고 명옥의 야망도 그와 함께 커져 갔다.

하지만 너무 잘난 것도 문제였는지 어느 순간부터 진급도, 중요한 프로젝트도 전부 명옥을 빗겨 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라는 듯, 너는 끼워주지 않겠다는 듯 투명한 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명옥은 그 벽을 인정할 수 없었다. 보란 듯이 깨부수고 당신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더러운 손도, 썩은 줄도 잡았다. 악착같이 버티며 조금씩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때, 한 남자가 명옥의 눈에 띄었다.

바로 상처했다는 에어 코리아의 사장, 차영훈이었다.

하늘이 내린 기회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도 버리고 차 사장의 주위를 맴돌았다. 신분 상승의 기회 앞에 지난날의 사랑은 한낱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쿡 찌르는 듯한 김 상무의 도발에 명옥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네. 이런 식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뭐요?”

“……본부장님, 올라오는 건 오래 걸리지만 떨어질 땐 한순간입니다. 그걸 잊지 마셔야죠.”

“참 우아하지 못하시네. 뭐, 그래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하, 네. 물어 드리죠. 암요, 물고 말고요.”

“이빨도 없으시면서? 뭐로 무시게요?”

“없긴 왜 없습니까? 제가 나눠드린 콩고물이 얼마인데. 회장님께서 아시면…….”

“아시면 뭐요? 날 내치신다고요? 그래요, 그러시겠죠.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이니까. 근데…… 이거 하나는 명심해요. 그렇게 되면 난 회사에서 물러나게 되겠지만, 김 상무 아들은 인생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거.”

“……?”

갑자기 등장한 아들 이야기에 김 상무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명옥의 표정이 참을 수 없이 불안했다.


“아니, 구린 일을 하시려면 좀 멀리 떨어진 데 가서 하셨어야죠. 아들 병역 면제 처리해줄 의사를 우리 효성 병원에서 찾으시면 어떻게 해요?”

“그, 그걸 어떻게……!”

“회장님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이 회사에 있을 만큼 있었습니다. 내가 그 정도 눈, 귀도 없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우, 우리 아들은…… 그러니까 그게…….”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나가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업체 선정 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명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을 한번 흘겨보고는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

김 상무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함께 해먹을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모른 척이라니.

입금 내역을 공개하고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들의 인생 역시 시궁창행이었다.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쓰라린 배신감을 안고 집무실을 나서는데 문득, 중얼거리는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뇌리에 스쳤다.


‘젠장…… 그 승무원이 쓸데없이 토만 안 달았어도.’

순간, 터뜨리지 못하고 꾹꾹 눌러둔 분노가 한 번에 폭발했다. 거칠게 문을 닫은 김 상무는 주변을 살핀 후 바삐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잠시 후, 상대의 ‘여보세요’ 소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야, 너! 그때 그 승무원 이름이 뭐라고?”

 

***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보육 시설, 희망원.

휴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다정은 아침 일찍 보육원을 찾았다. 초라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정문을 지나자 익숙한 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평일 오전 시간이라 보육원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을 보고 가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차분한 대화를 나누기엔 이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다정은 며칠 전 원장 아빠와 통화를 했다. 그저 어깨를 삐끗해 병원에 다녀온 것뿐이라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안심시키듯 설득하는 그의 말은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아…… 이거.”

생활관으로 들어서자 한쪽 벽에 걸린 그림이며 상장이 다정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익숙한 이름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피아노 부문 금상 - 한영진’

도대체 얼마나 닦으면 이렇게 윤이 나는 건지. 마치 어제 받아온 것처럼 반짝이는 트로피 앞에서 다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희망원 아이들의 아빠, 차철중 원장은 영진의 상장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꿈을 키우라고, 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될 수 있다고. 그는 영진의 상장을 보며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똑, 똑.

적막한 복도 끝에 다다른 다정은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괜히 손잡이만 꽉 쥐는데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아빠.”

“다정이 왔구나. 어서 들어와.”

문을 열자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철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웃을 때 생기는 눈가 주름이며 단추를 끝까지 채워 입은 체크무늬 남방까지. 한결같은 그의 모습에 마음이 탁 놓였다.


“아빠, 잘 지내셨어요? 병원은 언제 입원한 거예요? 왜 미리 말을 안 했어요.”

걱정과 불안이 살짝 내려가서인지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정은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잰걸음으로 걸었다. 그러곤 그대로 책상을 빙 돌아 철중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이쿠.”

미처 다 일어나지 못한 철중이 짧은 소리를 흘리며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다정은 급히 손을 풀고 철중의 상태를 살폈다.


“앗, 죄송해요. 괜찮아요?”

“뭐가 이렇게 급해.”

“반가워서 그러죠.”

활짝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꽤 헐렁해 보이는 바지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라앉았던 불안이 빠르게 치밀어 올랐다.


“아빠, 진짜 퇴원해도 되는 거 맞아요? 의사는 뭐래요? 아니, 어쩌다 다친 거예요?”

“이 녀석아, 하나씩 물어, 하나씩.”

철중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 가벼운 꾸지람에 순식간에 미소가 번졌다. 다정은 가장 궁금했던 한 가지 질문을 골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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