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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찾을 땐 안 나오더니 (5/89)


05. 찾을 땐 안 나오더니
2022.10.16.


‘원장 아빠’는 다정과 영진이 신세를 진 희망 보육원의 원장님을 부르는 말이었다.

지난달에 찾아뵀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온 운동장을 뛰어다니셨는데, 갑자기 입원이라니. 불안한 마음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데.”

「과로로 쓰러졌대. 어디 다쳤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애들한테 전해 들은 거라 자세히는 몰라.」

“……그래서 병원비라도 보태려고 아르바이트를 한 거야? 누나한테 말도 안 하고?”

「미안.」

단출한 한 마디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원장 아빠와 보육원을 돕겠다고 나서는 게 분명 잘못한 일은 아닐 텐데. 동생의 사과에 묘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다정은 한동안 입술만 깨물다 떠밀리듯 할 말을 뱉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는 안 돼. 입시 준비하는 학생이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주말에만 하는 거야.」

“주말엔 고3 아니야? 누나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장 그만둬.”

「누나가 뭘 어떻게 해. 지금도 내 학비랑 희망원 기부금으로 월급 다 갖다 바치면서.」

“성수기 상여금도 있고, 적금 들어놓은 것도 있어.”

「상여금 나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헐렁해 보이지만 정곡만 콕 찌르는 게 역시 동생다웠다. 다정은 허세라도 부리듯 목소리를 크게 키웠다.


“어쨌든! 누나가 알아서 해.”

「맨날 그 소리.」

“그래, 맨날 그 소리다. 아무튼 누나가 이번 휴무 날 보육원 내려가 볼 테니까 넌 당장 알바 그만둬. 레슨도 원래대로 받고. 알겠어?”

바삐 말을 쏟아내는데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운전석을 향해 급하게 말을 붙였다.


“기사님, 저 앞 커피숍에서 우회전이요.”

“네.”

단박에 돌아온 기사님의 대답과 달리 핸드폰 너머 영진은 재깍 답을 주지 않았다.

택시가 코너를 돌고, 다시 경사를 오르는 동안 다정은 회유와 으름장을 섞어가며 영진을 설득했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영진의 입에서 ‘알았어, 알았다고.’라는 푸념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다 세워드려요?”

“저기 짙은 갈색 건물이요.”

택시는 빌라가 잔뜩 모여 있는 길가 초입에 멈췄다.

전화를 끊은 다정은 재빨리 계산을 마쳤다. 차 문을 열고 나오는데 눅눅한 여름밤의 공기가 훅 끼쳐왔다.

-끼익.

낡은 유리문을 열자 익숙한 비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정은 트롤리를 번쩍 들어 올린 채 까치발을 들었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오르는데 정신은 온통 희망원에 가 있었다. 보육원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원장 아빠의 상태는 얼마나 심각한 건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생각이 자연스레 통장 잔액으로 향했다. 영진에게는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지금 남은 돈으로는 이번 달 생활비를 쓰기도 빠듯했다.

다정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문 앞에 트롤리를 내려놨다. 도어락 커버를 향해 손을 뻗는데 순간, 허공에 손이 우뚝 멈췄다.


“……어?”

생김새며 색깔이 다르다. 고개를 퍼뜩 들자 ‘401’이라는 낯선 호수가 보였다.

다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주머니 안에 있던 명함의 존재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다.


 

***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입국장.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눈을 빛내던 중년 남성은 자신이 찾는 인물을 단박에 알아봤다.

모래알 가운데 탁 튀는 까만 진주 같은 사내. 자신이 모시는 남자 차태상은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홀로 빛을 발했다.

안경을 한번 가볍게 밀어 올린 남자는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네.”

“부재중이신 동안 있었던 회의 내용부터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태상은 시간 낭비가 제일 싫고, 말을 많이 하는 건 두 번째로 싫은 사람이다.

덕분에 김 비서는 그와 함께 일한 지난 3년간 ‘안부’라는 형식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오늘도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말을 멈췄다.


“김 비서님.”

“네.”

“중요하게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조용히 뒷말을 기다리는데 그가 우뚝 멈춰서 눈을 맞췄다. 평소 같으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대로 걸으며 이야기했을 텐데. 오늘 그는 무언가 달랐다.


“여객부 김기주 상무에 대해 알아봐 주십시오.”

“특별히 눈여겨보시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회사 내에서 누구와 뭘 했는지, 뭘 하는지. 전부 다 알아봐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 상무 동생이라는 인간. ……바닥까지 털어오십시오.”

“…….”

뚝뚝 끊어지는 음성이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시선을 올리자 겨울도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 비서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상이 감정이라는 걸 드러낸다. 지난 3년 동안 웃는 표정, 화내는 모습 한 번을 보여주지 않았던 그가.

공허한 느낌만 자아내던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노는 꽤 낯설었다. 김 비서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비행기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네.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누가 제 것을 건드리더군요. 잃어버렸던 건데.”

태상이 모래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내 것’을 향한 애착이 동시에 느껴졌다.


“운이 나빴군요. 부사장님 것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몰랐다 한들 용서할 마음은 없습니다.”

“……가시죠. 차로 모시겠습니다.”

김 비서는 단정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곤 가볍게 손을 뻗어 길을 안내했다.

차로 향하는 짧은 시간, 김 비서는 다음 주에 예정된 회의며 외부 미팅 일정을 간략하게 읊었다.

요일과 회의 주제를 서두로 던질 때마다 태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였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었다.

김 비서는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음악회는 예년처럼 참석만 하시고 시상은 재단 사람이 나서는 거로 해 두었습니다.”

“저는 올해부터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니 재단 사람들끼리 진행해주십시오.”

“네? 음악회를요?”

재능 있는 음악가 양성과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효성 클래식 청소년 경연대회’. 효성 재단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태상이 진두지휘하는 사업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작년에는 굳이 해외 출장 일정까지 변경해 가면서 참석을 고집하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바람인지. 김 비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이십니까?”

“네. 이젠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습니다.”

태상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세단에 가뿐하게 올라타며 말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 비서는 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기사에게 출발하라는 눈짓을 보내자 검은 세단이 부드럽게 밤공기를 갈랐다.


“재단 사람들이 많이 놀라겠습니다.”

도로 위에 시선을 두던 김 비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렇겠죠.”

“혹시 다른 방향으로 생각 중이신 자선 사업이라도 있으십니까?”

“…….”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지 태상의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흘렀다. 생각에 잠긴 듯 나른하게 깜빡거리기를 잠시, 그가 읊조리듯 말을 흘렸다.


“……빵.”

“네? 빵…… 말씀이십니까?”

“네. 별거 아닌 먹거리지만 받으면 기분 좋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태상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김 비서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얼마 전 보았던 기사 한 자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빵을 기부했다는 베이커리 사장님의 감동적인 사연.

그 빵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보낸 감사 편지가 더해져 시청자들의 안방을 따뜻하게 데워준 뉴스였다.

이거라고 확신한 김 비서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요새 효성 식품 소비자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는데 좋은 전략이 되겠군요. 사회복지 단체와 연계해 추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략 같은 건 없었습니다.”

“네? 그럼……?”

“그냥 개인적인 감상이었습니다.”

“…….”

묘하게 부드러운 음성이 신경 쓰였다. 김 비서는 슬쩍 시선을 올려 백미러를 통해 그를 들여다봤다.

편하게 풀어진 눈매, 호를 그리며 살며시 올라간 입술. 날카롭기만 하던 얼굴 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태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 위로 도로의 불빛이 아른거렸다.


‘이거 나 주면 너는?’


‘괜찮아. 나는 한 다정 하는 한다정이니까.’


‘다정한…… 뭐?’


‘헤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따사롭게 웃는 얼굴도, 언제나 남을 먼저 챙기는 성격도. 게다가 죽도록 찾을 때는 보이지도 않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고집까지 한결같았다.

인생에서 최초로 느낀 온기를 곱씹는 태상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저…… 부사장님?”

가볍게 부르는 소리에도 태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김 비서는 ‘크흠’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자 태상이 작게 움찔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수면 위로 올라옴과 동시에 그를 감싸고 있던 말랑한 공기가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회장실에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아주…… 여러 번.”

서른세 번이나 되는 통화는 ‘여러 번’의 범주를 한참 뛰어넘는 수치였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는 건 회장님을 욕보이는 것 같아 김 비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압니다. 저한테도 계속하셨으니까.”

“받으실 예정은……”

“없습니다.”

“……그러시군요.”

효성을 바닥부터 세워 올린 차남진 회장은 걸출한 기업가이자 황소처럼 드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재계의 황소도 손주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손주 며느리는 어디 있냐, 증손주는 언제쯤이냐. 입만 열면 결혼 타령을 하던 차 회장은 급기야 태상의 약혼을 멋대로 진행시키기에 이르렀다.

결혼 생각이 없던 태상은 약혼을 시원하게 깨버렸고 그 후, 회장실에 발길을 뚝 끊어 버렸다.

결국, 가운데 낀 비서들만 등이 격하게 터져나가는 게 요즘 효성의 내부 사정이었다.


“상반기 실적 보고를 내일 직접 들으시겠답니다.”

“변명이 구차해서 못 간다,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부사장님, 안 가시면 저희 전화에 불이 납니다. 이번 출장은 꽤 길었으니 문안 인사드리는 차원에서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새우 중의 대장 새우, 김 비서가 뒷좌석을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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