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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여자 기피증이라던데? (4/89)


04. 여자 기피증이라던데?
2022.10.13.



“한다정 씨.”

“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언제 꺼내 들었는지 그의 손에 작은 종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직사각형 종이는 명함이 틀림없었다.


“필요할 겁니다.”

“이걸 왜 저한테……?”

“능력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는 사람이니까, 김 상무라는 사람.”

그가 명함을 가까이 내밀며 말했다.


“해코지라도 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냥 만에 하나라고 해두죠.”

명함에는 그의 핸드폰 번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몇 자리 되지 않는 짧은 숫자이지만 공과 사를 허물기에는 충분하다.

다정은 고집스럽게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명함을 받아들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덧붙여진 짧은 한마디에 흐릿하던 경계선이 다시 선명해졌다.

태상은 아득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다정을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선 밖으로 밀려나는 건 역시 영 마뜩치 않다고, 그렇게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러 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별거 아닙니다.”

한껏 고도를 낮춘 비행기는 어느새 착륙을 앞두고 있었다.


 

***

길고도 이상한 하루였다. 역대급 진상이 인생에 치고 들어오질 않나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명함을 들이밀지 않나.

멍한 눈동자로 입국장을 가로지르는데 가슴 포켓이 유난히 묵직했다. 아무래도 ‘부사장’이라는 세 글자 덕분에 작은 종이가 더 무거워진 듯했다.

다정은 복잡한 머리를 이끌고 택시 승차장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쳐다도 안 볼 방향이었지만 오늘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기사님, 화곡동이요.”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바퀴가 도로 위로 미끄러짐과 동시에 시트 위로 부드러운 진동이 느껴졌다. 다정은 등받이에 눕듯이 기대며 뻣뻣하던 등줄기에 힘을 뺐다.

온몸을 축 늘어트리며 자세를 편하게 하자 비로소 일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편안히 감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머리 안쪽을 톡 하고 건드렸다.


‘아, 핸드폰…….’

착륙한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비행 모드를 풀지 않은 게 떠올랐다. 다정은 퍼뜩 고개를 들고 핸드폰을 꺼냈다.

익숙한 순서로 액정을 몇 번 두드리자 곧 데이터가 잡혔다. 룸메이트에게 지금 가는 길이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요란한 알림음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깨, 깨, 깨, 깨똑. 300+

300개가 넘는 메시지를 토해낸 메신저 창은 동기 단톡방이었다.

-대박, 그래서? 그게 누군데?

-알고 보니 휴가 가던 여객부 상무였대.

응. 상무 아니고 상무 동생.

-누군지 몰라도 진짜 한 건 크게 했다.

-이코노미에 있다가 비즈니스에 심부름 간 승무원이라던데?

응. 이코노미 아니고 퍼스트에 있다가 심부름 간 승무원.

-근데 그 비행에 출장 가는 부사장도 타고 있었대.

-미친! 누군지 몰라도 인생 제대로 종 쳤다.

응. 그래. 친구들아, 열띤 응원 고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래 비행기에서 일어난 일은 도시 괴담처럼 퍼져나가기 일쑤였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다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얘들아, 나 인생 종 안 쳤…….

-근데 우리 부사장…… 그 소문 진짜일까?

느릿하게 메시지를 입력해 나가는데 1초 먼저 올라온 톡이 손을 붙잡았다.


‘소……문?’

다정은 손가락을 우뚝 멈춘 채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파혼 얘기일까. 아니면 냉정하기 짝이 없다던 성격에 관한 것일까. 더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지만,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호기심은 막을 길이 없었다.

잠시 후, 형형색색 다채로운 목격담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실적 못 냈다고 부서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대요.

-비서가 재킷 받아주다가 어깨 한번 만졌기로서니 전근을 보내버렸대. 근데 훨씬 더 좋은 부서로, 승진까지 시켜서.

-부사장, 여자 기피증이라던데?
 


“여자…… 기피증?”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고 의문에 찬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정은 황급히 입술을 오므리며 액정을 들여다봤다.

말풍선 옆 사진은 언제나 정확한 정보를 물어오는 동기의 얼굴이었다. 다정은 쓰던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키패드를 두드렸다.

-여자 기피증이라고? 확실해?

-응. 확실해. 본사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들은 건데, 여자라면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한대. 얼마 전에 깨진 약혼도 집안 어른들끼리 억지로 시킨 거고.
 


“…….”

조금 기울었던 고개가 이제는 완전히 옆으로 누워버렸다.

오늘 그가 보여준 행동은 여자를 멀리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잠깐이기는 했으나 분명 제 팔을 잡았고.

전혀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양쪽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다정은 어느 쪽에 서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그때, 갑자기 찾아온 전화벨 소리가 팽팽하던 줄을 툭 하고 끊어 버렸다.

‘은지 선생님’

발신인을 확인한 다정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선생님.”

「다정 씨, 잘 지냈어요?」

전화를 건 사람은 영진의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딱히 가르칠 것도 없는 수재이긴 했지만, 입시 피아노를 훈련시키기 위해 반년 전부터 시작한 레슨이었다.

수업 진도나 진행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편하게 안부를 나누는데 어쩐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그녀는 한참 만에 전화를 건 본론을 꺼냈다.


「근데…… 요새 영진이 무슨 일 있나요?」

“아뇨. 걔야 뭐, 피아노 치는 거 말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그러세요?”

「아, 그게, 이런 얘기 전화로 드리긴 좀 그렇긴 한데…… 사실 영진이가 지난번 레슨에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거든요.」

“두 시간이나요?”

「네.」

노는 것보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영진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다가 알람을 못 들었다는데, 그래 보이지는 않았어요. 딱 봐도 밖에 있다 급하게 들어온 느낌이랄까?」

“네…….”

그녀의 설명은 계속 이어져 영진이 레슨을 한동안 쉬자고 했다는 것, 그리고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걸 봤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당혹스러운 이야기에 입이 떡 벌어지는데 묵직한 한 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네? 다음 달 레슨비를요?”

「네. 누나랑 상의하고 결정한 거라고……. 자기한테 돌려주면 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진짜같이 들리지가 않아서요.」

“선생님,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죄송해요. 끊어요!”

다정은 쏜살같이 말을 날리고 바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통화 목록을 켜 영진에게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짧은 통화 연결음이 길게만 느껴졌다. 다정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귓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내 평소보다 조금 까슬한 동생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응. 누나.」

“한영진, 너 지금 어디야.”

「어디긴 기숙사지.」

“기숙사?”

희미하긴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소리가 섞여 들렸다. 단조로우면서 경쾌한 멜로디는 편의점 입구에서 울리는 차임벨이 분명했다.

다정은 치미는 화를 꾹 누른 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뒤에 벨소리 다 들린다.”

「……기숙사 바로 앞 편의점이라서 기숙사라고 한 거야. 잠깐 음료수 사 먹으러 나왔어.」

“사 먹으러? 팔러 나온 게 아니고?”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너 지금 대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배신감, 작은 일탈에 대한 걱정. 불편러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격양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기세 좋게 시작한 말은 차마 끝맺지 못했다. 저 아래 묻혀 있던 미안함이 불쑥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고3 동생이 야밤에 편의점 카운터에 서 있다. 돈이 필요한 게 분명한데 누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정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하고 통화했어. 너 레슨 빼먹고 아르바이트했다며. 그것도 모자라서 선생님한테 레슨비도 도로 달라고 했고.”

「와……. 은지 선생님 보기보다 치사하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지?”

「나한테는 알았다고 했단 말이야. 다음 주에 주겠다고.」

확인도 안 하고 덥석 돈을 내어줄 거로 생각했다니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정은 짧게 ‘하’ 소리를 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돈이 갑자기 왜 필요한데?”

「돈 때문은 아니고 그냥 사회 경험 쌓는 중이랄까?」

“……한영진, 너 피아노 건반 개수만큼 맞아 볼래?”

「건반이 몇 개인 줄은 알고?」

“이게 진짜!”

 

 
속이 훅 뒤집히는 익숙한 감각과 함께 목소리가 대뜸 커졌다.

사람 머리 꼭대기에 앉아 여유를 부리는 건 동생의 오랜 취미이자 성격이었다.

천재 소리를 하도 듣고 커 이렇게 된 듯싶은데, 이럴 때는 정말 등짝을 세게 한 대 내려치고 싶었다.

다정은 화를 꾹꾹 눌러 삼키며 겨우 말을 이었다.


“몰라. 하나하나 세어 보고 때릴 테니까 얼른 설명이나 해. 갑자기 돈이 왜 필요한 건데.”

「……친구들한테 주려고.」

“친구들? 친구들 누구?”

「…….」

“여보세요?”

삐딱선을 잘만 질주하던 동생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말대답 하나는 분명 수준급인 동생인데.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다정은 빠르게 생각 속으로 잠겨 들었다.

잠시 후, 허무할 만큼 뻔한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입가에 간당간당 머물던 웃음이 단박에 사라졌다.


“너 설마 희망원 친구들한테 돈 가져다주려고 했던 거야?”

「…….」

“한영진.”

「……누나.」

“응. 영진아. 말해.”

「원장 아빠가 아픈가 봐. 병원에 입원했대.」

“뭐……? 원장 아빠가?”

예상치 못했던 한 마디에 다정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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