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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네가 주는 거라면 (3/89)


03. 네가 주는 거라면
2022.10.09.



“뭐 하는 겁니까.”

그는 꾸짖는 듯한 눈동자로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아무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시,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않았다고 책망이라도 하는 걸까. 다정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뾰족하게 고막을 찔렀다.


“당신이 사무장이야?”

태상이 입고 있는 각 잡힌 고급 슈트는 유니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태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심쩍다는 듯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승무원은 아닌 것 같고…… 본사 직원?”

“그렇습니다.”

태상이 다정을 가리듯 서서 말했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키, 출처를 짐작할 수 없는 당당한 말투. 거기다 찍어누르듯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시선까지.

대적하기 힘든 그의 태도에 주눅이 들었는지 남자는 눈을 흘기며 슬쩍 말투를 갈아 끼웠다.


“크, 크흠. 뭐, 본사 직원이 참견할 일은 아니고.”

“저는 에어 코리아 서비스 총책임자입니다.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사무장보다 높은 위치임을 암시하는 말에 남자의 눈썹이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그는 어깨를 한번 쭉 펴더니 타이르는 투로 설교를 쏟아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형님이 여기 객실부 상무로 계신다고. 나도 에어 코리아 협력 업체 사장이고. 한마디로 우리 회사라 이거야, 우리 회사. 그런데 서비스가 영 엉망이라 내 두고 볼 수가 있나.”

“여객부 상무요…….”

“그래. 김기주 상무. 자네, 본사에서 일하면 누군지 알지?

“압니다. 김 상무.”

“……뭐? 김, 김 상무?”

태상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태도에 일순 남자의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위아래를 몰라도 분수가 있지 새파랗게 어린 게, 뭐? 김 상무? 이거 아랫사람 교육 좀 똑바로 하라고 해야지, 안 되겠네. 자네, 소속이 어디야?”

“부사장실입니다.”

“직책은?”

“부사장.”

“…….”

순간, 남자의 미간이 바싹 좁혀졌다. 굵은 주름 사이에 짜증이 잔뜩 들어찼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가슴을 펭귄처럼 부풀렸다.

헛소리 말라고 호통이라도 칠 게 뻔했다. 다가올 소란에 마음이 심란해지는데 남자의 입에서 텅 빈 공기가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상식은 없어도 다행히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저, 정말 부사장……? 아니지? 이봐, 승무원 아가씨, 아니지?”

남자는 태상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다정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입을 여는데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부사장실 소속, 부사장 차태상입니다. 김 상무님께 아랫사람 교육 똑바로 하라고 말씀 전해주시죠.”

“진짜 부사장? 그, 그럼 효성 그룹 첫째……. 헙!”

에어 코리아 핵심 경영진이 오너 일가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남자는 제 형과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에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뻣뻣하던 목에 스르르 힘을 뺐다.


“아, 아니. 아랫사람 교육이라는 건 그러니까…… 예의 없는 승무원을 가르치다가 얼결에 나온 말이고…….”

“당신이 왜 우리 승무원을 가르칩니까.”

태상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소, 손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죠. 부족한 게 있으면 좀 가르치기도 하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당신은 오늘부로 우리 항공사 손님이 아닙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남자의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그는 상대가 몸을 낮추면 오히려 얕잡아 보며 무시할 부류의 사람이었다. 고마운 줄 모르고 그 등을 밟고 올라서려 할 것이고.

이런 인간에게는 누가 위인지 확실히 새겨주어야 한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태상의 눈동자에 고압적인 기색이 감돌았다.


“……손님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기내 소란 및 승무원에 대한 폭언. 명백한 탑승 거부 사유에 해당합니다.”

“탑승 거부? 아니, 아무리 부사장이라고 해도 이럴 순 없는 거죠!”

“부사장이라서가 아니라 상식이 있어서입니다.”

“사, 상식……?”

남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태상의 말을 따라 읊었다. 성격 같으면 벌써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기엔 뒷일을 감당할 수 없는 듯싶었다.

다정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조용히 그를 들여다봤다. 그에게는 주변을 압도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말은 날카롭지만 정중했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강렬했다. 남자로, 또 상사로 혼을 빼놓을 만큼 멋있는 사람이었다.


“더 할 말씀은 없는 것 같군요.”

태상은 간결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촥’ 소리가 나게 커튼을 걷더니 고개를 돌려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당황해 움찔하는 건 오직 다정의 눈동자뿐이었다. 밤하늘 같은 그의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시선을 보내왔다. 그 안에 읽히는 건 무언의 메시지였다.

안 가고 뭐 하냐고.

다정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태상과 남자를 번갈아 봤다. 그러자 태상이 커튼을 더 바싹 젖히며 조용히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는데 그가 따라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았다. 의아해 뒤를 돌아보자 커튼을 다시 치고 남자에게 다가가는 그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태상은 남자의 발 바로 앞에 멈춰 서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직 중이신 업체 이름이 뭡니까? 우리 회사 직원과 직접적으로 연계된 하청 업체는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 그건……! 사실 제가 사장은 아니고…… 그냥 전에 잠깐 몸담았던 회사인데 워낙 영세한 곳이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하, 하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습니까.”

허둥거리는 남자를 바라보는 태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조용한 맹수. 소문만 무성한 부사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정이 내린 결론이었다.

약한 강아지처럼 먼저 짖는 법도 없었고, 허투루 위협사격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묵직한 일격을 가할 뿐.

다정은 갤리에서 슬쩍 고개를 내민 채 그의 자리를 바라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표정에서 조금 전 보인 사나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 봐.”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자 화영이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까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며. 잠깐 갔다 와.”

“그래도 될까요……?”

조금 전, 두 사람은 문제의 현장으로 향하던 사무장과 객실에서 딱 마주쳤다.

컴플레인을 받은 승무원과 살벌하기로 소문난 부사장. 불길한 조합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지는데 태상이 먼저 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대화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다정은 덕분에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멍하니 조금 전 일을 떠올리는데 기내 방송을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여러분, 기장입니다. 저희 비행기는 현재 인천공항으로의 하강을 시작하였으며…….”

“아…….”

이 비행기에서 내린 후 그를 다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한솥밥을 먹는 사이라는 그럴듯한 말은 어디까지나 표현에 불과했지 그와 저는 먹는 밥이 확연히 다르다. 확률은 제로. 아니, 마이너스였다.

다정은 주위를 잽싸게 훑었다.


‘이거라도…….’

시야에 들어온 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상자였다. 금색 리본이 둘러진 고급스러운 상자는 승객들에게 나눠주는 탑승 기념 초콜릿이었다.

변변치 않은 구실이었지만 어색한 첫마디를 떼는데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것 같았다.

다정은 초콜릿을 손에 꼭 쥔 채 객실로 향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가 서자 그가 턱을 고정한 채 눈동자만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쭈뼛거리며 사이드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놓는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도로 가져가라고 하면 어쩌나, 안 먹는다고 하면 뭐라고 하지. 초조한 기분으로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는데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일, 많습니까?”

“……네?”

“조금 전 같은 일.”

“아뇨……. 자주는 아니고 가끔 있습니다.”

“가끔.”

태상이 눈썹 앞머리에 바싹 힘을 준 채 작게 읊조렸다.

우아하게 구겨진 미간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희미한 분노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가 경영하는 곳에서 이런 일을 겪게 하다니. 뒤늦은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그는 불안하게 맞잡은 다정의 두 손을 지그시 바라봤다. 죄인도 아니건만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영 탐탁치 않았다.


“정말 간혹가다 한 번입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구시는 손님은 많지 않아요.”

“그 말은…… 심하게 구는 사람은 많다는 뜻이군요.”

“…….”

“알겠습니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호한 눈빛이며 목소리에서 꺾을 수 없는 고집 같은 게 느껴졌다.

다정은 마른 침을 모아 삼키며 겨우 화제를 돌렸다.


“이건 헤이즐넛 잼이 들어 있는 초콜릿인데, 혹시 초콜릿 좋아하십니까?”

“안 좋아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건…….”

-탁!

조심스레 상자를 끌어당기는데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상자가 테이블 위에 멈췄다. 의아한 눈으로 원인을 찾자 상자 끄트머리를 꾹 누른 태상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세게 눌렀는지 모서리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다정은 눈을 도르륵 굴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상자를 찌그러뜨린 장본인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가끔은 먹습니다.”

그는 빠른 손동작으로 리본을 풀더니 가볍게 뚜껑을 열었다. 달콤한 냄새와 함께 동그란 초콜릿이 모습을 드러냈다.


“…….”

초콜릿을 입에 넣고 턱을 움직이는 태상의 표정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맛이건만, 그는 그저 씹어 넘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목울대가 한번 크게 움직이더니 태상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맛있습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거짓말을 하려면 조금 더 성의 있게 하시지.

다정은 정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의 거짓말에 장단을 맞췄다.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 걸 제 성의를 봐서 먹어준 게 분명했다. 순간, 거칠어 보이는 남자에게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초콜릿 좋아합니까?”

“네? ……네. 좋아합니다.”

뜬금없는 질문에 다정의 입가에 잠시 버퍼링이 일었다.

하지만 그가 제 취향을 궁금해 할 이유는 없다. 승객들의 선호도를 알고자 묻는 것이리라 확신한 다정은 상냥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승객분들께서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주변에 선물로 나눠주겠다고 몇 개 더 가져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군요.”

“네.”

다정은 간결하게 대답함과 동시에 자세를 반듯하게 했다. 이제 곧 착륙 준비로 바빠질 테니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오늘 일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분란을 해결해 주셔서가 아니라 저희 편에 서주셔서요.”

“우린 같은 편 아니었습니까?”

“그럼 너무 좋겠지만…… 사실 회사는 승무원 편이기보다 손님 편일 때가 더 많거든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다정은 급히 톤을 높이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표로 뽑힌 적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승무원들 몫까지 대신해서 감사드려요.”

눈꼬리가 부드럽게 물결치며 보기 좋은 곡선을 만들어냈다. 업무라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얼음도 녹일 만큼 따스했다.

다정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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