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내가 누군지 말해 (2/89)


02. 내가 누군지 말해
2022.10.06.


서비스가 끝나고 한가해진 시간, 다정은 서류 보관함에서 입국 신고서를 꺼냈다. 영어와 한국어를 분리해서 늘어놓는데 진선미 사무장이 멀찍이서 말을 던졌다.


“다정 씨, 그거 비즈니스에도 가져다주고 와요.”

“네. 알겠습니다.”

다정은 퍼스트 클래스 손님들에게 나눠줄 종이 몇 장을 따로 빼놓고 비즈니스 클래스로 향했다.

가격 대비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에어 코리아의 비즈니스석은 언제나 인기가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커튼을 열자 샴페인이며 와인을 즐기는 손님들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객실을 나누는 디바이더 줄을 친 다정은 사뿐하게 비즈니스석 통로로 들어섰다. 그때, 가장 듣기 싫은 한 마디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봐, 아가씨.”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 끝을 허공에서 까딱거리는 중년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깁스로 고정이라도 해 드려야 하나. 다정은 얄궂은 손끝을 바라보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네. 손님.”

“이거 맛이 영 별로네. 가서 퍼스트 걸로 준비해 와요.”

그는 마시고 있던 와인 잔을 대뜸 눈앞으로 들이밀며 툭 던지듯 말했다.


“와인이 입에 맞지 않으셨다니 유감입니다. 하지만 다른 클래스의 물품은 반입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제가 비즈니스 클래스의 다른 와인을…….”

“내가 벌써 다 마셔봤으니까 하는 소리지. 참 답답하네.”

계속되는 반말에 무례한 태도. 거기다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사항까지. 박제해도 좋을 만한 진상의 표본이었다.

다정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님의 말 한마디에 함께 흥분하기엔 그간 먹은 기내식만 한 트럭이었다.


“평소 어떤 와인을 즐겨 드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럼 제가 비즈니스 클래스 와인 중에서 최대한 비슷한 거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뭘 잘 알기는 하고?”

“물론입니다. 저희 항공사는 철저한 식음료 교육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뭐, 테이스팅 이런 거? 그런 데서 제대로 된 와인을 먹어보기나 하나……. 싸구려 입맛으로 무슨 추천을 한다고. 잔말 말고 가져오라면 가져와.”

남자는 손을 펄럭거리며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을 해 보였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이 한겨울 칼바람보다 차가웠다.

다정은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님, 승무원을 향한 반말 및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뭐야? 아니, 이 아가씨가 지금 누굴 갑질로 몰아가. 손님이 맛이 별로면 별로다, 말도 한마디 못 해?”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

“시끄럽고, 이 비행기 사무장 불러와.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형님이 여기 상무야! 알기나 해?”

남자는 삿대질까지 해가며 언성을 높였다. 목 언저리가 붉게 달아오른 게 이대로 두었다간 머리끝까지 흥분이 번질 것 같았다.

다정은 목소리를 조금 더 부드럽게 누그러뜨리며 서둘러 남자를 진정시켰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모든 승객분들께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원칙이라는 안내를 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 나도 그 잘난 원칙 따라 불만 접수 좀 해야겠네. 내가 협력 업체 사람이라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영 안 되겠어. 당장 사무장 오라고 해.”

“손님…….”

더 듣기 싫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창가 쪽으로 홱 돌렸다. 간곡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불러보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네. 사무장님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정은 입술을 깨문 채 단정히 고개를 숙였다. 죄 없는 카펫만 한참 노려보다 고개를 드는데 뒷줄에 앉은 승객들과 차례로 눈이 마주쳤다.

호기심에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화살처럼 따가웠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건만 밀려드는 창피함에 귓불이 확 붉어졌다.

-촤악.

다정은 커튼을 걷고 객실을 넘었다. 다시 돌아온 퍼스트 클래스 안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괜찮다, 별거 아니다, 마음을 다독이며 복도를 지나는데 목 안쪽이 칼칼하게 아팠다.

고급 와인 못 사 먹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아도 되는 건지. 남자의 말이 가시가 되어 목에 턱 걸렸다. 순간 서러운 마음이 덩어리가 되어 울컥 치밀었다.

다정은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하고서 급하게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1년 차 인턴처럼 갤리에서 질질 짤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탁.

문을 닫고 걸쇠를 잠그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흘렀다.

다정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수직으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냥 울면 눈가 화장이 엉망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

욕을 잔뜩 먹고도 제일 먼저 걱정하는 게 마음이 아니라 화장이라니. 힘이 다 빠진 웃음이 피식하고 흘러나왔다.

큼직한 물방울이 어느새 회색빛 바닥을 촘촘히 물들였다.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자 씩씩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또 뭐라 하겠다…….’

다정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티슈로 눈물, 콧물을 찍어냈다. 눈가는 어느새 조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을 정돈하고 걸쇠에 손을 올리는데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가락 끝을 파고들었다. 다정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아…….”

화장실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과 맞닥뜨렸다. 천장 조명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남자는 목을 꺾고 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한참 시선을 올리자 서늘한 눈매와 까만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울었습니까.”

“네? 아, 아닙니다.”

다정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우는 게 죄는 아니지만, 직장에서 눈물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한테는 다 말해도 됩니다.”

“정말 안 울었어요.”

“한다정 씨.”

“네?”

“내가 누군지 압니까?”

아무리 사무실로 출근하는 직군은 아니라지만 본인이 다니는 회사의 부사장을 못 알아볼 리는 없다.

다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우리 회사 부사장님이시잖아요.”

“…….”

태상은 씁쓸함이 가득 베인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봤다.

동그랗게 뜬 눈이며 또랑또랑한 눈빛.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조용히 시선을 떨궜다. 차분하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끓는 듯한 눈동자를 그럭저럭 가려주었다.


“아, 저…….”

다정은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자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부사장.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우리 회사 직원들을 살피는 게 내 일이니까.”

“…….”

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일개 직원 하나를 돕겠다고 나서다니. 다정은 입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한동안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대답은?”

“아, 네. 알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다정은 홀린 듯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붉어진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이내 몸을 돌려 객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을 착 감싸는 슈트가 탄탄한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냈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문득,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졌다.


‘화장실 가려고 했던 거 아닌가……?’

다정은 제 자리에 평온히 앉아 있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사정을 전해 들은 사무장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정 씨, 비행 하루이틀 해? 딱 봐서 진상이다 싶으면 그냥 주고 말았어야죠.”

“죄송합니다. 주변 승객분들도 다 보고 계시는데 특별 대우를 할 수는 없었어요.”

“하…… 진짜. 일 키우는 것도 재주다. 컴플레인 접수되면 우리 팀 전체한테 불이익인 거 몰라요?”

“…….”

규정대로 했지만 사무장이 제 편을 들어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고개를 떨군 채 그녀의 지시를 기다렸다.


“일단, 퍼스트 클래스 와인 리스트 보여드리고 원하시는 거로 서비스해드려요. 나는 지금 기장님께서 찾으셔서 콕핏 들어가 봐야 하니까 얼른 먼저 가요.”

“네.”

사무장은 마지막까지 납작 엎드릴 것을 강조하며 바삐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다정은 와인 리스트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 시선을 읽은 화영이 빠르게 다가와 손에 기다란 종이 한 장을 쥐여 주었다.


“여기.”

“고맙습니다.”

“어후, 지가 상무 동생이든 뭐든 우리가 알 게 뭐야. 안 그래?”

“네에…….”

평소보다 한층 두드러진 화영의 콧소리에 적잖은 짜증 섞여 있었다. 축 처진 저를 대신해 화를 내주려는 게 귀엽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다정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기내로 나섰다.

또 얼마나 쥐잡듯이 잡을는지.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는 달리 갈 곳도 없었다.

-촤악.

묵직한 마음으로 커튼을 걷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에 들린 와인 리스트를 바라보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정은 속으로 기합을 단단히 넣으며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사무장은.”

“곧 온다고 먼저 가서 리스트를 보여드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와인이 있는지 한번 보시겠어요?”

남자는 삐딱한 시선으로 다정과 리스트를 번갈아 보다 이내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대충 한번 눈으로 훑더니 가벼운 손놀림으로 리스트를 휙 던졌다.

빳빳한 종이는 다정의 무릎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와인 한 잔이 아쉬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다정은 떨어진 리스트를 주워들며 대답했다.


“이게 태도의 문제라고, 태도. 엉? 손님을 이렇게 무시나 하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불만 접수한다니까 겁나서 말로만 그러는 거지.”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딱딱 끊어 말했다. 완전히 우위를 점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만한 태도였다.


“아닙니다.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짢게 해드릴 의도는 없었어요.”

“그래? 그럼 무릎 꿇어.”

“……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릎이라니. 다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쳐들고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가 삐딱하게 다리를 꼬며 턱짓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안 그럼 내가 어떻게 아나.”

“소, 손님, 아무리 그래도 무릎이라뇨…….”

“못 꿇어? 그럼 사무장이 대신 꿇으면 되겠네.”

상위 클래스 고객의 불만 접수는 업무 고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싱글맘으로 자녀 둘을 키우는 진선미 사무장은 기록 관리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녀라면 분명 저를 대신해 무릎을 꿇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기장실에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불안한 눈으로 커튼 뒤를 힐끔거리는데 남자가 언짢은 기색이 섞인 헛기침을 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정은 처참한 기분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죄송했습…… 앗!”

나만 참으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릎을 굽히는데 불쑥 나타난 손 하나가 팔을 잡아끌었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든 다 말하라던 남자, 차태상이었다.



0